박경석 장군의 못 다한 이야기 : 박정희 대통령의 將軍劍
30대 후반 무렵인 1995~66년 경, 내가 대만에서 적지 않은 풍상을 겪으면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가끔 집안 일로 귀국하면 경주 인근 안강에 계시던 조부를 찾아뵈었다. 어느 날, 그날도 조부님을 찾아갔더니 조부께서 손자인 나를 당신 앞에 앉으라고 하신 후 바로 김종필 자민련 총재에게 전화를 걸더니 30분 이상 길게 통화를 하셨다.
“나를 쏙 빼닮은 손자 녀석이 하나 있는데, 꼭 雲庭(김종필 전 총리의 호)에게 인사를 시키고 싶으니 가면 많이 거둬주라”는 취지의 말과 함께 “이 놈이 돈 없이 어렵게 공부한다는데 서울 올라가는 대로 바로 찾아가게 하겠다”고 하시면서 전화를 끊으셨다. 1912년생의 조부님은 당시 80대 중반이셨지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지금도 나의 귓전을 울리는 것 같다.
그러나 대만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다시 서울로 올라온 나는 조부의 말씀을 어기고 김종필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 뒤 내가 찾아가지 않았다는 걸 아신 조부님은 한 번은 직접 서울에까지 올라오셔서 손자의 손목을 잡고 여의도로 가자고 하신 적도 있었다. 그 때도 나는 도망을 치다시피 해서 그 국면에서 빠져 나간 적도 있다.
2021년 1월 29일 오늘, 우연히 지나간 1970년대 중반의 ‘대한뉴스’(제1027호)에서 당시 김종필 총리가 대만의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의 서거에 조문을 간 뉴스보도를 보게 되었다. 뉴스를 접하면서 정치를 “虛業”이라고 한 雲庭의 풍운아 같은 기질, 기골이 장대하시고 성격이 대쪽 같으며, 늘 약자 편에 서서 그들을 도와주며 사셨던 조부님과의 관계 그리고 한-대만 관계를 잠시 떠올려 봤다.
그런데 오늘 박경석 장군께서 박정희 대통령의 장군검이 생각지도 않게 자신에게 오게 된 숨은 얘기를 직접 쓰신 글이 박경석 서재에 있으니 그걸 雲靜의 블로그에 올려놓으면 좋겠다는 간단한 메모를 보내주신 이메일을 봤다. “박정희의 장군검?” 제목이 특이하다 싶고 분명 무슨 곡절이 없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내용도 보지 않고 흔쾌히 그러겠다고 답을 보냈다.
그리고 다른 일로 오후 늦게서야 박 장군께서 말씀하신 박정희의 장군검에 얽힌 얘기를 보니 내용이 김종필과 관계된 것이었다. 그 글을 장군검과 관련된 사진들과 함께 아래에 올려놨다.
박정희가 雲庭에게 하사한 장군검을 훗날 세월이 한참이나 지나 임종이 다가오면서 박경석 장군에게 보낸 이야기다. 숨겨진 이 이야기에 누구라도 많은 것들이 상상되거나 에피소드로 말할 순 있어도 섣불리 단정할 순 없겠다 싶다.
雲庭은 왜 타계하기 얼마를 앞두고 자신이 오래 전에 박정희 대통령에게서 받은 장군검을 박경석 장군에게 전했을까? 어떤 마음에서 그랬을까? 쿠데타를 염두에 둔 시점에 젊은 영관 장교 박경석에게 같이 일하자고 제의한 雲庭의 요청을 거절한 것이 그에겐 깊은 인상, 아니 결정적인 인상을 남겼던 것으로 보인다.
진급은 물론, 정치권력도 거머쥘 수 있고, 동시에 영화도 누릴 수 있던 절호의 기회였음에도 일언지하에 거절한 군인, 그 용기와 담백함과 군인의 길을 고수한 강직함에 雲庭은 내심 깊은 감명과 함께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박경석 장군이 밝힌 내용을 읽어 보면, 박 장군은 인연이 깊게 될 뻔 했던 雲庭과의 얽힌 지난 이야기를 밝히는 것으로 雲庭이 왜 박 대통령이 자신에게 하사한 검을 임종 얼마 전에 박 장군에게 보냈는지 상상하게 한다. 雲庭이 박 장군에게 그 검을 건네준 곡절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감이 잡힌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나의 섣부른 판단으로는 雲庭이 박경석 장군에게 평생 마음의 빚을 졌던 것으로 보인다. “장군검은 참군인이 가져야 한다”고, 자신은 가질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雲庭은 한국현대사에 싫든 좋든 여러 분야, 특히 정치에 넓은 족적을 남기고 간 인물이다. 그런데 이번엔 또 사람과의 인연 면에서 많은 이들로 하여금 상상의 뜨락으로 초대하는 깊은 여운을 남겨 놓고 갔다. 진한 감동을 더해주는 일화다.
나는 역사적, 정치적 관점에선 雲庭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런 글도 쓰기도 했다. 한국의 바람직한 정치발전을 위해서 그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사람의 멋과 맛이라는 측면에서는 雲庭에게서 그의 호처럼 적지 않은 운치를 느껴왔다. 오늘 또 한 가지 구름이 드리워진 뜨락 雲庭의 멋과 운치를 보게 됐다.
평생을 군인, 전쟁, 군사쿠데타, 정치라는 긴 인생 역정을 겪으면서 온갖 영화와 풍상과 시련과 배신과 은혜 등등 인생의 단맛, 쓴맛, 짠맛, 신맛, 매운맛을 모두 맛봤을 자신이 삶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 정치를 “虛業”이라고 한 사람 雲庭! 94세로 돌아가신 조부님과 인연이 닿았으면서도 나와는 인연이 닿지 않고 그저 먼발치에서 지켜본 사람, 그가 어제 박경석 장군을 통해 또 한 번 내 작은 인연의 뜨락 안에 들어와 있다. 박경석 장군이 밝힌 장군검을 통해서······.
박 장군은 그 당시 "충청 인사" 모임에는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시대는 달랐어도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부터 동향인 재경 포항사람들이 저도 나도 재경 영일포항향우회인 "영포회"에 드나들 때 나도 포항사람이었지만 단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5년 동안 의도적인 無緣의 세월을 보냈다. "빨갱이가 아닌가" 하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
박경석 장군의 글은 한 군데 자구만 수정해서 아래에 실었다. 원문은 박경석 장군의 인터넷 개인 카페(인터넷 다음의 『박경석 서재』)에서 볼 수 있다.―2021. 1. 30. 06:55, 雲靜 編註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별세하기 반년 전 무렵, 그의 측근으로 알려진 인사가 갑자기 대전 박경석 서재를 방문하였다. 그는 나의 열렬 팬이며, 국가관이 뚜렷한 인물로 나와는 평소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날따라 그는 긴장하면서 그가 가지고 온 길다란 포장물을 풀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인가 궁금해 하는 눈으로 포장 푸는 것을 주시했다. 그런데 뜻밖에 장검(長劒)이 나타났다.
“이 장군검은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 동지 몇 사람에게만 나누어 준 것입니다. 우선 이 장군검을 누가 준 것인지 묻지 마시고 받아 주십시오.”
나는 그의 말대로 장군검의 내력을 묻지 않고 받아두었다. 자세히 장군검을 살피니 칼집 윗부분 양쪽에 대통령 문장이 정교하게 주조돼 있었고 칼집은 물소 뿔이며 칼집 이음새 장식의 두 고리는 순금이며 장식 두 개의 구슬은 순옥이었다.
그날로부터 몇 개월이 흘렀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고 보수 인사는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나는 김종필 전 총리의 심정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그의 별세 소식이 언론에 보도됐었다.
다시 몇 개월이 흘렀다. 갑자기 전화로 약간은 음주 후의 목소리 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장군검의 출처를 밝히지 말라고 해 참고 있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장군검의 주인을 밝히겠습니다. 그 장군검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하사 받은 김종필 총리님 것입니다. ‘이 장군검은 참군인인 박경석 장군이 가지고 있어야 돼’ 하시며 전해 주라고 해서 박 장군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많은 장군들 가운데 왜 박경석 장군님에게 준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장군검을 나에게 전했던 그 인사의 말에 나는 대충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김종필과 나와의 인연은 별로 좋지 않았다. 1959년 경, 그는 육군중령이고 나는 육군소령으로 HID (육군첩보부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공작장교의 직함으로 DMZ내에서 군사정보 수집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북 첩보활동이 내 성정에 맞지 않아 야전군으로 전속을 요청하기 위해 HID 행정처장인 그를 만난 것이었다. 그는 뜻밖에 긴장하면서 “함께 일하자”고 하며 혼란한 시국과 부패 만연에 대한 불만을 말하면서 이상야릇한 뉘앙스가 풍기는 말을 하기에 나는 단칼에 그를 나무라며 야전군 행을 강행했다.
그 후, 그는 5.16쿠데타에 성공, 승승장구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국무총리가 되었고, 나는 야전군 철원 북방 1사단 GOP 대대장으로 근무를 마치고 진해 육군대학에서 강의하다가 베트남전 대대장으로 발탁돼 맹호사단 제1진으로 출진하게 되었다.
1965년 10월, 부산항 제1부두에서 환송식이 거행됐는데 그때 김종필 총리가 내 앞으로 다가오면서 나에게 위세 당당한 표정으로 격려의 말을 했다.(아래 사진 참조) 그와의 만남은 그 경우가 유일하다.
세월은 많이 흘렀다. 나는 전역 후 같은 충청도 사람으로 ‘충청 인사’ 모임에 여러 번 초청 받았지만 단 한 번 참석하지 않았다. 때때로 김종필 이야기만 나오면 좋게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군에 있을 때나 전업 작가 시절이나 변함없이 전두환의 12.12쿠데타를 포함 두 번의 쿠데타에 강렬한 부정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시종 일관 비판의 자세를 지켰다. 마침내 나는 그로 말미암아 군복을 벗어야 하는 운명을 맞았다.
나는 지금도 어떤 명분하에서도 군인의 쿠데타는 합리화 될 수 없다고 단정한다. 더구나 쿠데타 주역 박정희와 김종필에게 육사 총동창회에서 ‘자랑스러운 육사인상’ 수상자로 선정한 사안에 대해 ‘세기의 웃음거리’로 평가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정치적 공적과 군인의 정의는 달리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軍史觀이다. 세계 어느 문명한 나라의 군대 육사에서 쿠데타 주역을 자랑스럽다고 떠받들며 상을 준단 말인가.
그런 나에게 정치군인으로서는 의미 있고 귀중한 장군검을 비판자에게 넘기다니······ 나는 도저히 해답을 찾기 어려웠다. 더구나 그는 병석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있을 때여서 삶을 마감하기 위한 정리 과정에 있을 그 시간에, 인생 결산의 그 숭엄한 순간에······
결국 나는 숙고 끝에 ‘인생 경륜의 勝者’는 김종필 총리임을 확인하면서 그의 명복을 빌었다. 그는 혁명가요, 나는 군인이었다.
이 사연의 중재자는 바로 위 사진의 이권남 군이다. 이권남 군은 ‘혁명가 김종필’과 ‘군인 박경석’의 명운을 기가 막히게 조명하는 역할을 완수했다.
김종필 전 총리의 관용정신과 전우애를 기념하기 위해 이 장군검을 박경석 가문 가보의 하나로 보존하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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