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의원은 배신자인가? : 내부고발의 모순과 의리
작년 7월, 새누리당 원내대표인 유승민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의 정책기조를 흔든 발언을 했을 때, 보수언론들의 지면은 온통 그가 오늘날 그 자리에까지 오게 한 박통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배신자”라는 평가가 주류를 이뤘다. 여론조사 결과, 일반인들의 생각도 그랬다. 대구 경북 지역 주민들은 그를 의리 없는 자라고 비난하는 이들이 특별히 많았다. 당사자인 박근혜 대통령은 직접 나서서 ‘유승민’을 거명하진 않았지만 그를 ‘배신자’로 몰아붙이고 “배신의 정치” 운운하면서 당과 대구지역 및 유 의원의 지역구민들에게 그를 표로 ‘심판’하라는 독기 어린 요청까지 했다.
당시의 반응들을 되돌아보면 의리의 개념, 인간의 주체성, 공과 사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력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가 하는 점을 알게 해준다. 필자 개인적으론 2014년에도 의리란 무엇이고, 그것의 존재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한 바 있다. 바로 유병언의 아들 유대균의 도피를 석 달간이나 도운 박수경이 언론에 "후위무사"로 보도됐을 때였다. 의리와 충성은 무엇이 다르고 양자의 바람직한 존재양태에 대해서 시론적인 졸문도 한 편 썼다. (http://blog.daum.net/suhbeing/273 참조) 내가 그만큼 의리와 충성의 쓰임새를 구분해야 함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 유승민은 정말 배신자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는 배신자가 아니었다. 나는 유승민 의원을 알지 못한다. 그와는 단 한 번도 만나 본적이 없다. 정치적으로 그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가고자하는 정치적 지향점도 나와는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제기한 발언은 충언, 고언이었다고 본다. 박근혜에게도, 국민의 입장에서도 득이 더 많지 해가 적었던 소리였다. 오히려 바른 소리를 해야 할 시기에 용기를 내서 한 직언이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유승민이 배신자가 아니라는 근거를 제시하고 싶다.
우리 사회에는 오래 전부터 윗사람에게, 특히 그것이 자신의 인사 결정권자이거나 혹은 이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력자라면 그에게 직언, 충언, 고언하는 이들이 없어졌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순 없다. 현재는 바른 말 하는 이는 어느 조직이든 어림잡아 대략 10%도 안 되지 싶다. 어쩌면 조선조 이래 계속된 한국인의 문화와 전통인지도 모른다. 지난 한 때 어떤 정치지도자는 직언하는 참모가 좋다고 해놓고선 막상 자신이 권력을 잡으니 직언하는 참모를 내쳤다. 이명박이 정두언을 멀리한 것도 그런 예다. 이제 요즘 세상에는 아부꾼들로 넘쳐난다. 주군의 의중만 헤아려 그가 듣기 좋아할 말만 한다.
한 때, 우리사회는 정부의 공무원들, 군계통의 조직들에선 공무원의 비리를 근절하고 맑고 투명한 공무원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내부고발을 장려해왔다. 그래서 간혹 용기를 내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의 비리를 제보하는 내부 고발자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문제가 덮이고 말 비리들이 사회에 드러나서 시정되거나 개선된 경우도 더러 있다. 내부고발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 용기와 정의감을 칭찬하고 높이 평가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내부고발을 한 자들 중에 어떤 경우는 영웅으로 평가하거나 심지어 정치권에서 인재로 영입하는 일도 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예전 보다는 많이 줄어든 듯하다. 요즘은 서서히 내부고발을 장려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대세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유승민은 새누리당이라는 거대 여당조직의 내부 고발자가 아닌가? 유승민이 여타 기관의 내부고발자와 무엇이 다른가? 그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그가 여권 내부와 집권당 내부의 개선점을 얘기한 내부고발자가 아니라는 소리다. 엄청난 모순이다. 유승민에 대한 배신자 의식과 평가는 심사숙고해야 한다. 오히려 어렵사리 용기를 내서 바른 말, 참고할만한 직언을 한 것이 집권여당은 물론, 전체 정치발전에 도움이 되고 나아가 정치가 깨끗해지면 결과적으로 국민이 스트레스를 덜 받고 덜 불편해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순 없는가?
유승민을 박근혜에 대든 배신자라고 비난하는 이들은 의리와 충성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의리를 개인적 관계라는 소아적으로 보고 행하는 자기 식의 구태의연한 의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패거리가 옳거나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도 결국은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다. 국익이나 국민 다수의 공익이 우선이란 걸 알고도 자기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 하다 보니 생겨나는 자기모순인 것이다. 지금도 국회의원, 자치단체장을 선출하는 선거철이 되면 평생을 선거로 먹고사는 꾼들을 부지기수로 볼 수 있다. 대통령 개인의 이익 보다는 국익, 공익이나 사회 안정성이란 안중에도 없다.
그들에게 그 소아적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는 나는 헛소리 해대는 등신이라고 욕만 먹는다. 그래도 나는 지금껏 시류에 편승하지 않았고, 내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 하면서 살지 않았다. 오히려 소신을 지키며 사느라 손해만 많이 본 사람이다. 그런 사실을 결코 후회하거나 아쉽게 생각한 적이 없다.
패거리문화는 세계의 어느 민족에게도, 어느 나라에나 다 있는 현상이다. 유독 한국에만 있는 건 절대 아니다. 또 현대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라지지 않은, 어찌 보면 인간이 정치적 동물, 사회적 동물인 이상 패거리는 인간사회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사에서 끼리끼리 다니고 뭉치고 하는 행위는 영원히 깡그리 근절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문제는 공적영역에서의 지나친 패거리가 공공의 이익을 해친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이익과 국민 다수의 공익이 상충될 때는 후자를 우선시 하는 게 말처럼 쉽진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 국민들 대다수가 정확한 평가가 보이지 않는 문화가 되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의 민족구성원의 보편적인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 가운데 하나다. 내부고발자가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그만큼 사회가 맑아 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좋게 말해서 뭉치기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민족에 비해 유달리 패거리 짓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인 신화에 함몰돼 생겨난 종족의식, 집단의식의 발로다. 이는 아직도 우리사회가 전반적으로 기형적 의리를 중시하는 전근대적 인간형이 다수가 된 사회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자신이 역사의 주체로서 공적 가치와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21세기적 인간형으로의 이행에 가속도가 붙지 않고 있다. 이행을 더디게 만드는 원인은 의리를 충언, 고언, 직언보다 더 큰 덕목이나 가치라고 보는 가치관과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사회의 발전 보다 개인의 이익을 더 우선시 하는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부언하지만, 당시 유승민 의원의 발언은 옳았고 그는 결코 배신자가 아니었다. 내겐 최고의 정치인은 아니지만 최고 권력자에게도 용기 있게 직언할 수 있는 괜찮은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로 남는다. 단, 전제가 한 가지 있다. 직언이 자기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공익과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유승민이 정말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공익과 국익을 위해서 그렇게 했는지는 시간이 지나 그의 행적이 말해 줄 것이다.
2016. 4. 17. 10:50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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