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6․25전쟁 참전 전과정 개요
1950년 10월 19일부터 시작된 중국의 6․25전쟁 참전은 당시 중국공산당 주석이자 중국국가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전쟁발발 전에 이미 남침전쟁 도발을 동의한 바 있다. 전쟁도발 약 40일 전인 5월 15일,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의 지시로 극비리에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남침전쟁을 동의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회담에서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이미 김일성에게 남침전쟁을 동의해준 사실을 확인한 뒤 남침전쟁 도발은 시기상조라고 한 기존의 유보적 입장을 바꿔 자신도 동의했던 것이다. 그는 스탈린이 동의한 이상 준비 중이던 타이완 ‘해방’을 뒤로 미루고 한반도 적화통일이 먼저라고 하면서, 그것은 공동의 과제가 됐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남침 개시 후 미군이 개입하면 중국군을 보내 군사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라고 하면서 중국 둥베이(東北)지역에 군사력을 증강하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6․25전쟁 발발 후인 1950년 7월 2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예견한 마오쩌둥은 6․25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것으로 보고 참전을 위한 군사준비를 지시했다.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은 정무원(현 국무원의 당시 명칭) 총리 겸 외교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두 차례에 걸쳐 중앙군사위원회 국방군사회의를 열어 ‘둥베이변방군’을 조직하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참전 시 필요한 각종 군사준비에 착수했다.
참전을 위한 사전 군사준비의 일환으로 중국지도부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주력인 제13병단 예하 제38․제39․제40군단과 둥베이군구(東北軍區)로 배속된 제42군단, 그리고 제1․제2․제8 등 3개 포병사단과 공병, 기병 수 개 사단 및 연대를 포함해 총 25만 748명의 병력으로 편성된 둥베이변방군을 7월 15일부터 둥베이지역으로 이동시켰다.
둥베이지역으로 이동해온 둥베이변방군의 각 부대들은 압록강 대안의 안둥(安東), 톄링(鐵嶺), 신카이위안(新開原), 라오카이위앤(老開原), 랴오양(遼陽), 투쟈툰(土佳屯), 하이청(海城), 퉁화(通化), 싼위앤푸(三源浦), 류허(柳河) 등지에 집결해 북한 진입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대기했다.
1950년 9월 하순, 유엔군과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이어 수도 서울을 수복했다. 이 때 아군의 공격에 밀려 38도선 이북으로 후퇴한 김일성은 먼저 스탈린에게 소련군을 직접 파병해주거나 혹은 공산권 국가들의 군대로 “국제의용군”을 조직해 파병해줄 것을 요청했다.
유엔군과 한국군의 북진으로 패망 일보직전에 처한 최악의 위기상황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소련군의 직접 파병을 거절했고, 대신 마오쩌둥에게 중국군을 파병해줄 것을 요청했다. 소련군 파병이 거부되자 다급해진 김일성은 중국의 참전을 꺼려해 온 그간의 입장을 바꿔 마오쩌둥에게 특사를 보내 군대파병을 요청했다.
10월 1일~2일 사이 김일성과 스탈린으로부터 연이은 파병요청을 받은 마오쩌둥은 긴급히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회의 및 정치국확대회의를 소집해 참전을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고위 당 간부들은 물론, 비공산당 저명인사들의 집합체인 이른바 ‘민주인사’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건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중국으로서는 한반도전쟁에 개입할 상황이 아니며, 소련 공군의 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참전해선 안 된다는 게 참전반대자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그 후 연이어 소집한 수차례의 회의를 통해 반대자들을 설득하거나 제압하면서 소련 측의 공군 지원이 없이도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10월 8일 둥베이변방군은 이른바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이하 ‘중국군’으로 통일함)으로 개칭됐다. 그리고 중국군은 10월 19일부터 세 갈래로 나뉘어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전개했다.
동시에 둥베이군구 후방근무지원부(‘후근부’)도 3개의 ‘출국후근분부(出國後勤分部)’로 개편돼 10월 19일부터 10월 25일 기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북한의 주요 교통로에 배치됐다. 4개 군단으로 편성돼 제1차로 북한지역에 투입된 지상군 25만 여명이라는 대군의 중국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은 펑더화이(彭德懷)였고, 부사령관 겸 부정치위원은 덩화(鄧華)였다. 이 때 해군과 공군은 참전하지 않았지만, 전쟁 후반기에 가서 소수의 해군 특수요원들이 서해안의 기뢰를 제거하기 위해 극비리에 투입됐다.
“미 제국주의의 침략”에 항거하여 붕괴직전의 “북한정권을 구원하고, 가정과 나라를 지킨다”(抗美援朝, 保家衛國)는 명분으로 대군을 파병한 마오쩌둥의 숨겨진 참전 동기와 목적은 여러 가지가 서로 얽혀 있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중국의 전통적 안보관에서 북한정권의 붕괴를 방지하고자 한 점, 중북 국경지역의 안전 확보, 그 해 2월 중순에 체결된 중소동맹의 원활한 이행을 위해 부득이 참전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스탈린의 간접적 외압, 한반도 전진공격을 통한 적극적 방어, 중국국내 전장화 회피 그리고 기타 몇 가지 국내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 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국정부는 사전에 마오쩌둥의 남침전쟁 동의가 김일성의 남침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이 됐던 사실을 밝히지 않았으며, 지금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북진 중 미국 행정부가 중국정부에게 중북국경지역에서의 중국의 안전과 이익을 보장하겠다고 통보한 사실도 숨겨왔다. 그러면서 줄곧 6․25전쟁의 발발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이중적 태도를 보여 왔다. 오히려 자신들이 말한 “항미원조전쟁”을 “미 제국주의”의 침략에 항거해 참전한 “정의의 전쟁”이었다고 호도하고 강조해왔다.
중국 측은 중국군이 한반도에 잠입한 1950년 10월 19일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된 1953년 7월 27일까지 33개월 4일 동안 한국군과 유엔군을 상대로 치룬 전투들을 전투성격을 기준으로 크게 전략적 반격시기와 전략적 방어시기 두 단계로 나눈다. 전자는 1950년 10월 25일에서 1951년 6월 10일까지로 이른바 “운동전”을 수행한 시기다.
후자는 1951년 6월 11일에서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조약 체결까지로 “진지전”을 수행한 시기다. 또한 “전역”(戰役, campaign)이라는 개념을 적용해 전쟁 전 기간 동안 참전 초기 다섯 차례의 전역과 전쟁후기 세 차례의 전역 및 주요 전투로 구분한다.
다섯 차례의 전역은 1950년 10월 25일~11월 5일의 제1차 전역, 1950년 11월 25일~12월 24일의 제2차 전역, 1950년 12월 31일~1951년 1월 8일의 제3차 전역, 1951년 1월 25일~4월 21일의 제4차 전역, 1951년 4월 22일~6월 10일의 제5차 전역이다.
전쟁 후반부의 세 전역과 주요 전투는 계웅산전투(1951년 6월 24일~6월 29일), 사기막전투(1951년 7월 14일), 1951년 하계-추계 방어전역(1951년 8월 18일~11월 31일), 상간링(上甘嶺, 즉 단장의 능선전투) 방어전역(1952년 10월 14일~11월 25일), 금성전역(1953년 7월 13일~27일) 등이 있다.
제1차 전역은 청천강 이북의 주요 군사요로에 매복하고 있던 중국군이 평양 점령 후 파죽지세로 압록강 부근까지 북상 진격한 유엔군과 한국군을 공격함에 따라 시작됐다. 중국군으로부터 불의의 기습공격을 당한 아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물러났지만 이내 재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군은 제1차 전역 종결 전후 총 9개 군단 46만 명으로 증강된 중국군의 제2차 공세에 밀려 한반도의 군사, 정치적 통일을 눈앞에 두고 동서의 모든 전선에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군은 급기야 12월 6일 평양까지 적에게 내주고 38도선 이남으로 물러났다. 요컨대 눈앞에 둔 한반도의 통일이 중국군의 개입에 저지당한 셈이다.
아군이 38도선 이남으로 후퇴하기 시작하자 소련, 중국과 북한의 수뇌부 사이에는 여세를 물아 휴식 없이 공격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극도로 지친 중국군을 부대정비와 휴식을 취하게 한 뒤 이듬해 봄에 공격을 재개할 것인지를 두고 한 때 이견이 발생했다. 스탈린,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계속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전장의 중국군총사령관 펑더화이는 휴식과 부대정비 그리고 병력을 충원한 후 재공격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세 사람의 의지가 반영돼 공격을 계속하기로 결정됨에 따라 중국군은 1950년 12월 31일부터 제3차 전역을 개시했다. 제3차 전역 시부터 중국군지휘부는 12월 초순 설립된 “中朝연합사령부”(즉 중국-북한연합사령부)를 통해 북한군까지 지휘, 통제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중국군의 제3차 공세에 밀려 결국 이듬해 1월 4일 또 다시 서울을 포기하고 후퇴하게 됐다. 아군은 교통사고로 사망한 워커(Walton Waker) 장군의 후임으로 새로 미 제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의 지휘 하에 1951년 2월 중순부터 반격을 개시해 3월 서울을 재탈환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피아간에 휴전회담 개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전투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반복됐다. 동시에 미국과 소련, 중국 및 북한의 수뇌부는 공히 누구라도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거나 격퇴할 정도로 결정적 승기를 잡기 힘들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중국에 대한 전쟁확대 여부를 둘러싸고 영국과의 갈등과 조율을 거친 미국 행정부는 더 이상 전쟁을 확대하지 않고 38도선쯤에서 휴전하는 것으로 전쟁을 매듭짓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미국 수뇌부는 유엔군이 추구한 한반도의 군사적, 정치적 통일이라는 북진 초기의 목표를 폐기했다. 동시에 트루먼 대통령은 확전방지를 위한 조치의 하나로서 원자폭탄의 사용과 전쟁을 중국으로까지 확대할 것을 여러 차례 주장하고 건의해온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를 유엔군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같은 시기 중국군의 전술도 남한 전 지역의 적화라는 참전 초기의 목적을 포기하고, 진지전을 구사하면서 점령한 지역을 지키려는 진지전, 국지전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지속됨으로써 사상자가 늘어나고, 전쟁 지속에 필요한 병력의 충원과 군수물자의 확보가 어렵게 된 것은 소련이 아니라 전쟁수행 당사자인 중국과 북한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오쩌둥과 김일성은 휴전을 원했다.
하지만 휴전은 오랫동안 지연됐다. 막후에서 전쟁을 지원하고 사주하면서 지속시키려고 한 스탈린의 의향이 영향을 미친 데다 포로교환문제 등 피아 쌍방 간 휴전조건이 서로 달라 휴전회담이 여러 차례 결렬됐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갑자기 사망하고, 6․25전쟁의 휴전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새로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됨에 따라 회담은 급진전돼 그 해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중국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6․25전쟁에서 중국군은 총 40만 860명이 전사했고, 2만 1,000여명이 포로가 됐다. 이 밖에 민간인 신분으로 전투에 동원된 비전투원 노무자 약 77만 명이 전사했다. 휴전협정이 성립될 당시 북한에 주둔한 중국군은 총 17개 군단과 1개 사단 및 각종 병과부대 병력 약 120만 명이었다. 중국군은 1954년 9월부터 순차적으로 주둔지인 북한을 떠나 중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전 병력이 철군을 완료한 것은 1958년이었다.
2014.
삼각지에서
동북아역사재단 역사사전에 들어갈 원고로 요청 받아 쓰다.
雲靜
【참고문헌】
서상문 저, 『毛澤東과 6․25전쟁 : 파병결정과정과 개입동기』(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6년)
서상문 외 4인 공저, 『6․25전쟁사』, 제7권(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0년)
서상문, 「새로운 사실, 새로운 관점 : 毛澤東의 6․25전쟁 동의과정과 동의의 의미 재검토」(『軍史』, 제71호,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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