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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초청 강연 : 한국전쟁과 김일성의 권력투쟁

雲靜, 仰天 2019. 10. 8. 21:30

대만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초청 강연 : 한국전쟁과 김일성의 권력투쟁

(★중국어로 강연한 내용을 한글로 정리한 것임)

 문제 제기

한국전쟁 발발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약 44년간 김일성이 단 한 번도 남에게 뼈았기지 않았던 당권, 정권, 군권을 장악한 1인독재 지배체제의 구축은 한국전쟁 시기에 그가 벌인 정적에 대한 수차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성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학계에서는 지금까지 한국전쟁이 한반도(남북한 관계 및 남한사회와 북한 사회)수준, 동아시아(중국 대만 일본 등)수준, 세계적(미국과 소련 및 미소냉전) 수준의 세 層次에 多大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대해서는 큰 그림이 나와 있지만 이 전쟁과정에서 김일성이 일으킨 권력투쟁에 대해선 이렇다 할만한 자세한 연구는 미흡하다.
 

韓戰與金日成的權力鬪爭

目次

Ⅰ. 前言
Ⅱ. 광복 후 김일성의 부상과 연합세력의 남침전쟁 도발
Ⅲ. 제1차 권력투쟁 : 남침실패 책임공방
Ⅳ. 제2차 권력투쟁 : 소련파 및 연안파와의 격돌
Ⅴ. 제3차 권력투쟁 : 남로당파의 반격과 김일성의 대응
Ⅵ. 맺음말


Ⅰ. 前言  : 본 주제의 硏究史的 意義와 問題提起

1. 한국전쟁의 발발원인, 배경 과정, 결과 및 영향은 큰 구도가 밝혀졌음(한반도, 동아시아, 세계의 3層次)
2. 그러나 김일성의 권력투쟁을 단일 주제로 한 연구 未洽
3. 김일성의 全生涯는 항일운동, 공산주의혁명 참여, 한국 전쟁도발, 권력투쟁, 대남 침략의 역사가 전부임
4. 김일성은 평생 4차례의 권력투쟁 주도
①1950. 11~12(延安派의 武亭 제거)
②1951. 9~11(蘇聯派 許可而와 연안파 朴一禹 제거)
③1953. 3~53. 8(南勞黨 李承燁, 朴憲永 제거)
④1956. 8~60末(「8月宗派투쟁」과 소련파 및 연안파 붕괴)▶ 1인독재지배체제 구축
5. 1950. 6~53. 7 한국전쟁 시기 권력투쟁 세 차례(①②④)발생▶김일성의 권력투쟁은 한국전쟁과 밀접한 관련 있음
6. 한국전쟁 시기 김일성의 권력투쟁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배경, 과정, 결과 및 영향
7. 김일성은 평생 단 한번도 권력을 빼았겨본 적 없음▶김일성 「빨치산파(滿洲派)」까지 제거

Ⅱ. 광복 후 김일성의 부상과 연합세력의 남침전쟁 도발

1. 일제 패망 전 김일성의 生涯
①本名 金成柱
②1912. 4. 15~ 1994. 7. 8
③北韓 平安南道 大同郡 高平面(現 平壤市 萬景臺)
④父金亨稷과 母康盤石 사이의 장남
⑤敎育 : 彰德學校(小學), 1926년 부모를 따라 滿洲로 건너가 吉林의 毓文중학에 입학, 중퇴
⑥북한 측 주장▶ 반제청년동맹·공산주의청년동맹 조직, 1929년 만주지구 공산주의청년동맹 서기로 활동, 同年 10월 일본관헌에 체포되어 吉林감옥에서 6개월간 복역. 1932년 4월 항일유격대, 長白산맥과 송화강 유역에서 항일무장투쟁 전개, 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하의 동북항일연군의 제1로 2군의 지휘간부로 활동
⑦1937. 6. 4 咸境南道 甲山郡 惠山鎭 普天堡전투 주도
⑧1940 소련沿海州 하바로프스크로 이동▶소련군 입대해 특무공작훈련 받고 소련군 대위로 소련극동군 제88國際旅團 배속돼 5년간 복무
⑨일제 패망 후 1945. 9. 19 元山港을 거쳐 平壤 入城

2. 광복 후 김일성의 부상 배경
 
①항일 독립투사로서의 명성
-전설적 인물"김일성 장군"
-誇張된 普天堡전투의 戰果
②소련군부(극동군)의 지도와 지원
-소련극동군 지도부(로마넹코, 치스차코프, 메데네프)의 보호하에 입국
-"소련이 가장 신뢰하는 장래의 북한지도자 후보"
-소련군부의 통일전선▶북한 내 민족주의세력의 포섭 혹은 고립▶조선민주당(당원 30만 명) 당수로서 민족지도자 曺滿植(남한 김구, 북한 조만식)
-김일성을 대중정치인으로 부각 기획▶소련군정당국의 기획하에 조만식의 협조로 1945. 10. 14 평양 평양시민 군중(7만명) 환영대회에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
 

소련군사고문단과 김일성. 소련군사고문단은 김일성이 북한 정권 내에서 권력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비호, 후원 세력이 돼 줬다.


*(당시 바싹 여윈 김일성의 모습 사진)

-쉬티코프(後日 초대 북한 주재 소련대사), 이그나티예프 대령(김일성 정치고문)의 지도와 보호하에 사회주의 정책(토지개혁, 노동법, 기업국유화, 남녀평등법 등등) 시행 주도
③「빨치산파」(약 200명)의 무력장악▶경비대(북한인민군 前身), 북조선인민위원회 보안국(崔庸健), 中央保安幹部學校(安吉), 평양학원(金策)1948. 2. 8 북한군 정식 창설시 조선인민군 총사령관(康健), 북조선 단독 정부 수립시 民族保衛部(相, 崔庸健, 副相 金一), 인민군 제 1사단장(崔光), 제2사단장(崔賢), 제 3사단장(金光俠), 총 2만 명에 달하는 정규경찰, 사상경찰, 비밀경찰 계통(池京洙, 石山)
④김일성 북한정부 수장, 1948. 9. 9 단독정부수립시 빨치산(김책, 최용건, 鄭俊澤 각각 부수상 겸 産業相, 民族保衛相, 국가계획위원 장)+소련파(許可而)+연안파(소수) 민족주의계열(洪命熹, 李克魯, 白南雲, 李鏞)+남로당 (박헌영 부수상 겸 外相, ) 연합▶ 소위 "1949년 6월 질서" 형성
⑤김일성, 국내 공산주의운동 주도권 장악▶남로당의 박헌영과 경쟁(1946. 4 조선공산당 북조선 分局▶ 북조선공산당 자칭▶박헌영 월북, 1949. 6 남북로당 합당▶ 조선노동당에서 다수파 연합(당위원장만 김일성, 당 부위원장, 비서, 정치위원, 조직위원 등 총 20여명 중 김일성파는 정치위원 金策 뿐, 나머지는 모두 소련파 허가이와 이승엽, 金三龍 등의 남로당 인물)

3. 김일성, 박헌영의 남침전쟁준비 주도와 다수파 공동 남침참여
 
①김일성, 박헌영의 남침전쟁준비 주도와 誤判
-김일성, 박헌영의 비밀 南侵開戰준비(스탈린, 모택동 방문)
-김일성의 승리과신(미군 미참전확신, 단기전 승리 자신▶1950. 8. 15 광복절에 남한해방기념식 서울에서 개최
-박헌영 : “남한민중 20만명 호응 무장봉기‘
-두 사람 : 전쟁수행능력, 전쟁지속능력 미고려, 미국의 군사개입 오판▶단기전 승리가능 과신
②민족주의 세력을 제외 빨치산파+남로당파+소련파+ 연안파 연합 전쟁개시
③“해방공간”-한국전쟁 직전 북한의 주요 정치세력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 다수 남하, 와해 상태에서 조만식 1950년 10월 처형됨
-빨치산파 : 김일성, 崔庸健, 金策, 金一, 金日, 林春秋, 崔光, 金光俠 등등 약 200여명
-남로당파 : 박헌영, 李承燁, 金三龍, 李舟河, 李弼圭, 柳丑運, 吳基燮 등등 남북한에 서 활동
-소련파 : 許可而, 張時雨, 朴勝元(音譯), 金應彬, 趙一明, 李强國, 林和, 裴哲, 尹順達, 宋乙秀, 尹公欽, 徐煇, 朴昌玉, 崔鍾學, 孟鐘鎬, 金在旭 등등 수백명
-延安派 : 金枓奉, 金元鳳, 武亭, 朴一禹, 方虎山, 金漢中, 崔昌益 등등 수백명
-1956년 8월 종파사건 때 김일성의 체포를 피해 중국과 소련으로 망명한 연안파와 소련파가 총 1,000여 명
 

연안파의 주요 인물 최창익

4. 김일성, 박헌영의 남침전쟁준비 주도와 다수파 공동 남침참여
 
①김일성, 박헌영의 남침전쟁준비 주도와 誤判
-김일성, 박헌영의 비밀 南侵開戰준비(스탈린, 모택동 방문)
-김일성의 승리과신(미군 미참전확신, 단기전 승리 자신▶1950. 8. 15 광복절에 남한해방기념식 서울에서 개최
-박헌영 : “남한민중 20만명 호흥 무장봉기”
-두 사람 : 전쟁수행능력, 전쟁지속능력 미고려, 미국의 군사개입 오판▶단기전 승리가능 과신
②민족주의 세력을 제외 빨치산파+남로당파+소련파+ 연안파 연합 전쟁개시
③“해방공간”-한국전쟁 직전 북한의 주요 정치세력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 다수 남하, 와해 상태에서 조만식 1950년 10월 처형됨
-빨치산파 : 김일성, 崔庸健, 金策, 金一, 金日, 林春秋, 崔光, 金光俠, 金翊善, 李松雲 등등 약 200여명
-남로당파 : 박헌영, 李承燁, 金三龍, 李舟河, 李弼圭, 柳丑運, 吳基燮, 許成澤, 朴光熙 등등 남북한에서 활동

Ⅲ. 제1차 권력투쟁 : 남침 실패 책임공방

1. 시기와 배경
 
①시기 : 1950. 11~12
②배경
-북한군의 괴멸과 유엔군의 북진개시
-평양 함락(1950. 10. 19)
-중공군 파병(1950. 10. 19)
-중공군의 제1차 전역과 유엔군의 북진 중단
-조중연합사령부 결성 전후
 
2. 원인
 
①소련, 중국의 파병지원 요청여부의 충돌
②스탈린의 파병거절과 모택동의 파병
③조중연합사령부 수립여부의 견해 상이
④김일성의 조중군사통합지휘권 희망 무산 및 소외
⑤군사노선상의 대립 : 정규전(팽덕회, 박헌영, 무정) vs 게릴라전(김일성)
⑥북한지도부내 남침실패의 책임론 대두
⑦북한지도부, 중국망명 직전의 위기상황에 처함
⑧김일성의 당내 권위 실추

3. 경과
 
①10월혁명 제33주년 기념일(950. 11. 7) 滿浦의 소련대사관에서 열린 연회에서 김일성-박헌영 격렬한 책임공방 舌戰
②김일성, 박헌영에게 "20만 빨치산 봉기 주장"비난
③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1950. 12. 21, 전시"수도" 江界)에서 總和時 재충돌
④김일성, 계파를 막론하고 모든 군 지도자들과 전선 사령관들에게 전쟁불리 책임을 물음▶자신 제외하고 자신의 부하들에게도 엄격하게 철칙▶김일, 최광, 김춘추(빨치산파), 무정, 김한중(연안파), 허성택, 박광희(남로당파)
⑤불공평을 이유로 타파가 반발할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임
⑥무정에게 군사적 과오 책임 물음: 제2군단자 후퇴시 책임 없이 瀋陽으로 도피▶후방의 제7군단장으로 좌천▶군의관 총살
⑦김일성, 무정을 재기불능케 한 것은 팽덕회와의 관계 끊으려고 한 의도였음
⑧중국 팔로군 포병사령관 역임한 무정의 권위 추락한 무정은 1952. 12 病死

4. 결과
 
①김일성, 최대 정치위기를 자신의 당내 입지와 권력 공고화의 기회로 활용함
②남침실패의 공동책임을 박헌영에게만 떠넘김
③박헌영 건재, 남로당파는 타격 크지 않음▶원래 군부엔 자파 인물 많지 않았기 때문
④그 대신 무정이 제거▶ 친중파 구심점 약화
⑤군사 전략상의 상이에서 김일성의 승리▶게릴라전 계속 수행
 
Ⅳ. 제2차 권력투쟁 : 소련파 및 연안파와의 격돌
 
1. 시기와 배경
 
①시기 : 1951. 9~51. 11
②배경
-유엔군의 북진
-1951년 9월 1일 당 중앙조직위원
-1951년 11월 제4차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2. 원인
①소련파 좌장격인 허가이의 김일성 지시 미이행
②허가이와 김일성 사이의 갈등
③1951년 60만 노동당원 중 45만 명 출당처분
④김일성의 완화지시 미이행
⑤김일성의 연안파 거두 박일우 견제
 

3. 경과
전쟁을 통해 이제 조선노동당은 과거의 파벌연합에서 벗어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51년 11월에 열린 제4차 당 중앙위 전원회의는 이런 사실을 더욱 여실히 보여주었다.
 
1950년 12월 7일 경 성립된 조중연합사령부에 군사작전과 전선의 전쟁지도 활동을 모두 넘겼다. 이 때문에 자연스레 김일성은 그동안 힘을 쏟지 못했던 당과 정치를 추스를 수가 있었다. 김일성은 1951년 초부터 당 사업에 관여하기 시작함에 따라 1948년 9월 남북노동당의 통합 이래 사실상 당 조직을 관장하면서 당무를 전담해온 허가이와 당내 조직 문제를 둘러싸고 김일성과 충돌하는 갈등을 낳았다. 갈등은 유엔군의 반격으로 퇴각할 때 행한 당원들의 행동에 지나치게 엄벌주의를 적용한 것이 발단이 됐다. 1950년 9~11월 유엔군의 북진에 밀려 후퇴하는 다급한 상황에서 많은 노동당원들이 당증을 몸에 지니지 못하고 당원증을 없애거나 땅에 묻어버리자 당증을 버린 당원들에 대한 처리문제에서 불이 붙었다. 실무적이고 소련식의 엄격한 당규율을 중시한 허가이는 당증을 버린 당원들에 대해 예외 없는 책벌을 조치해 수십만의 당원들이 출당시켜버렸다.
 
허가이는 레닌 시기 소련공산당을 모방해 직업투사가 핵심이 되는 “엘리트 당”으로 재조직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노동당의 창당 원칙에 어긋나고, 김일성의 명령도 무시한 것이어서 김일성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유엔군과 한국군의 북진공격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병력충원이 시급한 상황임에도 허가이는 현실을 무시하고 원칙만 지키려고 고집한 것이었다. 문제가 된 것은 관문주의적 경향이었다. 전쟁 중에 핵심 정예당원들이 많이 사망했기 때문에 새로운 당원들을 충원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당 정비 관계자들은 노동자 성분비율이나 정치의식 수준만을 따져 입당 희망자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당이 전반적으로 관료주의와 형식주의에 젖어들었다.
 
이를 문제시한 김일성은 보고에서 “우리 당의 대중적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며, 당의 역사가 청소(靑少)하고 당원들의 정치사상적 수준이 어린 실정을 고려하지도 않고, 또한 오랜 일제치하에서 남은 사상잔재와 국내투쟁의 복잡한 조건과 환경을 고려함이 없이, 당원들을 마치 완성된 맑스-레닌주의자로 간주하고 수준에 넘치는 요구를 제기하는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관문주의와 책벌주의를 비판했다. 그것은 당 조직을 책임지고 있던 허가이를 겨냥한 비판이었다.
 
김일성은 1951년 9월 1일 당 중앙조직위원회를 열어 가혹한 책벌을 완화하라고 지시했으나 그 지시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김일성은 1951년 11월 당 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에서도 재차 이 문제를 거론하고 허가이를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김일성은 또 허가이에게 노동당원의 노동자 구성비율이 떨어질 것을 염려해 입당을 원하는 많은 농민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허가이가 지도하는 조직위원회는 전시의 위급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처벌위주로 일관했다. 전쟁이 38도선 일대에서 공방전이 전개되자 허가이는 노동당원 전체에 대해 충성심을 조사해 1951년 한 해에만 60만 당원 중 45만 명이 출당처분을 받았을 정도로 이 문제는 심각했다.
 
김일성은 책임을 물어 허가이를 당 제1비서 자리에서 해임시키고, 대신 박정애를 당 비서 겸 정치위원으로 선출했다. 당 제1비서직에서 해임된 허가이는 정부의 농업담당 부수상으로 좌천됐다. 김일성은 허가이를 지방으로 전출을 보냄과 동시에 허가이가 쫓아낸 당원들을 1952년에 모두 재입당시켜 당이 100만 명의 거대 당으로 커졌다. 그 동안 소련의 후원에 힘입어 소련에서 나온 한인들(즉 소련파)을 대표로서 당내 조직 문제를 맡아 조선노동당을 장악해온 허가이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1953년 7월 미군 폭격으로 무너진 순안저수지 복구사업을 현장 지휘하라는 김일성의 지시를 받았지만 그에 불복하고 분노와 모멸감을 못 이겨 자살하고 말았다. 자살 후 허가이는 “반당종파분자, 변절자, 혁명의 배신자”로 사후 공개비판을 받았다. 허가이의 숙청은 당의 3대 세력 중 하나인 소련파의 몰락을 예고한 것으로 조선노동당 내의 파벌균형, ‘1949년 6월 질서’ 해체의 신호탄이었다.
 
한편, 김일성은 허가이를 당에서 축출하는 공작을 진행하면서 연안파의 주요 지도자인 박일우에 대해서도 견제하기 시작했다. 박일우는 중공군이 북한에 들어온 이래 팽덕회와 김일성, 혹은 중국군과 북한군 사이를 연결하는 창구역할을 담당하면서 중공군 측의 돈독한 신의와 후원을 받고 있던 것이 김일성으로서는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잠재적인 정적이었다. 더군다나 중조연합사령부가 수립됐을 때 김일성은 제외됐지만 박일우는 팽덕회에 이은 중조연합사령부의 부사령관직을 맡고 있었다.
 
김일성이 박일우를 제거하려고 한 동기는 아마도 그가 중조연합사령부 수립을 위한 중국측과의 논의과정에서 팽덕회와 의견이 맞지 않아서 자신이 바랐던 중공군에 대한 군사지휘권을 가져오지 못하고 오히려 군사지휘권과 관련해 배제된 데에 대한 감정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김일성은 전쟁 기간 중 박일우에 대해 줄곧 북한에 친중국 정치세력을 심으려 한다는 비판을 가했다.
 
4. 결과
1951년 3월 6일 김일성은 사회안전성을 별도로 설치해 그동안 내무성의 핵심업무였던 ‘사회안전과 질서보장’ 업무를 담당케 함으로써 내무상 박일우의 내정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10월 6일에 박일우를 내무상에서 파면함과 동시에 사회안전성이 다시 내무성에 편입시켰다. 이는 김일성이 오로지 박일우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사실이다. 박일우는 1955년 12월 반당종파행위 혐의로 당에서 축출됐다.

 
Ⅴ. 제3차 권력투쟁 : 남로당파의 반격과 김일성의 대응

1. 시기와 배경
 
①시기 : 1952. 12~53. 8
②배경
-박헌영 건재,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존재
-스탈린 사망(1953. 3), 쉬티코프는 귀국, 김일성 고문 이그나티에프 대좌는 미군의 평양폭격시 사망

2. 원인
 
①김일성의 박헌영 除去 및 남로당 瓦解 의도
②제5차 당 中央委員會全員會議(1952. 12. 15)에서 김일성, 패전 책임 재거론▶남로당 암시해서 "자유주의적 경향과 종파주의 잔재들과의 투쟁" 선언
③제5차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문헌 토의사업 전당적 전개▶ 박헌영과 남로당파 잔여세력의 축출 의도
④무정, 허가이, 박일우 제거 후 비빨치산파의 위기의식
⑤李承燁 주도의 김일성 제거 음모

3. 경과
 
①제5차 당 中央委員會全員會議(1952. 12. 15)의 문헌토의 사업 전개▶
②1951 말~52 초, 李承燁, 李康國, 林和의 상황판단▶전쟁 지지부진 끌날 것▶김일성 제거 후 조선노동당을 대신할 조선공산당 창당
③이승엽, 박헌영(無告知)을 수뇌로 한 새정부의 組閣 人選 作成
④1952. 11까지 약 4000명의 지하공작원 확보▶ 이들을 평양에 보내 김일성과 그 일당을 축출할 계획
⑤1953. 3, 이승엽 일당들은 군대를 동원해 평양 진격▶3. 5, 이승엽 등 주모자 12명이 빨치산파에게 체포됨
⑥3. 11, 박헌영도 체포됨▶죄명 :反國家 反革命 간첩죄
⑦1953. 8.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재판회부 결정▶ 8.3~6(4일간) 이승엽 등 12명 재판받고 2명만 12년 , 15년 징역형, 이승엽 등 나머지 10명 모두 사형 언도됨
⑧박헌영만 기소가 미뤄져 1955년 12월 5일에 정식으로 기소▶중국과 소련 異意제기
⑨1956년 7월 19일 박헌영 총살당함(57세)

4. 결과
 
①남로당파 완전와해▶이승엽, 박헌영 등 지도급 인물 총살로 재기불능
②김일성, 중국과 소련의 간섭배제
③소련파와 연안파 세력은 존재▶이들의 위기의식 고조▶ 연합해 김일성 제거를 재시도 한 “8월 종파투쟁”(1956. 8)의 원인이 됨
④김일성, 당원들에게 북한의 독자성 강조▶소련과 중국에 대한 자주의식 고취▶김일성의 이른바 “主體思想”의 기원
 
-끝-
 
2019. 10. 8. 10:00~12:00
臺灣 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세미나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