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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주먹사 소개 : 프롤로그

雲靜, 仰天 2019. 6. 7. 10:08

한국 주먹사 소개 : 프롤로그

 

우리세대가 어렸을 때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을 자주 들으며 자랐다. 혈기 왕성하던 10~20대 시절, 한국의 내로라하는 주먹들이 멋져 보이던 시절도 있었다. 1970년대 중반 들어 급부상한 양아치류의 조양은이나 김태촌이 아니라 김두한이나 협객풍의 시라소니(본명 이성순) 같은 인물들 말이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시절, 나는 일제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김두한과 시라소니를 좋게 봤는데, 그건 비단 나 혼자만 그랬던 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연히 일찍부터 한국의 주먹사에 관심을 가지고 섭렵하게 됐다.
 

학창 시절, 초중고를 거치면서 여러 종류(야구, 씨름, 수영, 육상)의 선수를 지낸 일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태권도, 권투 등을 정말 열심히 해서 작은 규모였지만 대회에 출전해서 챔피언을 먹은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옛날 여러 가지 운동과 단련으로 수십년 간 남아 있던 장단지와 주먹에 박힌 굳은 근육이 어느덧 완전히 다 빠지고 이젠 기름치만 올라붙었다. 그래도 아직도 1당 100은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속에 살고 있다. 다 마음 뿐이다. 한창 때는 '역발산 기개세'였는데, 다 흘러간 옛일이다. 아 옛날이여~

 

한국사회에 조직폭력패가 생겨난 것은 구한말 조선에 진출한 일본과 중국 상인들이 상권장악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던 시대에 기원을 둘 수 있겠다. 대략 개항장이 서기 시작한 1870년대 중반에서 시작해 동학난이 일어나는 1890년대에 이르는 시기였다. 이 시기 영세했지만 조선 상인들도 외상들의 상권점탈에 대항하면서 상업 발달과 함께 이권과 자본이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땅에서 주먹들이 등장한 때도 대략 이 언저리 때부터였다. 옛부터 상업이 발달한 중국이나 이탈리아 보다는 출발이 한참 늦은 것이었고, 일본보다는 조금 늦은 것이었다. 이 시기의 건달들은 그 이전 조선사회에 상것들이 주막이나 객주점에 기생하면서 못된 양반들을 주먹으로 혼내주던 소수의 패거리들이 있었지만 조직이 형성되지 않았던 "왈짜"("왈패"라고도 함)와는 달랐다.
 
한국의 주먹사를 일별해보면, 무기는 일체 들지 않고 오직 맨주먹으로 1대 1로 실력을 겨루던 이른바 낭만파 주먹시대는 광복 직후 얼마까지는 지속됐다. 그때까지는 ‘후이우찌’(不意打ち=기습) 같은 것도 비겁하다는 생각에 하질 않았다. 당시 서울의 주먹세계는 정말 낭만적 분위기였다. 오늘 날처럼 칼을 쓰거나 기습하는 일이 적었다. 1930년대 김두한이 종로 우미관(현재의 관철동 89번지) 일대에서 구마적과 신마적 그리고 경성 주재 일본 경찰의 경부로서 유도의 고단자 마루오까(丸岡)와 차례로 맞붙었을 때 모두 아무 것도 들지 않고 1대 1로 승부를 겨루었듯이 말이다. 사람들 앞에서 사나이답게 1대 1로 붙어서 이기면 형님, 동생 하는 식이었다. 맞짱을 제일 잘 뜨는 자가 두목으로 자연스레 추대되던 시절이었다.
 
이처럼 해방 전엔 건달들이 싸움을 신사적으로 치른 것이 전통 아닌 전통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주먹들 중엔 차력사나 운동선수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깡패들이 싸울 때 일본도 사용이 용납됐던 야쿠자들과는 달랐다. 우리가 무기로 싸우는 '쪽바리'들을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의식도 한몫 했을 것이다. 그런 호걸풍의 주먹으로는 김두한 혼자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 말고도 만주에서 활약하다가 건너온 ‘시라소니’ 이성순은 물론이고, 씨름꾼 출신의 ‘상하이 독수리’ 장천용, 박차기의 명수 ‘호랑이’ 이상대, 연희 전문 출신의 유도사범 김후옥, 일본 메이지(明治)대학 상과 출신의 박주용도 있었다.
 

본명인 이성순 보다 시라소니로 더 많이 알려진 당대 최고의 주먹. 그는 젊은 시절 만주 봉천 등지에서 중국의 주먹들 사이에도 명성을 떨쳤다는 일화들이 있다. 인생 후반에는 기독교 목사로 변신해서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지난 세기 주먹의 대명사로 불렸던 김두한은 당시 주먹들이 권투나 유도선수 출신이었던 것과 달리 YMCA 권투부 출신 정진용과 함께 어릴 적 수표교 아래에서 같이 지내면서 시멘트로 만든 역기와 철봉틀로 몸을 단련하고 맞짱을 뜨면서 실전으로 싸움 기술을 익힌 실전형 싸움꾼이었다. 김두한이 당시 "잇뽕"(一本, 유도나 검술에서 단 한 번의 기술이나 주먹으로 이기는 것을 말함)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도 중고등학교 시절 싸움을 많이 해봐서 조금 아는데 사실 실전에선 태권도니 뭐니 해도 맞짱 기술이 제일 세다. 나도 조금 아는 편인데 싸움 기술엔 여러 가지가 있다.
 
김두한은 조선인들이 많이 찾은 영화관이 있고, 그 골목 안에는 부경루, 태왕루 따위의 큰 식당이 많이 모여 있던 종로 우미관 뒷골목 같은 유흥가나 상가주변을 배회하면서 완력으로 호구를 해결했다. 그런 그가 ‘협객’ 또는 ‘항일주먹’으로 불리게 된 계기가 되었던 건 청계천 북쪽의 북촌마을까지 세를 확장하려 한 혼마찌(本町)의 일본 깡패들과의 소위 ‘나와바리 싸움’에서 이겨서 조선인들의 울분과 서러움을 풀어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김두한 뿐만 아니라 당시 주먹들이 일본 조폭들에 대항했다고 해서 스스로 "협객"으로 자처했다고 후대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미화했는데 이것은 너무 부풀려진 것으로 보인다. 2~30년 전, 일제시대 주먹들을 일제에 저항한 ‘항일주먹’이어서 "협객"이라 불렸다고 미화하던 영화와 드라마가 유행한 바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완력과 패거리로 영세 상인들을 갈취한 생계형 깡패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장삿꾼들에게 하루 삥 뜯어 하루를 먹고 살던 그들에게 무슨 식민지배에 대한 항일의식, 민족의식이 있었겠는가? 같은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중국의 杜月苼 같은 애국 주먹이 우리 주먹계에도 있었다는 소린가? 답은 다소 회의적이다.
 

한창 주먹을 쓰던 시절의 김두한
국회의원 시절의 김두한 모습. 군사혁명 정부의 새로운 실력자 박정희와 손을 잡고 있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도 여전히 방송에서나 언론에서 김두한만 여러 번 각색해서 울궈먹는 데에는 우리 사회의 강한 ‘저항 민족주의’가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있지만, 김두한을 백야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저항민족의 상징으로 재현시킬 수 있는 혈통적, 소설적 요소로 각색시켜 흥행을 일으킬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건 김두한과 그의 딸 등 당사자들만의 구두 주장일뿐 여타 족보나 문서상의 근거는 없다.
 
아무튼 한국전쟁 후 정통성이 결여된 자유당 정권이 바뀌지 않고 정치권에서 폭력조직의 힘을 빌리기 시작하면서 낭만주먹의 시대는 종지부를 찍고 무기를 들거나 한 사람을 “태우기”(당시 주먹들 사이에 ‘죽인다’는 의미로 쓰이던 은어) 위해 여럿이서 조직적으로 린치를 가하는 시대가 시작됐다. 주먹과 권력이 본격적으로 손을 잡는 이른바 ‘정치깡패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사실, 정치깡패의 역사는 이보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1954년, 시라소니, 이정재와 함께 조선의 3대 주먹 김두한의 정계입문과 함께 급부상한 이천의 이름난 씨름꾼 출신 이정재가 동대문시장상인연합회 이사장이 되면서 막강한 자금과 조직력을 앞세워 자유당 내 이승만 다음 가는 제2인자 이기붕에게 접근해서 정치권과 손을 잡은 것이 정치주먹시대의 시작이었다.
 
이정재란 인물은 말이 나온 김에 그에 대해선 김두한 만큼 비중을 두고 소개할 필요가 있는 주먹이다. 1917년 경기도 이천군의 호법면 유산리 출생의 이정재는 집안 내력을 보면 건달이 될 인물이 아니었다. 부친은 이천에서만 13대를 살아온, 만석꾼은 아니지만 천석꾼 정도의 부농 집안이었다. 그가 일찍부터 서울로 보내져 고등교육을 받게 된 것도 집안이 먹고 살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중동고보를 다니다가 2학년 때 휘문고보로 전학을 갔다.
 
이정재는 태어날 때부터 힘이 장사였던 모양이다. 벌써 고등학생 때 교복 입은 채로 고향에 내려가서 씨름판을 휩쓸었다고 하니 말이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씨름꾼, 장사들이 고등학생인 이정재에게 맥없이 나가 떨어졌다. 예전 씨름판에 어린 나이로 혜성 같이 나타나 그때까지 천하장사였던 이만기를 내치면서 기염을 토한 강호동을 연상시킨다. 이정재는 그런 발군의 실력으로 이천을 넘어 전국 씨름대회에서 3연패를 했고, 그것이 배경이 돼 훗날 마흔 살의 젊은 나이에 대한씨름협회 제7대 회장(1957년~1959년)이라는 감투까지 썼다. 그가 씨름판에서 우승해서 탄 소는 100마리가 넘었다는 조금 부풀린 듯한 설도 나돌고 있다.
 

당시 조선 최고의 씨름꾼으로 이름을 날린 이정재. 그는 자신이 조직한 동대문사단 내 7형제중 첫째 오야붕이었다. 그는 자유당 시절 權拳유착으로 호사를 누리다가 1961년 10월 19일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정권의 정치깡패 소탕에 걸려 서대문형무소에서 향년 44세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휘문고보를 졸업한 이정재는 고향 이천으로 내려가서 한동안은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워낙 놀기 좋아하는 성격 탓에 농사일이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결혼은 25세에 했는데 그의 처남이 뒤에 부장판사가 된 걸 보면 처가도 꽤 괜찮은 집안이었던 것 같다. 이천이라는 시골구석에서 그냥 농사꾼으로 썩고 말기엔 배운 것도 적지 않았고 무엇보다 서울생활을 맛본 이정재의 가슴에 이글거린 열정이 너무 뜨거웠다.

그러던 중 계기가 찾아왔다. 그의 운명을 가른 것은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와 형의 죽음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사망하자 그들의 장례식을 치른 후 이정재는 집안 가산을 정리하고 상경했다. 
 
서울로 올라온 이정재는 동대문 시장 근처에서 처가살이를 하면서 처음엔 작은 점포를 하나 얻어 ‘삼양상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광목장사를 시작했다. 이때가 해방되기 불과 몇 년 전이었다. 장사는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장사도 시원찮았는데 동대문 시장의 건달들에게 번번이 자릿세 명목으로 돈까지 뜯기곤 했다. 그는 깡패도 아니고 그땐 동대문에 자기 세력도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돈을 뜯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둔 중 하루는 장사가 잘 안 돼 화가 잔뜩 나 있는데 돈을 뜯으러 온 건달들 중 일행 중 두목급으로 보인 한 놈을 번쩍 들어 냅다 집어 던져버렸다. 씨름으로 단련된 엄청난 괴력이 폭발된 것이다. 그게 순식간에 입소문이 퍼졌다. “워매, 저 광목장수 힘이 장사야! 장사!”
 
이 일이 이정재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가 주먹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고 하는데 여기엔 두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그가 돈을 뜯으러온 깡패를 집어던진 것이 계기가 돼 김두한의 부하로 주먹 세계에 입문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이 일을 계기로 조직을 결성했다는 설이다. 전자는 김두한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아뭏든 이정재의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주먹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정재 아래엔 기라성 같은 주먹들이 많았던 건 사실인 듯 하다. 이정재 아래 조직의 제2인자였던 조열승, 제3인자였던 임화수도 이정재를 오야붕으로 한 이 조직내 "7인의 형제"들 중의 한 사람들이었다. 시라소니 린치 사건 때 돌격대장으로 앞장 선 낙화유수(김태련)도 빼놓을 수 없는 주먹이었다.
 
조열승은 별명이 “통뼈”였을 정도로 강펀치를 지닌 대단한 싸움꾼이었다는 소문이 있다. 이 소문은 사실인 듯하다. 그는 일곱살 때 경북 김천에서 맨손으로 상경해서 동대문시장에서 자리를 잡은 뒤 시장의 지게꾼부대 대장 노릇을 했다. 지금과 달리 당시는 시장에서 물건을 나르는 수단이라곤 지게와 리어카가 전부였다. 나도 어릴 때 집안 모친을 도와 시장에서 리어카로 화물을 운반하거나 물건을 배달해줘봐서 그 분위기를 익히 알고 있다. 그보다 한 세대 앞선 시대엔 화물이나 짐 운반엔 지게가 대세였다. 만약 지게꾼들이 물건 배달을 하지 않겠다고 뻣대면 장사가 제대로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자연히 지게꾼들의 위세는 대단해서 동대문 시장 전체 상권을 좌지우지 할 정도였다. 조열승은 이런 거친 지게꾼들 사이에서 잔뼈가 굵은 몸이었다.
 
반면, 동대문 사단의 서열 3위 임화수는 주먹은 아니었고 영화업에 종사한 약싹 빠른 사업가로 알려져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 역시 싸움이라면 한 싸움 한 주먹이었다. 이정재의 고향 경기도 이천의 옆 고을 여주에서 태어난 그는 그 시절엔 1921년생으로 알려졌었지만 실제는 1924년생이었다. 성과 이름이 처음부터 "임화수"는 아니었다. 아버지가 죽고 모친이 재가하자 의붓아버지의 성씨를 따라 권중각에서 임화수로 개명한 것이다.
 
임화수는 서울로 올라와서 미나도 극장 주변에서 소매치기로 성장하면서 호리호리한 마른 체구였음에도 싸움도 잘했고 승부 근성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일대에 악바리 독종이라고 소문이 났다. 극장 단성사의 사장이 되기 전에 그는 이미 자신의 주먹 패거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과거 종로의 주먹황제 김두한을 깎듯이 오야붕으로 모셨을 만큼 촉도 대단히 밝았다.
 

동대문사단의 7형제 중 제3인자 임화수. 그는 싸움은 별로였다는 소문이 있지만 실제로는 싸움도 잘했다고 한다.

임화수는 무엇보다 한국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해방 전 그는 한국영화계의 황제로 군림했다. 돈과 힘으로 영화판을 움직인 큰 손이었기 때문이다. 배우든, 감독이든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임화수에 대해선 나중에 별도로 소개해야 될 판이다. 당시 희극 배우로 성가를 날리던 김희갑이 임화수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단성사에 불려가서 흠씬 두들겨 맞아서 옆구리 갈비뼈가 부러진 일화를 비롯해서 말이다.
 
이정재가 단국대 법대 중퇴 출신으로 축구선수까지 지내서 날렵했던 유지광이라는 인물을 실제로 동대문사단을 움직인 책사로 영입한 걸 보면 그는 조폭조직의 세를 넓히는데 필요한 머리는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다. 1927년생이었던 유지광 역시 고향이 이천 출신으로 이정재와 동향이었다. 이정재는 부하인 유지광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그에게는 항상 존댓말을 써고 조심스럽게 대했다. 이유는 유지광의 촌수가 이정재보다 한 항렬 높았는데, 이정재의 고모부가 유지광의 형으로 사돈지간이었기 때문이다.
 
유지광은 이정재(1961년), 김두한(1972년), 시라소니(1983년) 등이 죽고 난 뒤 마지막 남은 낭만파 주먹의 대부격이었다. 1990년대 한국 주목계의 대부격으로 명동의 신상사(본명 신상현)가 있었다면 80년대에는 유지광이 있었다. 유지광은 군사정권 치하에서 정치깡패들이 소탕되었을 때 같이 검거된 이정재와 함께 사형을 선고 받았다고 나중에 감형이 돼 고향 이천으로 내려가 있었다. 1988년 11월 12일, 유지광이 죽자 일본에서 야쿠자들이 수십 명이 문상을 왔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 나는 당시 신문사에 근무할 때여서 그 기사를 읽고 공부 삼아서, 또 마침 친한 선배가 이천에서 교편을 잡고 있어서 놀러가는 김에 한번 가볼까 하다가 가지 못한 기억이 남아 있다.
 

1960년 7월 10일 특별재판정에서 심문에 임하는 유지광

김두한이 제3대 민의원이었을 때 국회의사당(지금의 광화문 서울시의회 의사당) 로비에서 이정재와 김두한이 한판 맞대결을 붙을 뻔한 일촉즉발의 긴장 상황도 있었는데 당시 바로 현장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자도 유지광이었다. 김두한과 이정재 두 사람이 서로 정치적으로 지원을 받는 당이 달랐는데, 사사건건 자유당을 비판한 야당 의원 김두한을  제압해주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정재 사단의 뒤를 봐준 이는 두 사람을 꼽을 수 있다. 당시 자유당의 제2인자로서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부통령 이기붕, 이천의 같은 고향 출신으로 청와대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를 맡은 경무관 곽영주가 그들의 뒷배였다. 유지광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펼치면 흥미진진한 게 많지만 오늘은 이쯤만 하겠다.
 
그런데 당시 국회의사당 로비에서 김두한과 이정재가 그때 맞붙었다면 빅매치가 됐을 것인데, 과연 누가 이겼을까? 그 둘의 대결에선 누가 이겼을 거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힘과 싸움기술이 일정한 수준에 올라 있으면 승부는 그날의 운과 컨디션 그리고 결투장소의 환경에 따라 결정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날 빅매치는 이뤄지지 않고 서로 노려보기만 하고선 싱겁게 끝이 났다.
 
아무튼 이정재가 이끌던 동대문사단이 걸쭉한 평안도 사투리를 쓰던 이화룡, 정팔과 신상사가 주축이 된 명동파를 기습해 명동파 전원이 구속되게 만든 사건, 그리고 1대 1 맞짱에서 국내에서 누구도 따라 갈 수 없었던, 그렇지만 조직을 거느리지 않은 독불장군형의 주먹황제로 불린 시라소니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기회를 노려 십 수 명이 덥쳐 무자비하게 무기로 린치를 가한 사건은 양아치 주먹시대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이 사건의 발단에 대해선 설이 여럿 있다. 시라소니가 평소 자주 동대문사단에 들러 이정재에게 동생 취급하면서 용돈이니, 생활비니 자꾸 얻어가니까 그걸 본 이정재 부하들이 가만 못 참겠다해서 벌인 사건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충분히 합리적인 이유가 된다.
 
그 뒤는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군사 쿠데타 세력에게 이정재, 임화수 등등의 정치깡패들이 깡그리 치죄돼 사형을 선고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거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유지광처럼 운좋게 감형돼 풀려난 이도 있었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군인들이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혁명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사회악 일소 차원에서 조직 폭력배들에 대한 전면 단속을 실시한 결과였다.
 
이처럼 동대문사단이 와해되자 한국의 주먹계는 명동파의 독주시대가 시작됐다. 물론 그 이전 옛날 수표교와 우미관 일대를 주름잡았던 김두한의 나와바리를 차고앉은 종로파의 심종현, 명동 건너편의 소공동 일대의 주먹대장 홍영철, 서대문의 오야붕 최창수, 영등포를 주 무대로 활동한 이상훈, 광화문파의 장영빈 등등 내로다 하는 주먹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주먹세계의 최고 위치를 놓고 건곤일척 한판 자웅을 겨루던 인물들은 아니었다. 영화로 치면 조연급 인물들이었다.
 
한국의 “정치 1번지”이자 과거엔 “주먹 1번지”였던 종로의 주먹판도는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해 할 이들이 있을 것 같아서 조금 소개하면 해방 이후 한국전쟁이 터졌을 시점 종로는 심종현에게 넘어가 있었다. 심종현은 자기 본명보다 “아오마스”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알려진 지역 오야붕급 주먹이었는데, 해방 후 그는 김두한의 부하로 들어가 우익 활동에 가담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한국전쟁의 와중에는 김두한 대신 종로를 접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뒤 아오마스는 김두한을 떠나 이정재의 동대문파에 가담했다가 후술하겠지만 소위 “충정로 도끼사건” 때 동대문사단을 배신하고 다시 명동파에 연루됐다가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2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된 후 종적을 감췄다.
 
이상훈은 일반인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인데, 조금 설명을 가하면 그는 자기 부친과 의형제를 맺은 당대 최고의 주먹 시라소니에게 싸움 기술을 배운 발군의 싸움꾼이었다. 유지광이 자신의 자서전『대명』에 시라소니를 “동양 최고의 주먹”이라고 해 놓은 대목이나, 괴력의 소유자 최배달(최영의)의 자서전에도 “시라소니는 천부적인 무술인이 아닌 싸움꾼”이라고 평가돼 있다. 이처럼 최고의 싸움꾼들이 인정한 싸움꾼이라는 시라소니에게서 싸움 기술을 배웠으니 이상훈의 싸움 기술은 수준급이상이었을 것이다. 이상훈은 싸움에 자신이 있었던지 자신이 시라소니와 “대결하는 것 자체가 내 자신이 건방지다고 생각한다. 아마 제가 유일하게 이길 수 없는 존재 중에 단 1명이 그 분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라고까지 한 바 있다. 이상훈은 나중에 영등포 최대의 폭력조직 대호파 두목을 지냈는데, 사시미칼을 싸움에 사용한 사시미칼의 원조로 알려져 있다.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끔씩 언론에도 인터뷰 기사가 나왔던 신상사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으면 지금도 살아 있는 그가 섭섭해 할지도 모른다. 1932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그는 실제로 육군 특무대 1등상사 출신이었는데, 최고 전성기 때는 휘하에 거느린 부하들이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 명동과 충무로, 을지로 일대를 장악한 그는 1970년대 중반까지 명실상부한 주먹 세계의 패자로 군림했던 인물이었다.
 
신상사에 대해선 이미 그의 회고록(『주먹으로 꽃을 꺾으랴』)과 여러 언론 인터뷰 기사들이 나와 있어 그의 주먹생애를 모두 다루다간 책 한 권으로도 모자를 판이다. 해서, 핵심 줄거리만 추려본다. 신상사는 전쟁이 끝난 해인 1953년 한국전쟁 막바지에 북한군과의 전투에 투입돼 부상을 입어 전역한 후 1년을 대구에서 더 머무를 시절 씨름선수 출신 박치덕과 최시헌, 대구 K2공군기지의 군무원 “갑빠”(화투 도박시 갑오의 경상도사투리일 것임)라고 불린 이 지역내 최고의 주먹들을 모두 때려눕힌 것이 서울 명동으로 진출하게 된 배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1954년 서울로 돌아온 신상사는 명동 중앙극장 옆에 자리를 잡고 양정고, 휘문고, 경복고 등 서울 명문고에서 주먹이 제일 센, 요즘말로 1진들을 휘하 조직원으로 뒀다. 이 점은 명동파가 당시 최대 라이벌이었던 동대문사단에게 늘 우위에 있게 된 배경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동대문사단의 행동대장 유지광 휘하에는 신상사파와 달리 학창시절 2진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부터 신상사파 휘하의 1진 조직원들에게 주눅이 들어 있었던 동대문사단들은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명동 세력에 밀렸다고 한다.
 
신상사는 당시 명동의 주먹 황제 이화룡을 때려잡기 위해 을지로 태양다방에서 그로 지목된 사람을 흠씬 두들겨 팼다. 그런데 맞은 이는 이화룡이 아닌 그와 닮은 전파사 사장이었다. 이를 알게 된 이화룡의 직계 부하 이영복이 50~60명의 조직원들을 이끌고 신상사의 사무실로 쳐들어가기도 하고, 신상사 역시 5~6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이영복의 집을 습격하는 등 쌍방간의 싸움이 이어졌다. 결말은 이화룡의 또 다른 직계 박일갑의 중재로 양측이 화해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세간엔 신상사가 명동 주먹황제 이화룡의 직계로 알려져 있지만 훗날 신상사 본인은 언론인터뷰에서 그의 직계가 아니고 이화룡을 형님으로 모시긴 했지만 “느슨한 연합관계”였다고 한다.
 
그 후 본인은 부정하고 있지만, 신상사는 범명동파의 행동대장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세력이 더 커져서 독자적이 됐을 때 신상사파의 부두목은 5.16쿠데타 이후 마산에서 서울로 상경해온 구달웅이었다. 신상사는 구달웅을 두목 대행의 부두목으로 삼아서 조직의 살림을 맡기고 자신은 지방의 거대 조직이나 일본의 야쿠자 조직과 제휴하는 등 큰일에만 직접 관여했다고 한다. 그가 제휴한 야쿠자는 일본 전역에 25개 정도의 전국구 레벨의 조폭들 중 3대 야쿠자 조직 중 하나인 이나가와카이(稻川會)의 중간보스 출신이자 "니시야마 미노루"란 이름으로 알려진 서순종이었다. 당시 일본 가요계나 스포츠계에서 능력 있는 재일교포들이 많이 진출해 있었듯이 야쿠자 조직 내에서도 재일 한국인들이 오야붕이 된 경우가 많았다. 오야붕급 주요 인물들과 구체적인 사례들에 대해선 나중엔 별도로 자세하게 소개하게 될 것이다.
 
신상사와 일본 야쿠자와의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된 듯하다. 2009년 서울 강남에서 신상사 딸의 결혼식이 열렸을 때 부산 칠성파 두목 이강환을 비롯해서 전국의 조직폭력배와 일본 3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山口組), 스미요시카이(住吉會), 이나가와카이의 간부들이 포함된 약 4,000명의 하객이 다녀간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서순종은 한국 최초의 권투 세계챔피언 김기수를 키워낸 국내 양대 프로모터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김기수 외에도 유제두, 박종팔, 박찬희 등등 다수의 세계 챔피언을 배출시켰다. 신상사는 그와 권투사업을 포함해 여러 사업들을 벌여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TV가 많이 보급되지 않은 시절 오락수단이 태부족이었던 당시는 권투나 프로레스링이 돈을 벌 수 있는 흥행의 최고 사업이었다. 과거 일본도 한때 그랬지만 한국에서도 많은 조폭들이 여기에 이권 개입을 하곤 했었다.
 
또 한 가지, 김두한의 후계자로서 나중에 종로파 두목이 된 아오마스가 무너진 것도 그가 신상사에게 당했기 때문이다. 신상사는 1955년 우연히 5명의 종로파 조직원들로부터 몰매를 맞고 있던 김응규라는 사람을 구해준 뒤 그를 조직원으로 받아들였는데, 김응규는 당연히 아오마스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살았다. 자기 부하가 된 김응규의 복수를 해주겠다고 마음 먹고 있던 차에 신상사는 어느 날 아오마스가 국일관 캬바레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 흠씬 두드려팼다. 당시 아오마스는 도망치기 위해 2층에서 뛰어내렸는데 그만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고 한다. 이 사건은 세간에 “국일관 사건”으로 불리며, 아오마스가 새파란 후배인 신상사에게 개망신을 당한 사건으로 알려졌다.
 
1956년 신상사는 황금마차 습격사건에서 쳐들어온 동대문사단 조직원들을 박살내고 1957년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을 저지른 뒤 도주하는 과정에서 명동파의 나와바리를 침범한 동대문사단 조직원들을 때려눕히는 등 두 조직 간 항쟁의 최일선에서 싸웠다. 그러나 1958년 충정로 도끼사건으로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지만 항소해서 형량이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다. 출소한 신상사는 명동을 기반으로 조직을 재건했는데, 이 시기에 서울 주먹계를 사실상 평정한 셈이다. 기존의 최강 조직이던 동대문사단은 5.16군사정변으로 두목 이정재가 사형당하고 남은 조직원들이 정종원과 유지광의 세력으로 분열되었기 때문에 전화위복으로 신상사가 무주공산인 서울을 접수하기가 쉬웠기 때문이었다.
 
서울 주먹계를 평정한 신상사는 이북에서 내려온 대구 출신으로 서울역 뒤쪽 염천시장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당시 명동 다음으로 큰 휴흥가였던 무교동을 장악한 조창조 그리고 정학모, 오종철을 필두로 한 무교동파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무교동파는 호남 출신 폭력배들이 힘을 합친 신흥 세력이었다.
 
여기서 잠시 조창조라는 인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창조는 지금까지 건달 세계에서 시라소니, 김두한 이후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주먹으로서 주먹계의 현존하는 전설로 통하는 인물이다. 그의 회고록에서는 주먹계의 “최고의 사나이”, “실전의 황제”로 인정받는 걸로 나와 있다. 조창조의 싸움실력은 양아치가 아닌, 제대로 된 건달주먹이라면 누구든 인정한다.
 
나도 얼마 전에 그 분을 잘 아는 나의 후배를 통해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했었다. 또한 동시에 일본 야쿠자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그 쪽과도 연결을 해놓은 상태였다. 중국, 한국, 일본, 홍콩, 대만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의 주목사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주먹들의 철지난 무용담만 늘어놓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연구가치가 전혀 없는 주제다. 적어도 주먹들이 정치권력과 어떻게 결탁돼 음이든 양이든 구조적으로 국가와 사회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추적하는 정도는 돼야 한다.
 
한국은 그럴 정도는 아니지만, 과거 한 시기 주먹들과 국가 최고 권력자 장개석이 결탁해서 서로 이용한 중국과 대만이라든가, 또 지금 현재 야쿠자가 천황을 정점으로 한 극우세력을 떠받치고 있는 근현대 일본의 주먹사는 충분히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주제이다. 내가 원래 창기, 거지, 매춘부, 서커스단, 악극단, 화장터 시체처리자들, 조폭 등등의 주제를 다루는 사회사적 관점에서 주먹사를 연구하고자 한 것도 바로 이런 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 이 주제를 선반 위에 올려놓은 상태다. 코로나 때문에 일단 일본을 갈 수가 없으니 끈이 닿은 야쿠자들을 만날 수가 없는 데다 다른 사정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신상사 얘기로 되돌아가서 1980년대 초 신군부에 의해 명동파의 몰락 이전에 일어났던 주먹계 내부의 헤게모니 쟁탈전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에 대한 소개는 마무리하겠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신상사가 조양은에게 칼부림을 당해 패배하거나 은퇴했다는 말은 잘못 와전된 헛소문이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 건설공사 관련 문제로 명동파의 조직원 서순종을 납치한 무교동파는 그를 구하러 온 신상사파 조직원을 무자비하게 린치했다. 이 사실을 알고 격노한 신상사는 구달웅과 전철웅을 투입하여 서순종을 잡아 두고 있던 무교동파의 에이스 이경원을 각목으로 두들겨 패서 초주검으로 만들고 서순종을 구출해냈다. 그 뒤 벌어진 사건이 한국 주먹사에서 한 획을 그은 그 유명한 1975년 사보이호텔 습격사건! 서순종 사건 뒤 무교동파는 명동파에게 사과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해 와서 신상사를 비롯한 간부들이 자신들의 아지트 사보이호텔 커피숍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도 무교동 측이 오지 않자 신상사와 구달웅은 일찍 자리를 떴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신상사의 매제 김수일이 얼마 뒤 회칼 사시미와 야구방망이를 들고 난입한 무교동파 행동대장 조양은이 이끈 조직원들에게 야구방망이로 머리를 맞아 피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우연히 그 자리에 있던 목포 출신 한 조폭은 구달웅으로 오인 받아 온몸을 회칼로 난자당했다. 김수일은 장시간의 뇌수술을 받아 겨우 소생했지만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고, 온몸을 난자당한 목포 출신 조폭도 마찬가지 과정을 겪어야 했다.
 
사보이호텔 사건 이듬해 1976년에는 이른바 남산 도큐호텔 사건이 벌어졌다. 사소한 시비에서 비롯된 충돌 끝에 호남 출신 폭력배들이 신상사파를 습격하여 명동파 부두목 구달웅의 머리를 도끼로 찍고 다른 조직원의 다리를 칼로 찌른 보복사건이었다. 당시 칼에 찔린 모 조직원은 도망치던 상대편 조폭을 붙잡아서 자기 다리에 박힌 칼을 뽑아 그의 귀를 자르고선 “귀를 찾으려면 내일 사보이호텔로 나를 찾아오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하고만 있을 신상사파가 아니었다. 이때 신상사파가 실전에 기용한 인물이 바로 김태촌이었다. 이때 일선에서 보복을 진두지휘한 신상사파의 행동대장은 방영길이었다. “오다”를 받은 김태촌은 호남 출신 폭력배들의 보스 오종철을 칼로 난자해 주먹계에서 은퇴시키고, 조창조의 항복을 받아내는 등 맹렬한 보복과 반격으로 무교동파를 사실상 와해시켰다. 조창조 본인도 2008년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사실 달걀로 바위치기였어요. 부끄러운 얘기지요. 사보이호텔사건으로 신상사파라는 조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됐습니다. 신상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사건이 나자 서울사람들의 응집력이 강하게 나타나더군요. 평상시 숨어 있던 신상사파의 방대한 세력이 드러났습니다. 힘으로도, 돈으로도, 빽으로도 우리가 이길 수 없었습니다. 당시 양은이가 20대였습니다. 뭘 알겠습니까”라고 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명동파는 1980년에 집권한 신군부에게 세력이 와해됐다. 조직폭력배에게 가한 철퇴에서 타켓이 된 두목 신상파와 명동파의 2인자도 모두 살아남지 못한 결과였다. 먼저 잡힌 것은 신상사파 부두목 구달웅이었다. 그는 전두환이 이끈 신군부의 군사재판에서 사형 구형을 받고 1심에서 15년형을 받았다. 그런데 신상사가 그를 구명하기 위해 당대 5공화국 권력의 핵심이었던 노태우를 직접 만났고, 노태우가 박재명 육군본부 법무감에게 써준 의견서 덕분에 구달웅의 형량은 파격적으로 6년 4개월로 감형되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1980년 말 이번에는 신상사 자신이 잡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서 2개월 동안 호된 훈련을 받았다.
 
그 뒤 삼청교육대에서 풀려난 신상사는 이태원 미 8군 사령부 근처 크라운호텔을 무대로 삼아 활동하던 중 1990년에 또 다시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자 자신은 주먹계에서 손을 씻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조직들이 큰 피해를 본 것과는 달리 신상사파는 유흥업소 갈취 등과 같은 서민대상 범죄는 저지르지 않았으며, 정권 인맥을 잘 이용해 별 다른 피해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과연 신상사의 싸움 실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는 자신의 싸움 기술에 대해 밝힌 바 있다. 탁월한 발차기 실력, 번개 같은 선제공격, 단호하고 과감하게 상대의 눈을 순식간에 찌르며 급소를 가격하는 능력이 출중했고, 싸움을 단번에 끝내는 실력은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기 힘들었다고 자신을 평했다. 이 말은 상당 부분이 사실인 듯하다. 신상사는 당시로선 작지 않은 178cm의 키와 80Kg의 몸집에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두 사람 정도는 너끈하게 해치울 수 있다고 알려졌는데, 한창 때의 젊은 시절엔 그 보다 훨씬 더 막강했을 것이다.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그가 학창시절 운동을 좋아해 권투, 유도, 검도로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신상사를 소환한 한 검찰 관계자가 “신씨 소환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후배 조직원 십 수 명이 동행하기도 했다. 신씨가 칠순에 접어들었지만 지금도 혼자서 2명 정도는 너끈히 상대할 정도로 몸이 건강하고 날렵했다”라고 전한 말에서 감을 잡을 수 있다. 그가 2013년 월간중앙과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낸 회고록에서도 나온 사실이지만, 신상사는 21세기 대한민국 조직폭력배 세계에선 지역과 나이대를 막론하고 전국구의 대우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7년에 찍힌 한 영상을 보면 여전히 건장한 20대가 포함된 10여 명의 부하 조직원을 대동하고 다니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신상사-구달웅의 뒤를 이어 명동파의 두목이 된 인물은 홍인수였다. 그는 1970~80년대 호남 세력의 거친 도전에 맞서 많은 "항쟁"(일본 야쿠자들이 상대 야쿠자들과 벌이는 싸움을 일컫는 용어)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2007년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 보복폭행 사건에도 연루돼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른 인물이었다.
 
이외에 일반인들에겐 생소한 인물이지만 신상사파의 행동대장이자 1975년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에 대한 대응에서 보복을 진두지휘한 방영길이라는 인물도 빼놓을 수 없다. 1943년 생으로 서울 경동고를 나온 그는 오랫동안 복싱계에 종사한 복싱의 달인이었는데, 조양은의 명동 사보이호텔 습격사건 때는 마침 다른 곳으로 볼일을 보러 갔다가 화를 면했다. 방영길은 사건 후 조양은 등 무교동파의 주범들을 잡으러 다녔지만, 위에서 얘기한 대로 3년 후 조창조가 신상사에게 사과를 하면서 사건이 일단락됐다.
 
방영길은 신상사파의 ‘넘버2’ 구달웅 씨의 최측근으로 조직의 주요 일을 봤다. 그는 1987년 호남주먹의 대부 이승완이 주도한 건달들의 정치단체인 호청련(호국청년연합회)에 몸을 담았고, 죽기 전까지도 큰 주먹들의 모임인 ‘일우회’ 회장을 맡았다. 복싱계의 원로로도 통했던 그는 2015년 10월 24일 췌장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는데 주먹계에서는 지금까지도 “한강 이북의 최고 주먹”으로 평가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한국의 주먹 지형도가 바뀐 것은 1970년대 중후반에 들어와서였다. 명동의 신상사파가 범호남파의 호남 주먹들에게 밀리고, 범호남파 조폭 조직 내 오종철파의 행동대장이었던 조양은이 급부상하는 시기였다. 범호남파 내 두 파벌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수세에 몰린 박종석파의 행동대장 김태촌이 1975년 1월 2일 무교동 엠파이어호텔 후문 주차장에서 범호남파의 실질적인 보스 오종철을 칼로 난자해 불구로 만든 사건은 한국의 주먹들이 완전히 일본 야꾸자들의 행태를 답습하기 시작했음을 나타낸 상징이었다.
 
그 뒤 조양은과 김태촌은 헤게모니 쟁탈이나 복수하기 위해 서로 3년간 쫓고 쫓기는 혈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오기준과 김태촌의 ‘서방파’와 이동재의 광주 ‘OB파’가 급속히 세력을 키워 당시 패권세력이었던 ‘양은이파’와 함께 ‘3대 패밀리’를 형성했다.
 
한국 현대 주먹사를 이야기할 때 몇몇 지방은 반드시 거론되는 도시들이 있다. 부산, 목포, 광주, 천안 등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부산은 당연히 빼놓을 수가 없다. 부산의 양대 주먹 패거리인 이강환이 대부인 칠성파와 20세기파는 지금도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부산 주먹사를 알려면 또 다른 장이 필요할 정도로 간단치가 않다.
 
포항 출신 주먹들은 어떨까? 포항사람들은 우리가 나고 자란 포항 주먹들에 대해 궁금해 할 것 같아서 자문해주는 말이다. 포항 출신 주먹들 중엔 몇 년 전에 유명을 달리한 김말×이라는 분만 그나마 준전국구 반열에 든 주먹이었고, 얼마 전까지도 현역으로 뛰던 필자 나이 또래들은 모두 지역구에 불과하다. 혹시 나중에 내가 과거에 겪었던, 정말 영화 ‘친구’의 일부 스토리와 비슷한 경험담을 소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김말×이라는 분을 잘 아는 선배와 함께 명동 그의 사무실에서 그분을 잠시 만난 적이 있다. 김대중 정권 때 그분이 호남 주먹들에 밀려서 지분이 있던 명동 소재 호텔까지 빼앗기고 나서 분을 삭이면서 어렵게 지낼 때였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뜻하지 않게 재미 삼아 한국의 주먹사를 얘기하게 됐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중국 암흑세계의 주먹 황제 杜月笙, 일본 야꾸자 두목 도야마 미쯔루(頭山滿), 시라소니 이성순의 싸움 실력들을 소개하면 흥미로울 것이다. 여러 가지 자료들을 수집해서 모아 놓고도 착수를 못하고 있는 게 못내 아쉽다.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다. 오늘은 그 대신 일본의 “야꾸자”라는 말의 어원을 소개하겠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첨부해놓았다.

https://suhbeing.tistory.com/m/796
 
2019. 6. 7. 06:21
臺灣 臺北市 寓居에서
2022. 4. 16. 08:45 가필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