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삶/삶의 순간들

좀 더 보듬고 더 많이 사랑하며 살다 가자!

雲靜, 仰天 2019. 5. 24. 09:10

좀 더 보듬고 더 많이 사랑하며 살다 가자!

 

다시 부산으로 들어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근 달포만이다. 허기진 배를 기내식으로 달랜다. 지난 며칠간 계속 무리했던 몸을 낭창낭창 허물 거리게 하려고 설 잠이라도 청할 요량으로 승무원에게 양주를 부탁해 두 잔을 연거푸 비웠다. 그랬더니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흐느적거려야 할 정신이 되려 더 말똥말똥해진다.

 

기내 뒷자리의 빈 좌석에 드러누웠지만 한 달 만에 술이 들어가니 잠이 아니라 오히려 난 데 없이 눌려 있던 思念들이 맹속으로 엄습해온다. 흡사 흡혈귀들이 먹을 것을 보고 달려드는 것처럼.

 

창밖으로 보이는 코발트 빛 벽공에 주변 정겨운 사람들의 얼굴이 그믐날 밤의 별똥처럼 펼쳐진다. 새삼스럽게도 평소 늘 해오던 생각이 다시 고개를 빳빳이 든다. 누구든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는 거 말이다. 석가모니께서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을 떠날 때 남긴 말씀도 영화의 한 컷처럼 그 정경과 함께 다가온다.

 

 

 

죽음에 대해 슬퍼하지 말고 애달파 하지도 말라.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과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

 

열반에 들기 전 스승의 열반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석가세존께서 하신 이 말씀은 서거 후 100년 후 쯤의 제1차 결집 때 다른 말씀과 함께 법구경이라는 이름의 경전에 담겼다.

 

사랑하는 이들의 곁을 떠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더 없이 슬픈 일이다. 차라리 애초 세상에 태어나 인연을 맺지 않은 것만 못하리만치 슬플 수 있다.

 

하지만 반전이 없으면 삶이 삶답지 않지 않는가? 그렇다! 생명의 불빛이 꺼지는 걸 슬퍼할 일이 아니다. 모친의 죽음에 덩실덩실 춤을 춘 장자처럼 춤 출 것까지는 없어도 그렇다고 세상이 종말이라도 난 것처럼 구슬피 곡할 일도 아니지 않는가? 떠나기 직전까지 아무도 봐주지 않는 들에 핀 야생화의 한 잎으로 지더라도 곁의 야생화들과 함께 보듬고 사랑하다 갈 것이다.

 

 

 

평소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그리워하면, 그래서 삶의 모든 리비도를 아낌없이 소진하고 가면 슬퍼지지 않을 테다. 추함 없이 한 폭의 지는 노을처럼 아름답게 떠나야 한다. 몸으로 때우느라 어느 정도 구차하게 산 육신의 지난 삶을 구원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바다를 내려다보니 햇빛에 반짝반짝 조곤 대는 여울이 은비늘의 간지럼이다. 언어 이전의 세계다. 은비늘의 반짝임이 서로를 사랑하는 몸짓처럼 정겹다. 올망졸망 섬들이 보이는가 싶더니 벌써 다대포 앞바다가 보인다. 정말 찰나 같다. 두 시간 남짓한 여정도 찰나이듯이 삶의 종착점에 다다르는 것도 찰나다.

 

2019. 5. 23. 14 :16

타이페이발 김해행 비행기 안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