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번’이라는 말의 유래
“너가 잘 부르는 18번은 뭔가? 雲靜은 ‘낙화유수’다만......” “나? 내 십팔번은 ‘My way’일세!”
“18번”이라는 단어는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고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주 쓰이던 말이었으며, 지금도 사용하는 이가 없지 않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이 말이 일본어 ‘十八番’에서 온 것인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 보인다. 더구나 ‘十八番’이 일본 전통극의 용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더욱 드물 것이다.
일본어에서는 한자로 十八番이라고 쓰면 두 가지로 발음이 된다. 거의 모든 일본어 한자와 단어에는 복수의 음가가 있듯이 十八番도 하나는 숫자를 읽는 발음으로서 ‘쥬하치방’으로 읽고, 다른 하나는 노래나 장기자랑 중에 가장 잘하는 것을 뜻하는 ‘오하꼬’로 읽는 것이다. 전자는 음독이고 후자는 훈독이다. 오하꼬는 일본어에서 お箱로 표기한다. お箱는 보통의 箱字 앞에 자기가 쓰는 게 아닌 윗사람이나 모르는 이가 사용하는 상자에 대해 존중, 경대의 의미를 지닌 お를 붙인 상자의 높임말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왜 가장 잘하는 장기나 특기를 '18번' 혹은 '상자'로 표현할까? 연원이 어떠하기에 그럴까? 이 말은 일본인들이 즐기는 일본 전통극의 하나인 카부끼(かぶき, 歌舞伎)에서 나온 말이다. 노우가꾸(能樂, 줄여서 '노우'라고도 부름), 교겐(狂言)과 함께 일본의 3대 전통 극예술 장르의 하나인 카부끼는 ‘카부끼 시바이’(歌舞伎 芝居)의 준말로서 20세기에 들어와 ‘新派’(新劇이라고도 함)극이 생겨나기 이전의 대표적인 극예술로서 舊劇으로 분류된다.
유명한 카부끼 배우로서 에도(江戶)시대로부터 가부키의 전통을 7대째로 이어온 제7대 가문의 이치카와 단주로(市川團十郞)라는 藝人이 자기 집안에서 공연을 할 때에 가장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공연 레파토리(아라고또=荒事라고 함)로 열여덟 가지를 골라서 상자(함) 안에 집어넣고 공연시에 제비뽑기 하듯이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레파토리를 하나씩 끄집어내서 그 레파토리를 공연한 것에서 유래한다.
카부끼의 공연 레파토리는 대략 400가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공연하는 것은 그 가운데 100개 정도인데, 옛날 에도시대에는 그날그날 공연장에서 상자에서 손에 잡혀 나오는 것을 공연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미리 공연 주제를 홍보를 공연하기 때문에 대부분 옛날 전통방식으로 상자에서 주제를 뽑아서 하는 곳은 없는 실정이다.
상자속에 집어넣어 놓은 열여덟 가지의 레파토리는 해학, 익살과 함께 권선징악 등의 윤리적 문제를 다룬 우리의 전통 극인 춘향전이나 흥부놀부전과 달리 대체로 살벌한 사무라이들의 무용담이나 귀신 따위를 얘기한 매우 남성적이고 거친 내용들인데, 이를 ‘카부끼 쥬하찌방’(歌舞伎十八番)이라고 불렀다. 이 레파토리는 이치가와 가문에서 대대로 인기리에 전하여 내려왔고, 오늘날도 일본에선 전국적으로 인기리에 상연되고 있다.
그런데 이 '18번'이 '오하꼬'로 불리게 된 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꼬가키’(箱書き), 즉 작품이나 공예품이 진품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감정서가 붙을 정도로 가장 자신 있는 극이라는 뜻과 이른바 ‘아타리 교겐’(当たり狂言)의 대명사가 된 18번이 겹쳐졌기 때문이라는 설이다. ‘교겐’이란 가부끼극의 줄거리를 담은 대본을 말하는데, 아타리교겐은 ‘아타리’가 관객들에게 평판이 좋다는 의미이니까 절찬리에 공연되고 있는 인기 있는 교겐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교겐, 즉 ‘카부끼 18번’의 대본을 상자에 넣어서 소중하게 보관했던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이다. 일본에서는 둘 중 첫 번째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 한 가지, 이제 우리가 해결하거나 결정해야 할 과제가 있다. 지금까지 일본어인줄 잘 모르고 써온 '18번'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할지, 아니면 이 말을 대체할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문제다. 예를 들면 이런 류가 될 것이다. 일상 대화에서나 노래방 같은 데서 “친구야 니 18번은 뭐고?” 혹은 “18번 한번 불러 봐라”라고 하는 것이 편한지 아니면 ‘18번’의 사용을 일절 금지하고 그 대신 “친구야 니가 가장 잘 부르는 노래는 뭐고?”, “가장 잘 부르는 노래를 한번 불러 봐라”고 할 것인지 말이다.
혹은 그것도 아니라면 ‘18번’을 대체할 새로운 명사를 만들어 낼 일이다. “가잘곡”(가장 잘 부르는 곡)? “자신곡”?, “왔다곡”?, “따봉곡”?, “장기곡”?, “1번 곡”?, “최상곡”? 어떤 말이 될지는 다수 대중의 찬의가 있으면 된다. 생성, 변화, 어의의 축소 혹은 확대 등의 변조, 사멸, 생성을 거듭하는 언어의 속성이 그런 것이다.
기존에 쓰이고 있는 일본어를 대체할 새로운 단어를 만들려는 노력은 전혀 기울이지도 않고 입으로만 막무가내로 일본어 잔재를 깡그리 청산하자고 소리치는 것은 무지해서 그렇거나 지적 허영이라고 비판 받을 수 있다. 누구든 이런 류의 주장은 꽤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19. 5. 6. 08:21
臺北 寓居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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