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愛新覺羅’가 신라계 후손이 신라를 생각해서 만든 말이라고?
중국역사에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선조격인 금나라를 신라의 유민이 세웠고, 금나라의 후예들이 후금을 세운 뒤 청나라를 세웠으니 곧 청나라도 신라계 국가라는 주장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新羅라는 말과 愛覺이라는 말을 합친 ‘愛新覺羅’라는 말이 곧 신라가 망한 뒤 신라유민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신라를 생각하면서 신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만든 말이라는 것이다. 愛新覺羅라는 한자의 자구도 신라를 사랑하고(愛新), 신라를 생각한다(覺羅)는 말로 보여 그럴듯하다.
더군다나 나의 블로그 내 “중국읽기 6 :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의 중국근현대사 시기구분”이라는 글을 읽고선 이 주제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임에도 아래와 같은 댓글을 남기고 사라진 자도 있다.
“중국의 역사는 이민족의 역사가 반이죠. 청나라는 김씨로 신라계로 불리죠. 愛新覺羅 우리가 사대사관에 함몰되어 우리의 역사를 소홀히 한 것이죠. 부도지를 봐야 사마천의 거짓 역사에서 벗어 날 수 있죠.”
위 댓글은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의 중국근현대사 시기구분”이라는 주제와 한참이나 동떨어진 얘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마치 ‘愛新覺羅’를 신라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면 사대사관에 함몰된 것으로 보는 논리의 비약과 폭거도 부린다. 또 청나라가 “김씨로 신라계로 불린다”고 한 주장도 전혀 사실이 아님에도 자신이 이해한대로 무책임하게 갈겨놓았다. 도무지 생각 없이 말하고 생각 없이 쓰면서 산다는 느낌이다.
이런 현상은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되면서부터 더 심해지고 있다. 한국인의 평균 지력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국내 인터넷 포탈상의 최대 정보 플랫폼 역할을 하는 네이버 ‘지식백과’에도 愛新覺羅에 대해 잘못된 설명을 해놓고 있는데, 떠도는 낭설과 헛된 주장들이 여기에서 나온 것일까? 네이버의 ‘지식백과’에는 아래처럼 설명돼 있다.
“愛新은 만주어로서, 우리말로 金(금, 김)이고 覺羅는 우리말로 성씨에 해당하므로, 김씨, 김가네를 나타냄. 만주어로 읽으면 愛新覺羅가 된다고 함. 淸(청) 태조 누루하치가 난 만주족의 한 부족의 이름. 후에 淸朝의 姓으로 되었음. 금나라, 후금(나중에 청이 됨) 등은 우리나라 신라시대 이후 만주로 건너간 김씨들이 세운 나라를 나타내므로, 여진족은 우리나라 계통이고 遙(요), 金(금), 淸(청)나라는 한민족의 후예들이 주체가 되어 세운 나라임을 알 수 있음. 愛親覺羅(애친각라). 출전 金史”
우선 위 소개 내용은 일부가 잘못됐다. “愛新이 우리말로 金(금, 김)이고 覺羅는 우리말로 성씨에 해당”한다는 것은 틀린 오류다. 뒤에 가서 재론하겠지만 만주어에서 覺羅는 먼 친족의 분파를 가리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보다는 이 글의 핵심 논의 주제, 즉 과연 愛新覺羅란 신라인 유민들이 신라를 생각해서 만든 말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보자. 이 의문처럼 과연 愛新覺羅라는 말이 신라인 유민들이 신라를 생각해서 만든 말이었을까? 내가 아는 바로 답은 그렇지 않다.
신라가 망한 뒤 그 유민들은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주장은 옳은 것일까? 아마 일부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그 땅으로 이주해갔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러나 중국 역대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24史 중의 金史에는 금나라를 연 자신의 조상들이 ‘신라인’이라고 한 대목은 없고 고려에서 왔다는 말은 있다. 예를 들어 『金史』「世紀」 중의 始祖편에 “금의 시조는 函普라고 하는데 처음에 고려에서 왔고, 햇수가 벌써 60여년이 된다”라는 “金之始祖謂函普, 初從高麗來, 年已六十餘矣”이 그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중국인들은 자주 삼국시대와 고려를 구분하지 않고 그냥 편의적으로 고려라고 부르는 습관이 있는데, 그래서 『金史』에서도 신라를 고려라고 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 기록에서는 금나라 시조 函普가 동북 지역으로 건너 온지가 60여년이 됐다고 한 것을 보면 이 가능성도 거의 없어 보인다. 신라는 935년(제56대 경순왕)에 망했기 때문에 금나라가 건국한 1115년과는 거의 200년 가까운 시간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金國은 北宋과 南宋 시기 金太祖 여진족인 完顔阿骨打(完顔은 金國의 귀족성씨)가 중국 북방지역에서 세운 나라로서 1115년에 시작됐다가 건립한지 100여년 뒤인 1234년에 몽골군과 송나라 군의 협공을 받아 金나라 哀宗 完顔守緖와 金나라 마지막 황제 完顔承麟과 같은 날에 순국함에 따라 정식으로 멸망했다.
인터넷 포탈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출전이 金史라고 돼 있는 위 소개문 중의 “愛新”과 “愛親覺羅”라는 말도 24史중의 『金史』에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그 전의 宋史와 遼史에도 없다. (臺灣 中央硏究院의 漢籍電子文獻資料庫 소장 자료 검색)
“愛親覺羅”가 24史중에 처음 나오는 것은 淸代에 가서다. 『淸實錄』의 「滿洲實錄」 卷一(癸未歲至甲申歲萬曆11年至12年)에서다. 여기에 “哈善沾河寨主常書揚書俱忿恨相議曰與其仰望此等人不如投愛新覺羅六王子孫議”라는 문장 중에 “愛新覺羅”가 나오는 것이다. 뜻은 “哈善沾河寨主는 자주 글을 썼다. 그리고 분한 심정으로 토론하면서 하는 말이 이러한 사람들에게 의지하기보다 愛新覺羅氏 여섯 왕의 자손들에게 의탁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愛新覺羅”는『金史』에는 나오지 않으니 이것이 중국 전체 역사서에서 최초의 출전인 셈이다. “愛新覺羅” 淸代의 正史인 淸實錄이 아닌 사서인 淸의 高宗이 쓴『淸朝文獻通考』에도 나온다. 즉 “皇始祖肇朝原皇帝始愛親覺羅氏”중의 愛親覺羅가 그것이다.
그러면 “愛新覺羅”라는 말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무슨 뜻이었을까? 만주어로 금을 가리키는 ‘아이신’과 씨족의 일파를 나타내는 ‘기오로’를 중국어로 음사한 것이다. 신라 후손들이 조상의 나라였던 “신라를 사랑”해서 만든 이름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민간에서 퍼트려진 낭설에 불과하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신라 왕족들 중의 김씨는 알타이(Altai)라는 말에서 왔다. 알타이 지역은 카스피해 북방의 초원과 구릉이 넓게 펼쳐지는 지역 일대를 가리킨다. 이 지역에서 동쪽으로 이주해온 여러 갈래 중 일부는 오늘날 중국의 동북지역, 즉 과거의 만주 지역 일대에 분포했고, 다른 한 갈래는 한반도로 들어왔다. 즉 신라 왕족의 김씨 일족은 알타이에서 건너온 한 분파였다. 그 시기는 대략 4~5세기 경이었다.
처음에 한반도 경주 지역 일대로 들어온 알타이 계열의 종족들은 신라 지역 토착세력 속에서 자신들의 성을 한자로 金이라고 했고, 신라의 국가권력을 잡았다. 그들이 알타이 계열의 종족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은 자신들이 알타이 지역에서 사용하던 금관, 그리고 장식품으로 금관에 달려 있는 曲玉과 각종 유리공예 용기들을 사용했는데 6세기 경 금관을 대표로 한 이러한 스키타이 문물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났다가 그 뒤 그들의 권력이 쇠락해지자 금관 등이 사라진 것이다. 즉 이러한 증거가 그들이 경주 일대의 토착세력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그들이 자신들의 성을 金이라고 한 것은 자신들이 두고 온 고향 “알타이”가 금을 뜻했고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와 비슷한 시기 한반도 백제, 신라, 고구려에서 일본 열도로 들어간 한반도 계열의 종족들(일본인들은 이를 “渡來人”이라고 부른다.)들이 자신들이 살던 한반도의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고향의 풍경과 여건이 유사한 곳을 찾아서 정착했고, 이런 저런 명칭도 한반도 계열의 언어로 불렀던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라인들 중 일부는 여진족, 즉 만주족과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한 갈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두 부류가 같은 하나의 민족이라고는 볼 수 없다. 여진족과 신라계열 김씨들 혈연의 시조격인 알타이 일대 지역에서부터 몽골, 만주로 이어지는 광활한 지역에는 다양한 종족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愛新覺羅의 연원은 어디였을까? 愛新覺羅는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장악한 만주인들이 한족을 통치하는 통치자가 되면서 한족을 통치하기 위해서 자신의 성명을 중국어로 옮길 필요가 있었는데, 만주어로 ‘아이신’(Aisin) 기오로(gioro)라는 성명을 중국어로 음역한 것이다. 기오로는 혹은 고로(goro)라고도 불렸다. 즉 愛新은 만주어 아이신의 중국어 음역이고, 覺羅는 만주어 기오로의 중국어 음역이다.
원래 만주족은 부족에 따라 만주어로 ‘아이신’이라는 성을 붙였는데, 아이신은 성이었고, 기오로(혹은 고로)는 먼 친족의 일파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愛新覺羅는 중국어로 ‘아이신쥐에뤄’로 발음되는데 ‘아이신기오로’에 가깝다.
아이신은 만주어로 금(gold)을 뜻했다. 만주인들은 그 시기 중국어로 의역해서 金이라고 하지 않고 음역해서 ‘아이신’이라고 발음되는 ‘愛新’으로 옮겼다. 만주어로 “먼”이라는 뜻을 지닌 기오로(혹은 고로)는 우리로 치면 종가에 해당되는 宗室(uksun)과 구분하는 용어였다. 예컨대 만주어에서 外祖父를 goro mafa, 外祖母는 goro mama, 外孫은 goro omolo로 불렀는데, 이 낱말들 중 外에 해당되는 goro(gioro와 같음)가 먼 친족이라는 의미였고, 당시 중국어로는 遠支라고 번역됐다.
愛新覺羅 씨족의 유래에 대해서는 중국학계에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Aisin Gioro는 과거 만주족의 여러 姓과 氏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성과 씨가 통용되는 오늘날과 달리 고대에는 구분이 있었다. 아이신은 大宗의 宗室을 뜻했고, 氏에 해당된 기오로는 대종에서 갈라져 나온 먼 종친이었는데, 그들은 아이신과 기오로로 혈연의 원근을 나타냈다. 아이신 성을 가진 부족들과 먼 혈연관계에 있던 사람들을 기오로로 불렀던 것이다. 아이신과 마찬가지로 기오로도 나중에는 하나의 성으로 발전했으며, 약간의 공로가 있는 신하에게도 기오로라는 성을 하사했다.
따라서 이 말들의 유래는 역사상의 漢人들의 말과 무관하다. 기오로씨 사람들은 만주족의 8대 성씨(이를 한자로 표기하면 佟佳氏, 瓜尔佳氏, 馬佳氏, 索綽洛氏, 赫舍里氏, 富察氏, 那拉氏, 鈕祜禄氏) 중에도 들어가지 못한 평범한 것이었으며, 1580년대 아이신 기오로는 누루하치의 6대조 및 그들의 22명의 아들로 구성된 작은 가족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데 17세기에 들어와 누루하치의 아들 皇太極이 清朝를 건국해 大宗과 분파(遠支)의 구분을 없애고 漢人정권의 제도를 본 따서 아이신 기오로를 한자로 음역해서 愛新覺羅(아이신쥐에뤄)로 짓고 이것을 성씨로 삼아 그 뒤에 이름을 붙였다. 만주족 선조들의 만주에서의 연원을 기록한 『淸實錄』 「太祖高皇帝實錄」 卷之一(癸未歲至甲申歲萬曆11年至12年)에 의하면 청나라의 고황제 즉 누루하치의 씨가 愛新覺羅였고, 그들의 발상지가 백두산이었다는 것이다. (“高皇帝姓愛新覺羅氏諱先世發祥於長白山”)
후금을 개국한 大汗(칸)으로서 清朝 개국의 토대를 닦은 누르하치는 정식 명칭이 “아이신기오르 누르하치”였고, 이를 중국어로 愛新覺羅 努爾哈赤로 번역해 불렀다. 清朝를 연 開國 皇帝 황태극은 愛新覺羅 皇太極으로, 또 入關한 清朝의 첫 번째 皇帝인 順治皇帝는 愛新覺羅 福臨으로 불렸다. 清朝의 마지막 皇帝인 宣统皇帝는 愛新覺羅 溥儀로 불렸다. 愛新覺羅는 국가를 개창한 청 황실의 姓氏가 됨에 따라 일반인이 아무나 부를 수 없는 비할 데 없이 존엄스런 성씨가 됐다.
愛新覺羅은 청조의 國姓이었지만, 만주문헌 자료에는 이 명칭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예컨대 『滿文老檔』과 『滿洲實錄』 중에 愛新覺羅는 총 세 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문헌으로 봤을 때 그 姓氏의 기원에 관한 각종 설들은 통상 서로 충돌한다. 학자들은 이 姓氏가 清朝皇室에서 만들어 그 지위를 주조해낸 것이라고 믿고 있다. 쉽게 눈에 띄는 설은 “覺羅”가 성이라는 뜻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만주어 중에 “姓氏”라는 말의 원문은 ‘hala’(중국어로는 哈喇, 哈拉)이고, ‘gioro’는 수령이라는 뜻이다.
만주족의 성씨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일부는 姓(哈拉)이고, 다른 일부는 혈연 종친 관계의 족명(穆昆)에 근거를 두고 있다. 아이신기오르 성씨 중 기오르는 姓이며, 아이신은 族名인데, 양자의 관계는 한족 중 어떤 성씨와 어떤 가족의 관계와 유사하다.
예를 들어 張씨 성과 桐城 장씨, 翁姓과 常熟 翁氏 등의 관계와 같다. 覺羅라는 이 성에는 伊爾根 覺羅, 舒舒 覺羅, 通顔 覺羅 등의 가지는 모두 동일한 시조에서 나왔다고 한다. 愛新覺羅 努爾哈赤가 後金을 세웠기 때문에 이 부족은 마침내 선망의 부족(望族)이 돼 전 부족을 가리키는 통칭으로 부르게 됨에 따라 “愛新”은 이윽고 姓氏의 일부가 됐다고 한다. 마치 那拉씨에 葉赫 那拉, 烏拉 那拉씨가 있어 輝發 那拉 등으로 분파(分支)돼 나갔으며(葉赫과 烏拉는 모두 地名임), 瓜爾佳씨가 蘇完尼瓜爾佳, 安圖瓜爾佳 등으로 분파된 것과 같다.
1616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에서부터 大清 건국,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淸朝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퇴위한 1912년 2월에 이르기까지의 296년 동안 총 11대의 12명이 존재했던 역대 만주족 출신 청조 황제들은 모두 이름 앞에 ‘아이신 기오로’, 즉 愛新覺羅를 붙이고 그 뒤에 이름을 붙였다.
예컨대 愛新覺羅 努爾哈赤, 愛新覺羅 皇太極, 愛新覺羅 福臨(順治皇帝), 愛新覺羅 玄燁(康熙皇帝), 愛新覺羅 胤禛(雍正皇帝), 愛新覺羅 弘歷(乾隆皇帝), 愛新覺羅 颙琰(嘉慶皇帝), 愛新覺羅 旻寧(道光皇帝), 愛新覺羅 奕詝(咸豊皇帝), 愛新覺羅 載淳(同治皇帝), 愛新覺羅 載湉(光绪皇帝), 愛新覺羅 溥儀(宣統皇帝)와 같은 식이었다.
청조가 망한 뒤 청조의 황족들은 安, 廖, 曾, 金, 王, 孫, 艾, 羅, 肇, 范, 關, 鄂, 趙, 李씨 등의 한인 성씨로 갈았다. 愛新覺羅는 金씨로 바꿨고, 일부는 肇(혹은 趙)씨와 여타 한족 성씨로 바꾼 경우도 있다. 이 사실은 5만 종류가 넘는 중국의 성씨는 정말 여러 갈래의 종족들이 섞여 있음을 말해주는데, 만주족 후손들이 새로 취한 安, 廖, 曾, 金, 王, 孫 등등의 성과 기존의 동일한 성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한 번 더 문제를 환기하지만, 과연 ‘애신각라’라는 명칭이 신라계 후손이 만든 말로서 자기 조상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만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아직 완전한 확정적인 결론은 더 많은 고증이 필요하기 때문에 유보하지만, 본고에서 살펴본 지금까지의 설명으로는 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전혀 없는 낭설에 불과해 보인다.
2019. 1. 26
臺北 南港 中央硏究院에서
雲靜 草稿
'앎의 공유 > 아시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劉少奇의 여섯 차례 결혼 (0) | 2019.05.09 |
---|---|
역사상식 : 국호 ‘조선’의 유래, 일제의 ‘大韓’폐기와 ‘조선’복원 및 인륜적 만행 (0) | 2019.02.28 |
중국읽기 6 :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의 중국근현대사 시기구분 (0) | 2018.12.07 |
모택동의 여인들 ② :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권력과 미녀! (0) | 2018.12.05 |
중국근현대 지도자들의 여성편력① : 모택동의 여인들 (0) | 2018.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