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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읽기 6 :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의 중국근현대사 시기구분

雲靜, 仰天 2018. 12. 7. 16:45

중국읽기 6 :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의 중국근현대사 시기구분

 

역사학에서 시기를 구분하는 ‘획기’는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가 보통 ‘획기적’이라고 할 때 그 대상이 한 시대를 가를 정도로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획기는 역사연구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유용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획기는 완전하고 완벽한 개념이나 도구는 아니지만, 특히 수천 년의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 인도 같은 길고 복잡한 역사에서는 시기를 구분하지 않으면 역사를 이해함에 난점이 생긴다. 4~5천년이나 되는 장구하고도 복잡다기한 과거 역사를 단 한 용어로 개념화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각 시기는 그 시대의 역사적 특징과 고유한 사회경제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중국현대사의 주요 정당이자 정치세력인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은 각기 중국의 근현대사를 보는 시각이 다르다. 이것은 각기 중국의 근현대사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 그리고 중국을 어떤 국가 및 사회로 만들 것인가 하는 점, 이 목적을 달성하는 역사의 주체는 누가 돼야 하는가 하는 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래서 두 정당이 각기 치른 혁명도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하나는 부르주아지혁명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혁명이었다. 물론 이에 따라 두 당이 중국근현대사를 보는 시기구분도 확연하게 다르다. 예를 들면 아래 【표】와 같다.

 

【표】 중국과 대만의 근현대사 시기 구분

지역근대사 기간현대사 기간당대사 기점
중국1840~19191919~19491949~
대만1840~19111911~현재-

 
 
두 지역이 공통점도 안고 있다. 즉 중국 근대사의 출발점을 1840년 영국이 일으킨 아편전쟁에 두고 있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중국국민당이나 중국공산당은 공히 외세의 중국침략으로 중국의 근대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사의 끝임과 동시에 현대사의 시작 그리고 당대사의 유무는 일치하지 않는다. 중국은 1949년 이후부터를 '당대사'라고 부르지만 대만에서는 그런 용어를 쓰지 않고 그냥 '현대사'라고 부르고 있다. 왜 이렇게 다를까? 그 이유와 원인이 무엇일까? 오늘은 여섯 번째 중국읽기의 주제로 이 문제를 간략하게 다뤄보기로 한다.

 

제2차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군에 쫓겨서 1949년 대만으로 건너온 중국국민당은 신해혁명의 사상적 토대였던 손문(孫中山)이 주창한 三民主義(民族, 民權, 民生)를 기본 이념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공화제를 지속 발전시켰다. 같은 시기 중국 본토에서는 중국공산당이 세운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양안관계(兩岸關係, Cross-Strait relations)가 시작되었다. 양안(兩岸)이란 중국과 대만에서 부르는 해협양안의 줄임말이다. 이 명칭의 유래는 자연적인 군사분계선의 역할을 하게 된 대만해협을 두고 서안(대륙)과 동안(대만)으로 마주보는 관계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게 양립된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은 각각의 현대사의 기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화민국은 1911년 10월 10일 중국 湖北省 무창(武昌)에서 일어난 이른바 ‘무한봉기’를 계기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청 왕조가 멸망하고 1912년 중화민국이 건립되었다. 중국국민당은 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봉건군주제를 무너뜨리고 민주공화제의 중화민국을 수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던 신해혁명을 중국현대사가 시작되는 기점으로 삼고 있다.

 

반면,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1919년에 발발한 ‘5·4운동’을 현대사의 기점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중국사학계의 논쟁을 거쳐 모택동의 혁명이론으로 수렴된 결과이다. 먼저 중국사학계의 논쟁을 보면,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학계에서 중국근대사와 중국현대사의 분기점에 관한 논쟁이 시작돼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바 있다.
 
처음 이 문제가 제기된 것은 1954년에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호승(胡繩, 1918~2000)이 『历史研究』 창간호에 『中国近代历史的分期问题(중국근대역사의 분기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이 글에서 호승은 1840~1919년까지를 중국근대사로 정하였는데, 그 후 중국사학계에서는 1840년 아편전쟁에서 1919년 5·4운동까지의 역사를 중국근대사로, 1919년 이후의 역사를 중국현대사로 구분 지었다.

 

이는 구민주주의혁명 시기 역사를 중국근대사로, 모택동이 주창한 신민주주의혁명 시기의 역사를 중국현대사라 부른다. 여기서 구민주주의혁명이란 중국국민당을 부르주아지계급의 정당이며, 노동자와 농민을 배제하고 부르주아지계급이 단독으로 일으킨 신해혁명을 봉건왕조체제였던 청조를 멸한 민주주의혁명이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와 대비시키는 혁명 개념으로 신민주주의혁명이란 1948년 4월에 모택동이 새로 만들어낸 것이다.
 
1948년 4월 1일 모택동은 晉綏간부회의에서 중국공산당 전체 당원들은 반드시 무산계급(즉 프롤레타리아)이 이끄는 인민대중의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반관료자본주의 혁명을 추동하는 총노선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 내용은 구민주주의혁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공산당이 노동자, 농민, 민족부르주아지 자산계급, 지식인 등 4계급이 연합해서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과거 중국사학계에서는 위 시기 구분과 달리 획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즉 중국근대사 전공자로 중국사학계의 저명한 사학자 범문란(范文澜(1893~1969)이 1955년 간행된 『中国近代史』 상권에서 ‘사회성격’에 따라 근현대 역사 시기구분을 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는 1840~1949년까지의 중국은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였기 때문에 중국근대사는 1840~1949년까지의 모든 시기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국근대사와 중국현대사의 분기점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때 "반식민지"와 "반봉건"사회 중의 '반'은 반대한다는 反이 아니라 半이다. 즉 당시 중국은 반쯤 식민지였고 반쯤 봉건국가였다는 인식이다.
 
요컨대 1949년 10월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신해혁명보다 더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1840~1949년까지의 근대 중국 역사는 반식민지 반봉건사회의 역사이고,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의 중국역사는 현 중국이 건설한 사회주의 시대의 역사라는 주장이었다.(‘关于中国近现代史的分期问题’, 新华社(2015년 7월 27일),

 

이러한 시대구분은 상반된 듯이 보여도 범문란 역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새로운 사회주의혁명이 시작되는 시작으로 기점으로 봄에 따라 역사발전의 5단계설과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에 형식은 기본적으로 모택동이 제시한 혁명이론의 해석에 수렴된다. 다만 근대사와 현대사를 나누는 획기의 시기만 다를 뿐이다.
 
모택동의 경우는 마르크스의 이른바 ‘역사발전 5단계설’(원시공산사회▶ 고대 농노제사회▶ 중세 봉건제사회▶ 근대 부르주아지사회▶ 공산주의사회)에 근거해 1911년에 발생한 신해혁명을 역사 발전단계 5단계설의 네 번째 단계에 해당되는 부르주아지혁명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모택동은 이 부르주아지혁명을 역사발전의 최후 단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최후의 단계는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는 것인데, 부르주아지혁명은 공산주의사회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로 보았다.

 

모택동은 신해혁명이 부르주아지 혁명으로서 역사의 역할을 한 것으로 긍정하지만 최종적인 이상 형태의 사회는 아니라고 보고 중국공산당의 출현 배경이 된 1919년의 5·4운동을 현대사의 기점으로 보았다. 그리고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이 부르주아지 계급이자 관료자본주의의 중화민국과 중국국민당을 무너뜨리고 공산주의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1949년을 현대사가 끝난 종결점으로 보는 것이다.
 

이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개시된 1949년 10월 이후부터에 대해서는 당시 모택동과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공산주의혁명이 계속 되고 있지만 최종적인 완성을 하지 못하고 중간 과정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중국이 아직 공산주의혁명을 완성하지 못하고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체제로 가는 과정의 중간쯤 과도기, 즉 이른바 ‘사회주의 과도기’에 있다고 선전해왔다. 그런데 공산주의에 도달하기 위한 사회주의의 중간 과정이 너무 길어지는 게 아닌가? 실제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중국사회에 대해 자체적으로 평가를 내리고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수단, 생산형태, 생산관계 등의 측면에서 여전히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있다고 봤다.

 

그 뒤 1970년대 중후반 모택동 사망 후 사회주의 과도기가 길어지고 생산력의 증강 없이 경제발전의 정체가 지속됐다. 이에 따라 새로운 지도자 등소평이 무사안일의 관료주의 폐단을 일소시키면서 경쟁개념을 인정한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해 생산력을 증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는 그것을 ‘중국 특색이 있는 사회주의’(有中國特色的社會主義)라는 말로 합리화 했다. 우리가 자주 들어서 알고 있는 이 ‘중국 특색이 있는 사회주의’라는 말은 사실상 공산주의혁명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사회주의체제 사이의 어중간한 용어다. 현재의 시진핑 지도부도 이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편, 중국국민당 쪽 사학자들은 정치사상적으로 부르주아지사회의 자유민주주의 공화제를 역사발전의 최종 단계로 보기 때문에 더 이상의 혁명은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논리에 따르면 아편전쟁을 중국근대사의 기점으로 보고 부르주아지신분이 혁명으로 왕조체제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을 근대사의 종결이자 새로운 중국현대사가 시작된 기점으로 보았다. 해협 양안에서는 이러한 획기가 세기가 바뀐 지금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2018. 12. 7. 16:46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