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아시아사

중국근현대 지도자들의 여성편력① : 모택동의 여인들

雲靜, 仰天 2018. 12. 4. 16:08

중국근현대 지도자들의 여성편력① : 모택동의 여인들

 

지금까지 몇 차례 술 얘기만 줄창 해댔는데, 오늘은 비도 오고 하니 색 다르게 현대 중국혁명가, 정치가들의 여인과 얽힌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여성들이 들으면 좀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주당들 사이에는 술이 있으면 여자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농을 주고받는다. 실제로 역사상 권력 있는 남성들의 곁에는 늘 재색을 갖췄거나 범상치 않은 여성들이 그 남성을 부각시킨 역할을 했던 것으로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그건 역사의 한 면만 본 지극히 남성 위주의 시각이자 서술이거나 평가다.

 

사실 인류의 반은 여성이다. 그래서 여자 이야기는 당연한 듯하지만 혁명시에는 혁명가를 혁명가답게 만드는 뭔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레닌의 부인 크루프스카야와 중국혁명의 개창자 손문의 부인 송경령이 그랬다. 또 혁명은 아니지만 국가통치에서 남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여인들도 많다. 장개석의 내조자로 활약한 송미령이 그랬다. 반대로 자기 부인 때문에 골머리를 앓은 지도자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강청의 미모에 동해 덥석 동거를 시작했다가 나중엔 엄청나게 낭패를 본 모택동이 그랬듯이 뭐 그런 예들은 적지 않다.

 

헛소리, 군소리는 좀 접어두고 그냥 본론부터 바로 들어가자. 지난 세기 毛澤東의 여인들이 주제다. 물론 그 전에 현대 중국사에서 벌어졌던 혁명가, 정치가들이 여인과 맺은 전반적인 상황과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중국국민당 계열의 군사가와 정치가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도 몇 명 소개할 것이다

 

중국 현대사에서 국가 지도자급 레벨의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여성편력이 있었다. 뭐 여성편력이 아니더라도 결혼을 두세 번씩 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서너 번, 심지어 너 댓 번씩하거나 그 이상도 한 인물도 있다. 예컨대 신해혁명을 이끌어 중국의 왕조 정치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민주공화제를 연 孫文(中山)도 그랬었고, 중국국민당 주석 겸 국가 총통 蔣介石도 그랬었고, 중국공산당 당수로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모택동도 그랬었다. 제각기 측실을 포함해 부인으로 네 명, 네 명, 네 명을 거쳤다. 우연의 일치 치고는 재밌지 않는가? 국가주석을 지낸 유소기도 결혼을 여섯 번이나 했다.

 

신해혁명 후 초대 중화민국 총통이 된 원세개(袁世凱)는 이들 보다 더 심했다. 그는 조선에 10년간 장기 체류하기 전부터 정실인 본처 외에 여러 첩을 뒀다. 19세기 70~80년대 조선에 있을 때도 그는 중국에 처첩들이 적지 않았음에도 조선 여인을 세 명이나 거느렸다. 이 세 명 중 하나는 양반집 규수였고, 나머지 둘은 그 규슈를 시중드는 시녀들이었다. 이 세 명은 모두 원세개가 귀국할 때 중국으로 데리고 갔다.

 

191666일 원세개는 요독(혹은 홧병설도 있음)으로 죽었는데, 정실과 첩을 합쳐서 배우자가 총 10명이나 있었다. 자식은 대략 처첩 수에 비례하는 법, 게다가 색을 무지하게 밝힌 원세개이다보니 후사도 많이 낳아 무려 32명이나 됐다. 1915~16년 경 원세개의 장자로서 아버지에 이어 총통이 되고자 했던 원극정(袁克定) 외에 원세개가 데리고 간 조선 여인에게서 태어난 아들인 차남 원극문(袁克文)의 후손들이 지금도 중국에 살고 있다. 나중에 자세하게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원극문은 장학량(張學良)과 함께 1920~30년대 중국사교계를 주름 잡은 이른바 4대 '公子'(원래 '지체 높은 집의 아들'이라는 본 뜻 외에 속어로 난봉꾼, 플레이보이를 뜻하기도 함)의 한 사람이었다.

 

1932년부터 1943년까지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주석을 지낸 林森도 숱한 여인들을 아내로 맞았다. 아흔 살이 넘어서도 데리고 있던 10대의 수양딸을 자신의 후실로 맞았는데, 장개석은 이를 축하하는 축사까지 보냈다. 우리 한국인의 일반적인 정서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임삼의 결혼 행각은 기상천외해서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전 중공 주석 강택민도 자기 부인 외에 정부이거나 자주 자기 곁에 둔 여성이 다섯 명이나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그 중에 1~2명은 분명히 정부인 것으로 보인다. 국가지도자급 인물은 아니지만, 민국 시대 국민당군의 사단장급 인물 중에는 부인을 81명이나 둔 자도 있었다.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劉桂堂이라는 토비 출신 군벌이다.

 

중국공산당이나 중국국민당의 지도자급 인물 중에는 비교적여자관계가 깨끗했던 국가지도자들도 없지 않지만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등소평은 어떠냐고? 그는 여성과의 관계가 깨끗해 보여 스캔들 풍문도 전혀 들리지 않았으며, 일부일처로 생을 마감했으니 괜찮지 않느냐고? 그는 지금까지 요행히 여성스캔들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등소평도 여성과의 추문들이 많이 떠돌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찾아봐도 깔끔한 지도자들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겨우 화국봉, 호요방, 조자양, 호금도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이들도 좀 더 자료를 추적하고 연구를 해보면 몰랐던 사실이 드러날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일편단심이었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일부일처였다는 점이다

 

손문은 중국인들과 우리에게 위대한 혁명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사생활은 문제가 적지 않았던 인물이다. 우선 그는 허풍이 너무 셌다. 여기선 자세한 내막을 얘기할 순 없지만 미국인들은 혁명이 성공하면 그 반대급부로 광산 개발 등의 이권을 보장해 줄테니 차관을 제공해주라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당연히 신임도 하지 않았다.

 

 

손중산과 그의 부인 송경령. 위 사진 속 시기는 아마도 손중산이 일본 방문 뒤 천진을 들러 북경을 가려다 지병인 폐암으로 사망한 1925년 3월 12일이전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진에서 손중산의 얼굴엔 병색이 완연해 보인다. 두 사람은 결혼해서 꼭 10년을 살았다. 손문이 죽고난 뒤부터는 국모의 지위도 다 가을날의 뜬 구름(浮雲)이나 다를 바 없었다.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송경령은 모택동에게서 중공의 최고위 원로로 대접을 받았지만 청상과부로 생을 마감했다. 그나마 챙겨주던 모택동이 죽고 난 뒤부터는 송경령은 더욱 외롭게 지냈다. 비록 결혼하려다가 뜻을 접었던 최후의 연인 隋學芳이 있었지만 송경령은 아마도 권력 보다는 부부가 끝까지 해로하는 인생이 더 행복한 삶이라는 점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결혼 전후의 송경령. 집안이나 교양의 정도에서나 품격이 엿보인다. 송경령의 만년 사진을 보면 얼굴에 하악의 각이 진 사진들이 많아서인지 대단한 미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젊은 시절엔 선이 고운 계란형 얼굴을 가진 가녀린 이미지에다 내면의 덕을 겸비한 아름다운 여인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손문이 일생동안 이것 외에 다른 것엔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세 가지가 있었는데 여자, 독서, 혁명 순으로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즉 여자를 제일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도 4번이나 하는 등 평범하지 않았다그 가운데 최후의 배우자는 손문과 보통의 일반적인 사이가 아니어서 당시에도 말이 많은 결혼이었다. 그가 나이 50이 다 되어서 재혼한 송경령(宋慶齡)은 자신의 친구이자 정치적 후원자인 남양의 대재벌 宋嘉樹(찰리 쏭)의 딸이었다. 송경령은 타자를 쳐주거나 사무를 맡아본 손문의 개인비서였다. 손문이 월급도 제때 주지 못 했는데도 끝까지 붙어 있었던 거 보면 송경령 역시 스무 살도 더 차이가 난 아버지뻘 되는 손문이 싫진 않았던 모양이야... 물론 처음에는 혁명가에 대한 존경심으로부터 시작된 거지만 말이야.

 

송가수는 갑작스런 이 결혼에 당연하지만 결사코 반대했고, 두 사람은 그래도 결혼을 하자 송가수는 손문과 의절했다. 어떤 부모라도 이 결혼은 말렸을 것이다. 어느 부모가 자기 친구이자 스물 두 살의 둘째 딸 송경령(1893년생)보다 27살이나 많은 데다 그것도 유부남에게 귀한 딸을 주겠다고 하겠는가! 결혼할 1915년 당시 손문은 1866년생으로 49세였는데, 1885년에 결혼한 노모정(盧慕貞, 1915년 이혼)이라는 부인이 있었지만 송경령과의 결혼으로 이혼했다. 그전에 잠시 3~4년 정도 같이 살았던 둘째 부인 대월훈(大月薰, 1903년 결혼 1906년 이혼)이 있었다. 이외에 손문에게는 첩으로 陳粹芬이라는 여인이 있었으며, 해외의 연인으로는 일본인 아사다 하루(淺田春)가 있었다.

 

아무튼 허풍과 구라에다 플레이보이 기질이 다분했던 손문이라는 이 인물에 대해서는 나중에 소상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손문을 논외로 중국현대사를 이해한다는 건 가장의 존재를 제외하고 한 가정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나, 조지 워싱턴을 빼고 미국역사를 알고자 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송경령은 남편 손문이 타계하고 난 뒤 1927~28년 경 젊은 미망인이 돼 독일에 체류했을 때는 젊은 중공 당원 등연달(鄧演達)과 '썸씽'이 좀 있기도 했었다. 나중에 그는 제부인 장개석을 따라가지 않고 중국공산당을 택했는데, 추앙되던 국부 손중산의 부인이 당연히 갈 줄 알았던 국민당 편으로 가지 않고 중공을 택해준 것이 인민들에게는 중공의 이념적 승리로 인식되고 해서 그 공이 작지 않아서194910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국가 부주석으로 추대됐다.

 

송경령은 평생을 독신으로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는 소문과 달리 송경령에게는 만년에 결혼까지 할 뻔했던 남자가 있었다. 자신을 호위하던 경위대장이었다. 그 경위대장은 隋學芳이라는 젊은 중년이었는데, 매일 같이 그의 보호를 받고 하다 보니 믿음이 가고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송경령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그에게 털어놓고 상의하곤 했다. 이 과정에서 연정이 싹터 송경령이 먼저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자주 보면 정이 든다니깐! 더군다나 32살이라는 한창 나이에 사별하고 한 두 번의 외도를 제외하곤 쭉 홀로 살았으니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송경령은 연하의 隋學芳과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중공 지도부에 알렸지만 중공 지도부는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모택동은 결혼을 동의했지만, 주은래가 끝까지 반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송경령은 국모이기 때문에 만일 隋學芳과 혼인을 하게 되면 바깥 세상에 더 이상 국모로서 인민들을 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개인의 삶 보다 중공이라는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했던 셈이다. 결국 두 사람은 혼인을 하지 못하고 동거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것이다. 隋學芳은 평소 해오던 대로 계속 경위대장이자 사실혼의 남편으로서 송경령이 198152990세로 사망할 때까지 곁을 지켰다.

 

송경령은 죽기 전 유언으로 손문의 묘소에 같이 안장하지 말고 부모님 묘소에 같이 묻어 달라고 했다. 끝까지 수절을 지키지 못해 국모의 자격을 잃어버렸다고 자책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는 죽어서 국모라는 영광을 누리기보다는 살아서 근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의 오랜 고독을 해소해주는 살아생전의 말벗과 위안을 택한 셈이다.

 

장개석은 알다시피 손문의 정치적 제자로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에게 패해 대만으로 쫓겨난 20세기 중국 현대사상 최대, 최고의 문제 인물이었다. 그는 대만에 건너가서 초기 짧은 기간만 빼고선 종신 동안 중화민국의 총통을 지낸 독재자이기도 했다. 그가 절강성 고향 奉化에서 부모가 짝지어 준 마누라뿐만 아니라 나머지 두 부인을 모두 버리고 송미령과 결혼한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얘기다. 1927년 그의 나이 마흔 살 때였다.

 

이때까지 장개석은 모복매(毛福梅 1901년 결혼~1927년 이혼), 요야성(姚冶誠 1911년 결혼~1927년 이혼), 진계여(陳潔如 1921년 결혼~1927년 이혼)와 부부로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송미령과 혼인한 1927년부터는 법적으로 이 세 여인을 한꺼번에 청산해버렸다. 당시 중국법으론 재혼을 하게 되면 반드시 일간지에다가 자기 부인과 이혼한다고 공고를 냈어야 했는데 사전에 이런 수속도 다 마쳤다. 암튼 대단한 놈이야!

 

장개석이 1887년생이었으니 1898년생이었던 송미령(宋美齡) 보다는 11세가 많았다. 장개석이 노린 것은 처가가 지닌 재력도 재력이었지만 처 송미령의 언니로서 손문의 미망인이 된 처형 송경령의 후광을 입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송미령은 손문의 부인 송경령의 동생이었다. 송애령(宋靄齡), 송경령, 송미령 세 자매는 그야말로 유력한 대재벌의 딸들로서 미모도 뛰어났지만 다들 고등교육 이상을 마친 인텔리들이었다. 특히 막내 미령은 그중에서도 인물이 가장 돋보였고, 미국에 유학(동부의 명문인 웨슬리 여자대학 졸업)까지 했기 때문에 영어도 잘 해서 나중에 남편 장개석의 통역역할도 했다.

 

 

장개석은 송미령을 보고는 첫눈에 뿅 갔다. 장개석의 끈질긴 구애에도 송미령은 나이 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이 사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중에 송미령은 큰언니 송애령의 설득에 넘어가 결혼을 승낙했다. 결혼을 한 1927년엔 장개석은 벌써 군권을 장악한 전국적인 거물 정치인이 돼 있었다. 송미령이 자기 보다 나이가 11세나 많은 장개석을 받아 들인 것은 장개석이 지닌 권력의 위광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먼저 상해에서 서양식으로 혼례식을 올리고 나중에 또 한 차례 중국 전통 방식으로 혼례식을 올렸다.
장개석과 송미령의 노후 한 때. 1887 년생인 장개석은 향년 88세로 최대의 정적 모택동 보다 1 년 앞서 1975 년 4 월 5 일에 사망했다. 그는 83세로 생을 마감한 모택동 보다 더 오래 산 편이다. 장개석 사망 후 송미령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으로 떠났다. 그는 장개석 서거 후 중국국민당 당수직을 물려 받아 평생 장개석의 품 안에서 자문만 하던 정치에 실제로 뛰어들 생각도 있었지만 국민당 내 반발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하자 떠밀리다시피 해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송미령은 10년간 미국에서 살다가 1986년 장개석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대만으로 귀국해 잠시 타이페이에서 살다가 1991년 장기요양을 위하여 재차 미국에 가서 살았다. 그는 평소 양생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써서 그랬는지 106세까지 살다가 2003년 10월 24일 뉴욕에서 사망했다 .

 

모택동도 손문과 장개석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여성편력이 화려했다. 어찌 보면 그는 장개석과 중국대륙의 패권을 두고 건곤일척 한 판의 내전을 치렀지만, 그 과정에서 여성경쟁도 벌인 셈이다. 물론 동일한 인물을 두고 쟁탈전을 벌인 것은 아니었지만... 장개석이 줄기차게 "들이 댔던" 송미령의 경우는 그 전에 동북지역의 군벌 2세로 중국 사교계의 귀공자이자 제비였던 장학량(張學良)과 서로 사귀기도 해서 장개석과는 좀 복잡하고 미묘한 인연이다. 아마도 장개석이 송미령과 정치적으로 정략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송미령은 장학량과 결혼 했을 가능성이 컸다.

 

19361212일 장학량이 장개석을 체포 감금한 서안사변 때 송미령이 한달음에 달려가 장학량을 만나 자기 남편을 석방해주라고 호소했다. 과거 한 때 연인 사이였던 장학량이 송미령의 이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 호소에 장학량은 상당 부분 마음이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년 12월 25일 장개석은 구금상태에서 석방돼 나온 뒤 장학량에게 국가원수를 무단으로 체포 구금한 국가모반죄를 묻지 않고 풀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장학량은 장개석을 따라 제 발로 남경까지 왔고, 빗발친 측근들의 건의에 못이겨(혹은 장개석 자신도 장학량을 처단할 의사가 있었는진 알 수 없지만)  장개석은 장학량을 처형하려고 했으나 송미령이 남편에게 강력하게 간청해서 살아났다. 한 번씩 신세를 입고, 신세를 같은 셈이다.

 

송미령은 임종 전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두 가지 미안한 일이 있었다고 했는데, 하나는 장학량에게 미안하고, 다른 한 가지는 장개석의 뒤를 잇는 장씨 집안의 후사를 낳아주지 못한 일이 미안하다고 했다. 장학량에게 미안하다고 한 것은 아마도 젊은 날 사이 좋게 지내던 그의 구애를 외면하고 장개석과 결혼한 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다.

 

 

누가 '뽀샵'을 한 사진이긴 한데, 1923년 4월부터 시작되는 두 번째 상해 체류 시대 때의 모택동. 이목구비가 균형이 잡혔다. 수년 전 자살한 홍콩 배우 장국영과 많이 닮았다. 이마가 넓어 시원한 쾌남아의 느낌을 준다. 나 보다는 열 배는 잘 생겨 보이는데, 그래서 여인들이 많이 따랐을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빼갈 한 잔 받아 줄테니 조금만 더 하자고? 그래 그렇다면 조금만 더 하지 뭐~ 원래 제목대로 모택동의 여인들 이야기 중 도입부까지만 하꾸마.  

 

모택동도 손문과 장개석처럼 여러 여인들을 섭렵했지만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말로가 좋지 않았다. 장개석이 송미령을 얻어 정치에서 권력을 잡는 등 출세가도를 달리는데 도움이 됐지만, 모택동은 江靑이라는, 어떤 말로도 설명이 잘 되지 않는 희대의 불가사의한 여인을 얻어 말년이 좋지 않았다. 모택동과 강청은 초기 한 때까지는 다정한 관계로 지냈지만 나중에 모택동 자신이 발동한 문화대혁명 시기에 이르러서는 권력욕에 눈이 뒤집힌 강청 때문에 둘 사이의 불화는 말할 것도 없고 골머리를 앓았다. 한 마디로 그는 최악의 악몽을 만난 셈이었다.

 

모택동이 정식으로 혼인한 여인은 4명뿐(?)이었다. 하지만 짧든 길든 같이 동거를 하거나 사귀고 성관계를 맺은 여자까지 다 합치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총 15명이다. 이들 외에도 더 있을 수 있다. 모택동은 도대체 일생 동안 몇 명의 여자를 건드렸을까? 조사해보는 데까지 해보자. 15명의 여인들만으로도 그는 중국 전체를 손아귀에 넣은 최고의 권력자였지만 여성 편력이라는 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 중국 최고였음을 입증한다.

 

이러한 모택동의 능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일단 모택동 역시 손문과 장개석만큼 혁명이나 전쟁에 출중한 능력을 보여 그런 분야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근데, 한 가지!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모택동의 사상이 대단한 것처럼 알려져 있거나 혹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대단히 뛰어난 사상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 내가 그의 모든 典籍을 통해 사상이나 철학을 뜯어본 결과 좀 유치하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어. 이 점에 대해선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면 자세히 설을 풀 때가 있겠지.

 

하여튼 그도 여자를 다루는 데에는 대단한 능력이 있었지 뭐냐. 뭐랄까 평소 여성을 대할 때 나타나는 열정이 혁명이나 전쟁수행으로 전화되었을 때 엄청난 파워로 나타난 거겠지.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어. 어쩌면 모택동은 여자를 다룰 때도 혁명이나 전쟁처럼 전략적으로 다루었을지도 몰라.

 

아무튼 이 인간도 4번이나 배우자를 맞이했다.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정식으로 결혼 한 것은 첫 번째 여인뿐이었다고 해. 결혼은 안 했지만 옆에 두고 사귀었던 여자까지 합치면 도합 열다섯 명이나 됐다. 솔직히 말혀봐! 부럽다고? 뭐 그 여성들의 모택동에게 배반을 당하거나 혹은 새로 발탁돼 있던 남편과도 생이별 한 가슴 아픈 사연을 알면 솔직히 조금도 부럽지 않아. 우선 정식으로 결혼한 여자들부터 보자. 첫 배우자는 고향 호남성 상담현의 富農이었던 자기 아버지 毛順生이 무조건 찍어줘서 얼굴도 보지 않고 190816세 때 장가 든 씨 성(李씨라는 설도 있음)을 가진 여인이었다. 두 번째 부인은 양개혜(楊開慧), 세 번째는 하자진(賀子珍), 네 번째 부인이 강청(江靑)이었다.

 

다음번에 이 여인들을 포함해 그의 손을 거쳐 간 많은 여성들을 하나하나씩 소개하겠지만 오늘은 우선 맨 마지막 여인 강청에 대해서만 조금 언급해놓자. 뭐 중국사를 잘 몰라도 문화대혁명시 4인방의 한 사람으로 국가 권력을 좌지우지했다가 결국 나중에 등소평 세력에게 체포돼 옥살이 하다가 자살하게 되는 강청 정도는 대충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강청은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인 섬서성 延安으로 모택동을 찾아가기 전에 상해에서 연극배우로 놀아먹어서 그런지 인물 하나만큼은 모택동이 반했을 정도로 뛰어났지! 성깔은 디게 지럴 같았지만...

 

그래서 연안으로 찾아온 강청이 모택동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는데, 모택동이 그만 미모에 넘어가서 그와 결혼하자고 했을 때 중공 당내 정치국 요원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간부들이 이 결혼을 반대했잖아. 당시는 정치국 위원이 결혼을 할 경우 사전에 여타 정치국 위원의 심의를 거쳐 그들의 승인이 떨어져야 가능했던 시절이었어. 그럼에도 모택동이 당의 반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고집을 피워 결혼을 강행한 결과는 아시다시피 나중에 중국을 완전히 망쳐 놓은 거지.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결혼은 진짜 생각 좀 해봐야 혀.

 

모택동은 일생동안 남들과 다른 희한하고 특이한 면이 몇 가지 있었는데, 평생을 이를 딱지 않고 지낸 것도 그 중의 하나였어. 입 냄새가 진동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니? 그런데도 구취가 독하건 말건 1950년대 이후부터는 그의 품에 한 번 안겨 보고자 한 젊은 여성들이 줄을 섰다네. 모택동은 1950년대 중반부터는 거의 매일 저녁 중국공산당 고위 간부들끼리 모여 사교춤을 추는 무도회를 부활시켰는데, 여기에 동원된 젊은 여성들이 하룻밤 연애의 대상이었다. 무도회는 과거 1940년대 연안시절 거의 매일이다시피 저녁 저녁마다 열었다가 고위 간부들의 기강이 무너진다는 이유로 자기가 금지시켰던 것이었어.

 

 

중공의 고위급 간부들은 전쟁 중에도 기념 사진을 많이들 찍었는데, 모택동의 각종 사진도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그가 사교춤을 추는 장면을 찍은 사진은 흔치 않다. 위 사진은 1957년 북경에서 소련 기자가 모택동이 춤을 추는 장면을 포착해 찍은 것이다. 왼쪽 사진의 여성은 복장을 보니 소수민족이었던 모양이다. 특이한 건 모택동이 뒤쪽의 군중을 의식해서인지 파트너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춤을 추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당 최고위 간부들끼리들만 모인 中南海(원래는 북경 자금성 뒤편에 있는 호수를 가리키지만, 그 안쪽에 중국 공산당 당사를 비롯해 정부기관들과 모택동의 처소가 밀집해 있는 곳)의 파티에서 질펀하게 춤을 추던 것과는 영 다른 모습이다.
모택동은 평생 헤아릴 수 없는 여성들과 댄스를 즐겼는데, 그 파트너는 모두 한 인물 하는 여성들이었고, 그 중에서도 인물이 뛰어난 베스트는 6명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댄스 파트너 중 가장 인물이 예뻤다고 하는 이는 吳莉莉라는 여성이다. 위 사진 속 가냘픈 몸매의 이 젊은 여인은 얼굴을 보니 1930년대 연안 시절 미국인 여성 저널리스트 스메들리의 모택동 취재시 영어통역이었던 吳廣慧인 거 같다. 복장을 보면 한 눈에 홍군 전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여인들에 대해선 나중에 소개할 생각이다. 허리가 잘룩하고 몸매가 가냘픈 계란형 얼굴의 미인인데, 모택동의 여성 취향을 감지할 수 있다. 얼굴과 몸매가 퉁퉁하고 복스런 스타일의 당나라 시대 미인보다는 중국 역대 4대 미인으로 꼽히는 춘추시대 월나라의 西施 같은 호리호리한 여성을 좋아했던 게 아닌가 싶다.

      

모택동은 무도회에서 춤을 추다가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으면 바로 자기 침실로 데리고 갔고, 관계를 끝낸 후에는 반드시 시계 등 예물을 선사했다. 이 시계를 받은 젊은 여성들은 보란 듯이 남들에게 자랑삼아 주석에게서 받은 시계라고 차고 다니곤 했다. 당시 이런 시계를 차고 다닌 여성들이 몇 명이었을지 내가 다 헤아려 보진 않았지만 아마 족히 두 자리 수는 됐을 거야. 전통 왕조시대였다면 皇恩을 입은 것이나 다름없지 뭐~

 

비도 추적추적 내려서 해장술도 당기는데다 다른 할 일도 있으니까 오늘은 요기까지만 하지 뭐~ 다음 번엔 모택동의 성격적 특징과 그의 여인들에 대해 한 명 한 명씩 알아볼 것이다. 

 

2018. 12. 4. 11:41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