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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의 여인들 ② :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권력과 미녀!

雲靜, 仰天 2018. 12. 5. 15:10

모택동의 여인들 ② :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권력과 미녀!

 

모택동은 왜 여자들을 그렇게 밝혔을까? 타고난 밝힘증이나 혹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늘 남성 정적들에 둘러쌓여 있어 일시적이나마 골치 아픈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모택동의 성정이나 그를 둘러싼 중국 내 정치상황과의 관련성을 규명하다보면 원인이 무엇인지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모택동은 결코 타고난 겸손한 자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자대감이 보통이 아니었지. 또 기존의 권위나 부당한 것에 대한 반발의식과 도전의식이 강했던 사람이기도 했고. 나중에 혁명에 성공하고 국가를 세운 뒤 중공 당 내외에서 1인 독재의 절대 권력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한 전후 시점부터는 자신감과 기고만장이 넘쳐 우월의식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대략 한국전쟁이 끝나고 자신이 당내 반대를 무릅쓰고 참전해 미국을 물리쳤다고 으스대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모택동이 중국의 수천 년간 역대 모든 황제와 장상을 손 아래로 우습게 본 것만 봐도 바로 알 수 있는 일이다. 옛날 황우가 진시황을 부러워하고 높이 평가했지만 모택동은 전혀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했어. 모택동은 진시황을 역대 황제들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보고 그에게서 배울 건 배우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진시황을 자기보다 한수 아래로 보고 무시했다. 모택동은 황후장상들의 학식이 자기보다 못하다고 했다. 그들이 세운 功業(공과 업적)도 자기보다 못하다고 서슴없이 얘기했지. 자기는 역대 어느 제왕보다 더 강하고 위대하다고 했으니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고 할만 하지 않나?

 

진시황이 머시냐? 그는 단지 460명의 선비(儒者)들을 땅에다 묻었지만, 우리는 46,000명의 선비를 땅에 묻었다. 우리는 반대자들을 진압하지만, 아직 어떤 반혁명적 지식분자들을 죽이지 않고 있지 않느냐? 우리는 민주인사와 논쟁을 벌였다. 당신들은 우리가 진시황이라고 욕한다. 아니야, 우리는 진시황을 백배는 넘어서 있어. 우리가 진시황이고, 독재자라고 욕한다. 우리는 일관되게 인정한다. 아쉬운 게 너희들이 말하는 게 부족해서 왕왕 우리에게 보충을 해주라는 것을 말이다. 하하하

 

 

 

모택동이 자신을 제외하고 5천년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한 진시황의 상상도. 우리에게는 분서갱유의 문자옥, 중구난방이던 중국 각지의 도량형을 통일하고 대제국의 판도를 개척한 미친 황제로 알려져 있지만, 모택동이 그를 높이 추켜세운 것은 이른바 천하를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 20세기에 중국을 재통일하고자 한 모택동 자신을 정당화시켜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모택동이 이 말을 한 게 19585월 중공 제8차 대회 제2차 회의에서였으니 당시 배경을 보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이때는 그가 공산주의 이념을 빨리 달성하기 위해서 한창 대약진운동과 반우파투쟁을 밀어붙이고 당내에서도 자신의 정책과 노선에 반대하는 반대자들을 색출해 제압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모택동은 당내에서나 민주당파들을 비롯한 당 바깥의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경고하면서 한껏 비꼰 것이다.

 

건국 전에도 모택동은 반세기 동안 혁명의 전과정 중 수많은 권력투쟁을 치루기도 하고 겪었다. 그는 장개석 같은 중공 당외 집권당의 국가 지도적 정적들뿐만 아니라 같은 중국공산당 내에서도 수많은 적수와 싸워 이겼다. 내가 아는 한 모택동만큼 권력투쟁에서 끝까지 살아남고 권력투쟁에서의 승률이 높은 인물도 없다. 그런데 권력투쟁에서 승률이 높았다는 것은 곧 원한이 있거나 그를 싫어한 정적들이 많았다는 의미다.

 

정적들이 모택동을 대할 때도 그랬지만 모택동도 사람을 아무나 좋아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요즘 말로 많이 까칠한 인간이었다네. 자기를 경호하거나 일상사에서의 일들을 수발들던 측근 비서들에게도 내부 돌아가는 정보를 캐려고 촉각을 곤두세웠으니까. 그는 스스로 자기에게는 마음 터놓고 만나 흉금 없이 얘길 나눌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봤다. 주은래 정도는 믿을 순 있다고 본 듯하지만 그건 정치적인 업무의 경우에 한했을 뿐 평상시 일상적인 대화는 거의 없었지.

 

아래 하급관리들에겐 어땠을까? 어슷비슷했어. 만나는 부하들 마다 뻑하면 뭐 새로운 거 없어?”라고 물어 답하기 곤란하게 만들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첫마디를 곤란한 질문이나 말을 해 상대를 난처하거나 당황하게 만드는 이런 화법을 커뮤니케이션학의 전문용어로는 ‘DRT이라고 불러. 그는 1960년대 후반 중미수교 문제로 극비리에 북경 자신의 처소로 자신을 찾아온 키신저나 닉슨에게도 평소 습관처럼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거나 곤란한 질문을 내뱉어 그들을 난감하게 만든 것을 보면 이 화법에 고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보다 훨씬 전인 194912, 모스크바를 방문한 모택동이 크레믈린궁에서 열린 환영만찬 중 옆 자리에 앉은 스탈린과 나눈 대화에서 스탈린에게 중소 쌍방 간 협상을 거쳐 뭘 만들든 간에 이것은 보기 좋은 것이어야 하고 또 맛있어야 할 것이라면서 무슨 영문인지도 모를 말을 스스럼없이 하곤 했으니 그게 그의 화법이었어.

 

모택동이 중공 당내 고위층들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잠시 들여다보자. 이것은 그가 여인을 밝혔다는 점과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는 남자를 믿지 못하는, 마음 속에 어떤 막힌 것을 여자를 만나 해소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것은 그가 자기 모친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다. 나중에 언급할 때가 있겠지만 모택동은 자랄 적에 아버지에겐 상당한 반감을 가졌지만 어머니에게는 잘 따르고 좋아했다. 그의 모친 文七妹도 모택동에게 영향을 미친 여인 가운데 큰 부분을 차지한 인물이다. 모택동이 그의 모친에게서 받은 영향은 곧 얘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모택동 3형제와 그의 모친 文七妹. 맨 죄측이 막내 毛澤覃, 그 다음이 둘째 毛澤民이고, 맨 오른쪽이 모택동이다. 이 가족 사진은 그가 그 전해 1918년 25세의 나이로 견문을 넓히기 위해 북경으로 갔다가 이듬해 봄 다시 장사로 돌아와 병환 중에 있던 모친을 모시고 기념으로 찍은 것이었다. 이것은 문칠매가 처음으로 찍은 사진이자 최후의 사진이었다. 모택동이 본격적인 혁명운동에 뛰어든 것은 북경에서 상해로 건너온 뒤 중국공산당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한 1921년부터였다. 

 

 

 

 

모택동이 중공 당내 인물 중에 엄청나게 미워한 이는 王明張國燾였다. 일찍이 소련에서 유학하면서 친소파 인물이 돼 귀국한 王明1920년대 중공이 막 결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스탈린의 총애를 등에 업고 모택동 알기를 우습게 안 자였으니 당연했다. 왕명은 결국 나중에 당 권력을 장악한 모택동에게 밀려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그곳에서 죽었는데, 그것도 모택동의 증오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지 않갔어! 張國燾중공 창당멤버 중의 한 사람이었던 데다 1930년대 중반 대장정 도중에 노선이 달라 중공에서 찢어져 나가 국민당으로 전향한 배신자였으니 더 말할 게 없어.

 

모택동이 경멸한 이는 李立三瞿秋白이었다. 이들 역시 1920년대 중공 창당 초기 중공총서기를 맡아 소련의 지시대로 움직이면서 모택동이라는 존재조차 몰랐는 데다 나중에 권력투쟁에서 타도의 대상이었으니 이들이 모택동의 마음에 들 리 없었다. 특히 노동자 출신으로 중공 당서기까지 올라선 이입삼은 1920년대에 모택동이 그의 부인을 범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모택동이 아주 천박하게 본 이는 張聞天秦邦憲이었다. 어이구~ 야들이야 1940년대 연안 시절 중공 정치국 위원으로서 최고 지도부의 일원이었지만 스탈린과 가까웠던 애들이었으니 모택동이 살갑게 대할 리가 만무했다. 장문천은 왕명과 함께 스탈린 키즈라고 볼 수 있는, 중국내 소련파 “21명의 볼셰비키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그런데다 모택동이 보기에 그는 마르크스이론 나부랭이만 알지 중국의 현실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면서 떠든다고 봤으니 그럴만도 했다.

 

모택동이 어려워 한 이는 彭德懷劉少奇였다. 이 둘은 정말 모택동이 굉장히 어려워 한 몇 안 되는 동지이자 정적이었다. 팽덕회와는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모택동이 임표더러 한국전쟁에 나가 총 지휘하라고 했지만 병을 핑계로 고사하자 그를 대신해 한국전쟁에 참전해 모택동의 신임을 얻은 뒤로는 신뢰관계가 더욱 돈독했다. 그러나 나중에 팽덕회는 1950년대 중반 이후로 넘어가면서부터 국방개혁노선을 두고 모택동에게 모의 실책까지 포함해 충언, 고언을 한 것이 못마땅해 괘씸죄에 걸린다.

 

결국 팽덕회도 나중에 소련에 대항하고 관료주의 타파와 생산성 제고를 위해 혁명지속을 강조한 모택동의 노선이 수십만의 인민들이 굶어죽는 등 엄청난 문제들을 일으키자 등소평과 함께 이의를 제기하면서 모택동이 가진 국가주석 자리를 차지한 유소기와 마찬가지로 모택동의 눈 밖에 벗어나게 돼 홍위병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해 모멸감과 분노와 비애 속에 죽어간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나중에 팽덕회와 유소기가 모택동과 홍위병들에게 박해 받는 얘길 하게 되면 정말 끔찍하기도 하고 측은한 느낌이 들 걸세.

  

모택동이 협력도 많이 했지만 권력투쟁도 적지 않게 한 朱德은 용인했다. 이 양반은 원래 국민당군 대령~준장급 정도의 지휘관이었는데, 아편도 먹고 자포자기식의 삶을 살다가 나중에 중공으로 전향해서 바른 삶(?)을 산 중국 홍군의 백전노장이었지. 1920~30년대에 이르는 동안 모택동과 함께 정강산에서 홍군을 지휘해 국민당군을 괴롭혔어. 그 때문에 국민당군 병사들은 朱毛’(즉  朱德과 毛澤東)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는 과장 섞인 소문도 떠돌았었다. 주덕은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으로서 나이도 모택동 보다 8년이나 많았다. 모택동과는 권력투쟁을 한 거 보다는 협력을 더 많이 한 사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자는 모택동이 죽은 해인 1976년에 모택동 보다 약 두 달 일찍(76) 사망해 황천길도 같은 해에 갔어.

 

모택동이 자신에게 충성하는 걸 보고 감복하면서도 인간적으로 대해주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지도 못했던 이는 周恩來였다. 원래 1935년 준의회의 때까지만 해도 주은래는 모택동 보다 직위가 높은 상관이었다. 이 회의 때 주은래는 중공 내에서 후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붙었는데 모택동의 노선을 지지함에 따라 홍군의 장정(즉 후퇴) 노선이 모택동의 의견대로 결정됐고, 이로 인해 모택동이 당, , 정의 3권을 장악하게 됐지. 그로부터 주은래는 죽을 때까지 모택동을 상전으로 극진히 모시게 돼. , 참 주은래도 모택동과 같은 해에 죽어, 197618일이었지. 그럼에도 모택동은 주은래에게 평생 동안 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사무적으로만 대했을 뿐이야

 

모택동은 심지어 자신의 주치의로서 매일 지근거리에서 그의 건강과 안전을 돌보던 李志綏도 안 믿었어. 그렇게 자주 매일 같이 얘기를 나누던 사이였음에도 말이여. 나중에 이지수는 중국을 탈출해 미국에서 반모택동 선전운동에 참여하다가 원인 모를 암살을 당하지. 이걸 보면 중국이 아니라고 해서 중국지도자들을 함부로 험담하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점을 알 수 있지. ?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내 책에서 모택동이 중공 창당 멤버라고 거짓말하는 것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조목조목 비판했어. 당시 혁명 노선에서도 모택동의 지나친 주관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었지. 그런데도 나는 지금까지 무사 혀~ 왜냐고? 나도 잘은 모르겠다만 나 같은 무지랭이를 어찌 해봐야 득 될 게 뭐 있간디?

 

그럼 모택동이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사이자 추동자 鄧小平은 어떻게 봤을까? 모택동은 자기가 살아 있었을 적에 등소평 따위는 아예 어린애로 봤다. 모택동이 동소평을 멀리 농촌으로 두 번씩이나 하방을 보냈던 건 어느 정도 의도한 것이라고 해도 나이가 11살이나 차이가 났던 데다 아직 국가를 맡기기엔 멀었다고 봤기 때문이지. 북경시장을 지내고 나중에 1980년대 이후부터는 당 원로가 되면서 원로랍시고 등소평의 개혁노선에 반기를 들기도 한 彭眞도 마찬가지였어. 모택동은 그들을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부릴(捅倒) 수 있는 소인물로 봤다고 혀.

 

모택동이 비교적 마음에 들어 한 이는 陳毅였다. 진의는 글도 좀 알고, 시도 쓰는 등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간의 향기를 풍긴 인물이어서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얘기가 된다 싶었던 거지. 중공 고위 간부들 중에 자기보다 먼저 죽은 이들도 적지 않았고, 모택동은 아무도 장례식에 참석한 이가 없었지만 장례식에 문상을 간 유일한 사람이 진의였다네.

 

 

 

중국 10대 원수 중의 한 사람으로 모택동의 총애를 받았던 陳毅. 두 어깨의 견장에 붙어 있는 큰 별이 원수계급이다. 10대 원수 제도는 원래 홍군에는 없던 것이다. 계급 없이 평등을 지향해 직책만 있었다. 그러다가 소련의 제도를 본 따 1955년에 만든 것이다. 나중에 없애버려 오늘날 이 제도는 없다. 참고로 당시 10명의 원수는  朱德, 彭德懷, 林彪, 劉伯承, 賀龍, 陳毅, 羅榮桓, 徐向前, 聶榮臻, 葉劍英이었다. 이 10명은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이다. 이 중엔 팽덕회처럼 태산 같이 우직한 충신이 있었는가 하면, 정말이지 스탈린이 천재성에 탄복을 한 나머지 모택동에게 그를 잠시 빌려 줄 수 없냐고 요청을 했을 정도의 천재형 책사인 임표도 있었고, 하룡처럼 일자 무식꾼도 있었다. 엽검영은 훗날 모택동 사후 등소평이 하방에서 복권해 당권과 국가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4인방을 체포하는 등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가운데 호방한 성격의 진의는 선비형의 무인이자 혁명가였다. 

 

 

 

 

 

이러한 혁명전우나 부하들 중 남녀를 통틀어 사망 얼마 전의 말년에는 모택동이 가장 신뢰했던 이는 張毓鳳이었다. 장육봉의 이름은 玉鳳으로 불리기로 하는데, 젊은 여성 비서로서 모택동을 최후까지 부모 모시듯이 온 정성을 들여 캐어를 했으니 마음에 들어 하고 믿을 만했겠지. 1945년 해방둥이였으니 나이도 30대 초반이었던 데다 상냥하고 피부도 곱고 예쁘기까지 했으니 포악하고 변덕이 죽 끊듯 하던 본처 강청에게 넌더리가 난 모택동이 좋아했을 만했지 머~

  

끝으로 한 명만 더 물어보자. 자신의 마지막 부인 강청은 어땠을까? 모택동이 가장 혐오하고 싫어했던 이가 바로 강청이었어. 이 여인에 대해선 나중에 천천히 두고두고 거론하게 될 터이니 여기 서론 부분에선 더 긴 말은 하지 말자 응. 그러면 도대체 모택동이 가장 좋아했던 이는 누구였을까? 모택동이 가장 좋아 했던 이는 장옥봉 외에는 없었을까? 만일 있었다면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한 마디로 모택동이 가장 좋아한 것은 그 누구라기보다 권력미녀였어! 이 점은 손중산, 장개석과 일치했다. 과연 영웅은 호색이라는 말이 맞는 말일까? 대충 진시황, 주원장, 히틀러를 보면 맞는 말인 거 같은데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나봐. 이순신 장군의 경우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에겐 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색을 밝히진 않은 듯해서 하는 얘기다.

 

다음 장부터는 모택동의 손을 거쳐 간 여인들을 하나하나씩 소개할 걸세. 이 글에서는 거론되지 않았지만 사귀었거나 동거한 여인들을 포함해 두 자리 수 이상의 여인들이 다 망라될 것이다. 두 자리 수의 여인들에는 하룻밤 성관계만 맺고 끝난 여자도 있다. 그 중에서도 장육봉과 강청은 여러 번 다시 거론될 거야    

 

2018. 12. 5, 15:05

북한산 淸勝齊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