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주의와 자국민 안전이 상충할 땐 후자가 우선돼야 한다!
외국인에게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제주도로 들어온 예멘인 500여명을 난민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거부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연일 논란이 뜨겁다. 세대, 성별, 지역에 따라 조금씩 편차를 보이긴 하지만 크게 찬반양론으로 갈리고 있다.
인도주의 측면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그들은 난민이 아닌데다 이슬람교도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받아들였을 경우엔 성폭행 등 각종 사회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으니 입국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는 반대여론도 강하다. 그들이 실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미 세계적으로 그러한 범죄적 이미지가 확산돼 있어 한국민들, 특히 제주도민이 느끼는 심리적인 불안은 상당한 수준에 달해 있다.
난민 지위 부여 및 입국에 대한 찬반양론의 주장이 각기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난민국으로서 인도주의적 의무를 행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위험과 국민의 안전, 생명 및 재산에 직결되는 이익이 서로 충돌할 때는 자국민 보호와 안전이 우선돼야 한다. 제주도의 예멘인들이 한국민의 안전, 생명 및 재산을 해할 소지가 있다고 단정은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목하 우리 보다 인권을 훨씬 중요시하는 유럽 국가들이 이슬람교도들을 입국시켜주고 나서 각종 범죄발생률이 높아져 사회 안전을 심각하게 해친 사례들이 빈발하자 그들의 입국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기로 했을 뿐만 아니라 기존 자국 체류자들까지 제3국으로 보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나라들이 생겨나고 있다. 인권이라면 발 벗고 나선 독일의 메르켈 총리도 지금은 난민 수용에 대해선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예멘인에 대한 심사를 엄격하게 하고, 만일 난민이 맞을 경우에 한해 여러 가지 조건부로 입국을 허락해서 입국자를 최소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조건부에는 체류 후 일부다처의 관습 포기, 이슬람교 신앙 권유 금지, 난민이 아님이 드러났을 경우엔 지체 없이 강제추방에 응하겠다는 등등에 대해 서약을 받을 필요가 있다.
이들은 난민으로 인정받든 안 받든 수년간 체류가 가능하고, 일단 한 번 받아들이면 내보내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다. 현재 한국정부는 난민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도 않다. 난민심사를 할 수 있는 공무원이 전국에 39명에 불과한 상황에서 수백 명이 한꺼번에 무비자로 입국하면 그들을 어떻게 심사할건지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 제주도에 들어와 있는 예멘인들이 사회 안전과 안정을 해할 수 있는 잠정적인 위험요인은 유럽에서 이슬람교도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바로 그들이 믿고 있는 이슬람교의 교리다. 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교가 평화의 종교라고 선전하지만 교리내용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인류공동체가 손상되도록 충돌을 일으키면서도 타종교, 이교도, 타문화, 여성에 대한 자신들만의 야만적인 교리를 고수할 정도로 종교를 너무 광적으로, 절대적으로 믿는다.
무슬림들은 타종교에 대해서 대단히 비타협적이며, 심지어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기독교에 대해선 특히 더 그렇다. 그들은 알라신이 아니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듯이 느껴진다. 15세기 전후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침입한 이슬람교도들이 천주교를 신봉한 포르투갈 민족을 유린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20세기 벽두에 들어와 알카에다의 이슬람교 광신도들이 비행기로 미국 뉴욕을 강타한 것(9·11사건)도 모두 “알라신을 위해 이교도의 목을 베고 순교하라”거나 “이교도를 죽이면 천국에서 72명의 처녀를 얻는다”는 비타협적이고 공격적인 이슬람 교리에 따른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톤(Samuel P. Huntington, 1927~2008)이 문명의 충돌을 주장한 배경도 기독교 문명권에 대한 이슬람세력의 위협을 우려한 것이었다. 기독교도에 대한 원수의식 뿐만 아니라 심지어 동일한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슬람교도들 간에도 자신이 믿는 파 이외에 다른 파에 대해선 적대시하는 등 너무 광적으로 믿는 나머지 서로 죽이는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무슬림들의 그런 광적인 믿음과 신앙행태가 한국에서라고 해서 그만두겠는가? 이러한 것은 모두 그들이 신주 받들듯이 믿는 ‘꾸란’(Quran)에 기원을 두고 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너무나 남성 위주로 돼 있고, 남녀차별, 타종교와 타문화에 대한 공격성이 섬뜩하리만치 명시돼 있는 꾸란과 이슬람교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나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이 잡힐 것이다. 총 114장 6,200여절로 이뤄져 있는 꾸란 중 다른 나라 사람들 혹은 타종교인들 및 비기독교들과 충돌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내용을 추려 봤다.
▲ 여성들은 남성들의 씨 뿌리는 밭에 불과하다. (꾸란 2장 223절)
▲ 언제든지 아내를 바꾸는 것은 알라께서 허락하신 남편의 권리다. (꾸란 4장 20절)
▲ 알라를 믿으면 네 명의 아내를 얻을 수 있다. (꾸란 4장 30절)
▲ 아내가 성관계를 거부하면 복종할 때까지 때려라. (꾸란 4장 34절)
▲ 노예와 아내는 때려라. (꾸란 4장 34절)
▲ 알라신을 위해 이교도의 목을 베고 순교하라. (꾸란 9장 5절)
▲ 이교도를 죽이면 천국에서 72명의 처녀를 얻는다. (꾸란 9장 11절)
▲ 사춘기 전 여자아이를 강간하면 네 것이 될 수 있다. (꾸란 65장 4절)
※바로 위의 마지막 두 내용은 항간에 잘못 퍼뜨려지고 있어 바루기 위해 나열했다. 실제 이교도와의 전쟁에서 순교하면 천국으로 간다는 말이지, 천국에서 72명의 처녀가 기다린다는 말은 없다. 그리고 아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패도 된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구절이 있긴 한데, 그기에는 때리다가 아니라 "멀리하다", "떠나버리다"라는 의미도 같이 있다. 즉 말이 통하지 않으면 이혼해라는 말이지 때리라는 건 아니다. 또 꾸란엔 이교도는 죽여도 된다는 말은 없다. 이교도들 징죄하라. 벌을주라는 말인데 구절의 정확한 뜻은 믿지 않느자에게 벌을 내리라는 말이다. 믿지 않는 자란 기독교나 유대인이 아니고 무종교 또는 토속신앙처럼 기존의 다신교 숭배자들을 뜻하는데 성경에도 이건 비슷하게 나와 있다.
아뭏든 위와 같은 신앙의 준칙들이 무슬림들의 대체적인 생각이자 가치관이다. 행동은 생각에서 나온다. 특히 이러한 극단적인 생각은 교조화, 절대화 된 교리나 사상적 도그마에서 배태된다. 어떤 종교든 종교 보다 사람을 우선시 하지 않고 교조화, 절대화 될 때 문명 파괴적이 됐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똑똑히 배웠지 않는가? 이미 지난 세기에 칼 포퍼(Karl Raimund Popper, 1902~1994)가 힘주어 얘기했듯이 인류문명이 지속되려면 위대한 인물을 맹종하는 습관을 타파해야 한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는 무슬림에게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래도 끝까지 목에 박힌 가시처럼 ‘인도주의’에 미련이 남아 있다면 우리사회의 음지에 놓여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먼저 보듬기 바란다. 해마다 수만 명의 부모 없는 어린이들을 세계 각국으로 입양시키지 말고 국내에서 키우도록 입법화 하고, 무슬림이 아닌 난민들에 대한 수용과 처우개선, 국내 사회안전망에서 제외된 음지의 독거노인들, 쪽방촌 노인들, 해마다 1만 명 이상이 되는 자살자들의 자살방지, 망해가는 영세 자영업자들과 탈북 새터민들을 돕는 것도 충분히 인도적인 일이다.
2018. 7. 10. 11:45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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