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역사의 한시 오기와 오역, 이대로 좋은가?
전철 역사의 안전문인 스크린 도어에 붙은 시들은 말라버린 도시인의 감성을 잠시나마 촉촉이 적셔주는 오아시스다. 서울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시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비단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지하철을 이용할 때마다 막간에 서서 역사마다 곳곳에 붙어 있는 시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승객들에게 시의 향기를 맡게 하려는 서울 도시철도공사의 문화적인 배려 덕분이다.
지하철 승강장의 스크린도어 곳곳에 게시돼 있는 시들 중엔 한글시들은 번역할 것도 없는데다가 표기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간혹 한시는 한자가 잘못 표기돼 있거나 번역이 충실하지 못한 작품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띤다.
지난 달, 서울역에서 천안행 전철을 기다리다가 스크린도어에 붙어있는 시가 보이길래 전철역에 붙어 있는 시들을 놓치지 않고 감상하는 평소 습관대로 이번에도 시를 자세히 읽어봤더니 이백의 자견(自遣)이라는 한시였다. 그런데 한자도 잘못 적은 게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의 제목에서부터 본문에 이르기까지 한글 번역이 작지 않게 원의와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스크린도어에 붙어있는 한시는 이랬다.
내 마음/이백
술과 마시다보니 해 저무는 줄도 몰랐네
떨어진 꽃잎이 옷깃에 가득해
취해 일어나 달이 잠겨 있는 시냇가 걸으니
새들은 돌아가고 사람 발길 또한 뜸하구나
自遣/李白
對酒不覺暝
洛花盈我衣
酒起步溪月
鳥還人亦稀
우선 위 시 중 틀리게 적은 한자부터 바루자. 제2행의 낙화(洛花) 중 낙(洛)은 떨어질 낙(落)의 오류다. 낙화(落花)가 맞다. 이 같은 사소한 오류는 한자를 잘 모르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일 수 있지만 이 시를 아는 중국인들에게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크게 양보해서 이 문제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정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게 제목인데 自遣(자견)을 ‘내 마음’으로 옮겨 놓은 게 아닌가? 자견은 중국의 문언문(文言文)에서 보통 ‘스스로 근심을 풀다’, ‘시름을 달래다’, ‘스스로 근심 걱정을 해소하다’ 등의 뜻을 지닌 단어다. 굳이 영어로 옮기면 ‘divert oneself from melancholy’ 또는 ‘cheer oneself up’인데,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그런데 이를 ‘내 마음’으로 번역해놓았으니 저자 이백(701~762)이 작시 중 의식한 원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번역이라고 볼 수 있다. ‘내 마음’으로 옮겨놓으니 어쩐지 본문 내용과 따로 노는 듯하지 않는가?
시의 내용에서도 약간의 잘못이 보였다. 위 시를 제대로 아는 이들, 특히 한글을 잘 아는 중국인들이 이를 봤다면 어찌 생각할까? 중국인들은 고등학교만 나와도 정규과목에서 고시(古詩), 당시(唐詩), 송사(宋詞) 등 수십 편의 시와 사를 달달 외우게 된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필자가 이런 생각이 들자 얼굴이 화끈 거렸다. 그래서 사진을 찍어 지하철공사에게 수정하라고 전해줄 요량으로 위 시를 다시 번역해봤다. 필자가 다시 아래와 같이 번역한 것을 위 번역과 대조해보면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름을 달래다
친구와 술을 마시느라 날이 저물어 어둑해진 줄 몰랐네
내 옷에는 떨어진 꽃잎들이 가득하구나
취기가 돌아 몽롱한 상태에 달빛 어른거리는 냇가를 걷노라니
새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길에는 인적마저 드물구나
물론 필자가 옮긴 위 번역이 완전무결한 불변의 번역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옮긴 이에 따라서 자구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약간씩은 다를 수 있더라도 대략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면 저자의 작시 의도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또한 위 한시 첫째 행의 ‘對酒’로만 보면 이백이 자신의 친구와 술을 마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냥 다른 이와 술을 마셔도 對酒라고 할 수 있으니까. 아마도 저자가 5언절구라는 형식을 맞춰야만 해서 글자 수의 제한을 받아 與友라는 앞 두 자를 생략하고 對酒라고만 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또 제3행의 醉起를 ‘취하다’와 ‘일어나다’라는 두 동작을 연속으로 나타내는 복합동사로 봤는데, 起는 술취함, 즉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다라는, 선행 사물의 동작이나 현상이 시작됨을 나타내는 방향보어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시든, 수필이든, 소설이든 무릇 모든 문학작품은 크게는 지은이가 처한 시대적 상황, 작게는 생활 속의 환경, 조건들이나 심정의 산물이다. 이 점에서 당시 이백이 정치적으로 좌절을 겪고 외롭게 지내고 있던 상황에서 느낀 정서를 어떻게 최대한으로 살려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게 이 시가 생명을 얻어 다시 한글로 되살아 날 수 있는 관건이다.
성당(盛唐) 시절 당대(唐代)의, 아니 전체 중국의 문학사를 통틀어 최고의 낭만주의시인으로 평가되는 저자 이백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을 가하지 않아도 무방한 인물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이 한시가 지어지게 된 756년 이후 시점은 그가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安史의 난)에 연루돼 귀양길에 올라 61세로 죽기 전 유랑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그에게 권력의 무상함과 납량세태의 세상인심을 누구보다 통절히 느낀 시기가 작시의 배경이 된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위 한시의 내용을 제대로 분석하기엔 지면이 너무 길어질 것이어서 한 두 가지만 간단히 코멘트하고 매듭을 짓겠다. 즉 오언절구로 된 이 시는 酒와 花, 月과 鳥를 대비시킨 시어들을 동원해 시인 자신의 무상감과 고독한 내면을 표현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취중에서 보는 낙화(落花)와 외로운 달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듯이 권력의 무상감, 자신의 처량한 신세와 비애를, 새와 인적이 끊긴 것은 고독한 심사를 나타내는 듯하다.
이백에게 술, 꽃, 달, 새는 시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외로운 자신의 반려자로 삼고 있는 듯하고, 꽃잎이 가득하게 떨어진 장면에다 새들과 인적이 드문 장면을 대비시키고 있다. 주선(酒仙)이랄 정도로 술을 즐겼던 이백은 이러한 풍광에서 실제로 취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 이상의 쇠미함을 드러내지 않는 절제미가 이 시를 살려 놓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백의 한시에 이어 얼마 전에는 한국인이 쓴 한시 중에 거의 유사한 실수를 범한 한시를 보게 됐다. 이번엔 3호선 연신내 역 승강장 안전문에 붙어 있는 한시인데 아래처럼 돼 있다.
見新月
정온(鄭蘊, 1569~1641)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來從何處來
落向何處落
姸姸細如眉
遍照天地廓
내눈에 걸린 초승달
어디에서 나온 거니?
어디로 기우는 거니?
눈썹 같이 가는 달 곱기도 한데
하늘과 땅 사이를 두루 비추네
위 한시의 한글 번역은 이 시의 제공자로 돼 있는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한시 역시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볼 수 없다. 먼저 見新月을 ‘내 눈에 걸린 초승달’로 번역한 제목부터가 과도한 의역인 게 아닌가싶다. 그냥 원문대로 질박하게 ‘초승달을 본다’로 옮기는 게 훨씬 지은이의 의도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한시의 원래 의미가 정확하게 번역돼 있지 않기는 이 한시도 마찬가지인데, 본문 번역도 의역이 지나친 느낌이다. 번역자는 현대인, 특히 서울에 사는 젊은이들의 어투와 감각에 맞추려고 한 의도를 갖고 번역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來從何處來’를 ‘어디에서 나온 거니?’와 같은 식으로 옮기니 가벼운 리듬감은 있을 수 있으나 조선시대 문인들의 진중하고 묵직한 정서나 성정은 느껴지지 않는 흠결이 있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일반적인 정서를 고려하고, 특히 이 시를 쓴 정온의 성정을 반영해 옮길 필요가 있겠다. 16세기 중반 병자호란 때 조선조정 내 주화파들의 주장에 힘입어 강화도를 점령한 청나라군에게 항복을 결정하게 되자 척화를 주장한 정온은 오랑캐에게 항복한 수치를 참을 수 없어 칼로 할복자결을 시도한 격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다행히 그는 자결에 실패해 죽지는 않았지만, 그 뒤 관직을 버리고 덕유산 자락의 거창으로 낙향해 은거하다가 1641년(인조 19년)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가볍지 않은 삶을 산 인물이었다.
이 같은 정온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결코 위 시의 한글번역에서처럼 초승달을 보면서 가벼운 어투나 심사로 달아 너는 ‘어디에서 나온 거니?’라든가 ‘어디로 기우는 거니?’라는 식으로 밝거나 가볍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그는 남명 조식의 문하로서 우국충정에 절의와 기개가 넘친 선비였기 때문이다.
이런 그가 밤하늘에 비수처럼 차갑고 싸늘하게 느껴질 수 있는 초승달을 보면서 맺힌 감정이 없을 수 있겠는가? 전문가들의 전문적인 감고(監考)가 있어야겠지만, 이 시의 초승달은 단순히 자연의 현상으로서의 달이 아니라 뭔가를 상징하는 것일 게다. 가령 자신이 그리는 임금이라든가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국충정에 못 이겨 초야에 묻혀 산 산림의 선비인 그가 그처럼 가벼운 어투로 읊었다고 볼 수 있을까? 적어도 그는 평심한 마음으로 관조 혹은 관상의 대상으로 초승달을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은이가 품었음직한 내면의 정서나 심정을 고려해 필자는 감정을 이입시켜 원시를 다시 옮겨봤다. 아래와 같다.
초승달을 본다
오기는 어디서 왔는가?
떨어지기는 어디로 떨어지는가?
곱고도 고운 가늘고 눈썹 같은 초승달
천지에 두루 비추지 않는 곳이 없구나
두 종류의 한글 번역을 보니 느낌이 어떤가? 지은이에게 물어 보지 않는 한 정답은 있을 수 없는 게 시다. 다만 원의에 가까이 다가갔는가 하는 근접성의 정도만 차이 날 뿐이다. 자신이 정온이라면 어느 번역에 방점을 찍을 지 생각하면서 감상하면 재미있겠다.
우연히 보게 된 이백의 한시 한 편으로 천안까지의 전철여정에서 시름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은 망외의 즐거움이었다. 정온의 한시도 마찬가지였다. 쉽게 접할 수 없는 인물을 도회에서 한시로 만나게 돼 반갑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한시를 정확히 옮기지 못한 것이라든가 한자의 오기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두에서 언급했다시피 한시를 공공의 장소에 내걸 때는 사계의 전문가의 손을 거쳐 좀 더 세밀하게 번역하고, 한자도 오기가 없도록 마음을 쓸 필요가 있다. 다음에는 어떤 잘못 번역된 한시를 또 만나게 될지 약간 우려가 앞서는 것이 못내 유감이다. 우리의 문학적 수준이 이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지 않을까?
2017. 7. 2
雲靜
위 글은 2017년 7월 3일자 인터넷 매체인『오마이뉴스』에「서울 지하철역 한시의 오기와 오역, 이대로 좋은가?」라는 제목으로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시민기자로 있는 인터넷신문입니다. 좋은 기사 거리가 있으면 제보해주시면 취재해서 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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