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敍情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 밤거리의 집시 여인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말없이 客愁에 호소하는 애틋한 눈망울
그녀는 북아프리카에서 왔을까?
아니면 남미에서 왔을까?
어떤 피가 섞였을까?
누구의 동정, 연민 혹은 사랑이
그녀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그녀의 남루한 행색, 형형한 눈빛이
미답의 동방으로 건너온 예수회 신부들의 교설처럼
나그네를 알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밀어 넣는다.
집시와 신부와 나그네는 어디서 왔을까?
전생에 서로 마주친 적이 있었을까?
인드라의 그물처럼 얽혀 있는 우리 행적을 상상하면
불현듯 다가서는 시공의 妙有
잉어처럼 파닥이는 인연의 참뜻
그가 나였고, 내가 그일테지
과거 현재 미래는 나눌 수 없는 한 몸
業따라 돌고 도는 有情에게 동방 서방이 경계가 있을손가
집시와 신부들에겐 아라야識 속의 地層으로 있을 동방
그곳 동방의 땅끝에서 어줍잖은 한 사내가 바람처럼 왔다가
리스본의 새벽을 여는 애잔한 ‘파두’의 가락속에 구름처럼 떠나간다.
고향 그리며 숱한 밤을 보내다 타국의 이슬로 사라졌던 신부들처럼!
항해왕 엔리케 왕자와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가 그랬던 것처럼!
머잖아 회한을 안은 채 리스본을 떠나야 할 형형한 눈빛의 집시여인처럼!
2009. 9. 4 귀국 전야,
제35회 세계군사사학회 참석차 간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의 밤거리에서 마주친 집시의 여인을 보고 인연의 不可解性을 떠올리며
雲靜
※ ‘아라야識’이란 의식, 마나스식과 함께 불교 唯識學에서 말하는 3식의 한 가지로서 모든 법의 종자를 갈무리하며, 만법연기의 근본이 된다. 즉 인간은 감각기관인 眼耳鼻舌身意(6식)를 통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기억하는데, 앞의 5식은 모두 뒤의 意識에 의해 통제되고, 意識이 이러한 인식내용을 잊어버린다고 해도 아라야識은 의식의 또 다른 어딘가에 창고처럼 보관하는 기능을 가진 識이다.
※‘파두’란 집시의 애환이나 포르투갈 민족의 정서를 노래한 애잔한 음악인데, 리스본에선 거리마다 새벽녘이 되도록 밤새 연주하는 곳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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