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화장실 '한 걸음'의 '문명'과 중국의 표어 인플레이션

雲靜, 仰天 2026. 7. 25. 17:35

화장실 '한 걸음'의 '문명'과 중국의 표어 인플레이션


                                             서상문(여행 자유인)

1992년 내가 최초로 중국을 여행하면서 각지에서 보게 된 화장실과 비교하면 지금의 중국 화장실은 놀랄만큼 청결해졌고 발전해 있다. 당시 웃지못할 화장실의 풍광을 얘기하게 되면 그걸 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일종의 문화충격이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화장실과 표어에 얽힌 다른 얘길 하고자 한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뜻밖의 장소에서 중국 사회의 한 단면을 발견하게 된다. 거창한 박물관이나 혁명기념관, 정부 청사가 아니라 때로는 화장실에서다. 며칠 전, 백두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어느 남자 화장실 소변기 앞에서 아주 익숙한 문구 하나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向前一小步,文明一大步”

글자 그대로 옮기면 ‘앞으로 작은 한 걸음, 문명에는 큰 한 걸음’이라는 뜻이지만, 중국어 특유의 생략과 압축을 풀어 자연스럽게 번역하면 이렇다. “앞으로 한 발짝만 더 다가서면, 문명으로 나아가는 큰 걸음이 된다.”

말인즉 소변기 앞으로 조금만 더 바짝 다가서서 볼일을 보면 바닥을 더럽히지 않게 되고, 그러한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문명사회를 만드는 데 큰 걸음이 된다는 뜻이다.

나는 수십 년 전부터 중국을 100번 이상 오가면서 도처에서 이런 문구를 수도 없이 보았다. 그래서 이제는 별스럽지도 않다. 그러나 중국을 처음 찾는 외국인이 이 표어를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문득 짓궂은 생각도 든다.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서면 문명인이라면, 다가서지 않고 볼일을 보는 사람은 야만인인가?

물론 이 표어를 만든 사람의 의도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소변을 밖으로 흘리지 마시오”라고 직설적으로 명령하는 대신, 일상적인 행동을 ‘문명(文明)’이라는 보다 큰 가치와 연결해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一小步’와 ‘一大步’를 대비시킨 것도 중국어 표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압축적인 수사법이다. 또한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지시하기보다는 어떤 가치나 이상을 앞세워 행동을 유도하는 중국어의 한 특징도 엿보인다.

그런데 나의 관심은 이 표어 한 줄의 흥미에만 있지 않다. 중국을 여행할 때마다 나에게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왜 중국 사회에는 지금도 이토록 많은 표어와 구호가 필요한가라는 점이다. 역과 공항, 학교와 관공서, 도로와 공원, 아파트 단지와 농어촌 마을에 이르기까지 표어가 없는 곳을 찾기가 오히려 어렵다. 심지어 화장실에서조차 ‘문명’을 가르친다. 여기에 쓰여진 ‘문명’이라는 단어가 함의하는 바는 문화인류학에서 말하는 문명의 정의와도 다르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그것과도 결이 조금 다르다.

나는 대체로 표어와 구호가 지나치게 많은 사회일수록 국가가 국민의 자율적 판단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물론, “표어가 많으면 곧 후진국이다”라고 단순하게 등식화할 수는 없다. 선진국에도 공익광고와 안전수칙, 시민 캠페인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러나 위생에서 예절, 애국심과 도덕, 법의식과 민족의식, 나아가 정치적 신념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끊임없이 일정한 언어를 만들어 국민에게 보여주고 반복적으로 학습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한국도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표어의 나라라고 할 만큼 곳곳에 구호들이 붙어 있었다. 학교 담벼락, 관공서, 버스터미널, 기차역, 농어촌 마을 입구에서 덕지덕지 붙어있는 각종 계몽·반공·경제개발·성병 경고·가족계획 따위의 표어를 쉽게 볼 수 있었다. 국가가 국민을 동원하고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고 시민의 교육 수준과 자율성이 높아지면서 그러한 표어들은 상당 부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아직도 표어가 일상의 중요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그 밑바탕에는 인민은 그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고 끊임없이 학습시키고 교육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오랜 정치적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고 나는 본다.

중국공산당의 정치문화에서 ‘학습(学习)’, ‘교육(教育)’, ‘개조(改造)’, ‘단련(锻炼)’은 특별한 의미를 가져왔다. 특히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 시대에는 인민의 사상과 자질 역시 끊임없는 학습과 정치운동을 통해 개조하고 단련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 결과가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것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문혁 역시 마오의 이상을 실현시킬 목적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지만!

오늘날 과거와 같은 대중정치운동의 형식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중국엔 국가와 당이 인민에게 무엇이 올바른 가치이며,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제시한다는 발상 자체는 상당 부분 남아 있다. 당국가(party state)의 특성인 만큼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화장실의 “向前一小步,文明一大步”도 물론 정치선전 구호와 똑같은 차원에서 볼 수는 없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위생과 공중예절을 위한 생활표어다. 그러나 국가와 공공기관이 무엇이 ‘문명적인 행동’인지를 규정하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가르친다는 점에서는 중국 사회의 계몽적 문화와 맞닿아 있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밖으로 나오면 표어의 성격은 훨씬 정치적으로 바뀐다. 내가 이번 중국여행에서 찍은 사진 가운데는 이런 문구도 있다.

“人民有信仰,国家有力量,民族有希望”
“인민에게 신앙이 있고, 국가에는 역량이 있으며, 민족에는 희망이 있다.”

여기서 ‘信仰’을 종교적 의미의 신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나 불교를 믿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중국공산당이 제시하는 중국특색사회주의의 길과 가치, 국가의 발전 방향과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가지라는 정치적 의미에 가깝다. 그러니까 이 문장의 구조는 매우 명확하다.
인민에게 중국공산당에 대한 올바른 신념이 있으면 국가가 강해지고, 국가가 강해지면 민족에게 희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단어가 ‘民族’이다. 그렇다면 이 ‘민족’은 누구인가? 한족일까? 티베트족일까? 위구르족일까? 몽골족이나 조선족일까?

중국은 공식적으로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을 합쳐 56개 민족으로 분류한다. 중국은 대만의 여러 소수민족들을 한 종류로 보고 보는데 대만은 소수 민족이 17종이 있다. 그래서 이 분류는 틀린 것이다. 아무튼 최근 중국의 정치언어에서 점점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은 각각의 개별 민족보다 이들을 하나의 상위 공동체로 묶는 ‘중화민족(中华民族)’, 더 정확하게는‘중화민족공동체(中华民族共同体)’라는 개념인데 이 어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촬영한 또 다른 사진의 벽을 보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铸牢中华民族共同体意识”
“중화민족공동체 의식을 확고히 하자.”

그 옆에는 이른바 ‘다섯 가지 인정(五个认同)’이 적혀 있다. 위대한 조국, 중화민족, 중화문화, 중국공산당, 중국특색사회주의에 대한 인정을 강화하라는 내용이다.

용정촌 중공 위원회 사무실에 붙어 있는 문구들

금년 2026년 7월 1일부터 시행된 『중화인민공화국 민족단결진보촉진법(中华人民共和国民族团结进步促进法)』 역시 ‘중화민족공동체 의식(中华民族共同体意识)’을 한층 강조하고 있다. 이를 곧바로 “중국공산당이 55개 소수민족을 모두 한족으로 동화시시려 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화 하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각 민족의 평등과 권익을 인정하며, 법률 자체도 ‘한족화’를 목표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러나 개별 민족의 언어, 문화 등을 포함한 정체성보다 중화민족이라는 상위의 국가적·정치적 정체성을 더욱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내가 예전부터 주장해 왔지만 이 “华(華)”의 역사적 연원과 정체 그리고 정치 사상적 기능 및 작용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서 그 실체를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앞으로 언어와 교육, 역사서술과 문화의 영역에서 이러한 통합이 어디까지 진행될 것인가는 중국의 민족정책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표어’라는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 중국 농어촌을 다니다 보면 표어는 이제 단순히 종이에 써 붙인 문장의 차원을 훨씬 넘어섰다. 내가 이번에 뚱뻬이(東北)지역 농촌 마을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더라도 그렇다.

“建设新农村,美丽新生活”
“신농촌을 건설하여 아름다운 새 생활을 만들자.”

“民族要复兴,乡村必振兴”
“민족이 부흥하려면 향촌은 반드시 진흥해야 한다.”

“弘扬法治精神,树立法制观念”
“법치 정신을 선양하고 법제 관념을 확립하자.”

“学法·尊法·守法·用法”
“법을 배우고, 법을 존중하고, 법을 지키고, 법을 활용하자”는 문구까지 있다.

한두 장의 벽보 정도가 아니다. 사무실 벽 전체를 덮고, 건물 정면을 차지하고, 급기야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독립 조형물까지 만들어 길가에 세워놓는다.

이 광경을 보면서 나는 하나의 역설을 떠올렸다. 법치를 강조하는 걸 보면 법치보다도 인치로 더 나아가고 있는 중국의 실제와 거리감 그리고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1913~1960)가 얘기한 부조리의 이질감을 느낀다. “행복하려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 까뮈의 얼굴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더군다나 표어가 너무 많아지면 사람들은 오히려 표어를 읽지 않는다. 처음 한두 번은 읽는다. 그러나 매일 출근할 때도 보고, 버스를 탈 때도 보고, 관공서에 들어갈 때도 보고, 마을회관에서도 보고, 화장실에서도 보면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도 보지 않게 된다. 이 지점에선 ‘반복 노출에 따른 주의력 저하·습관화(habituation)’라는 심리학적 개념이 떠오른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이 카메라를 든 관광객은 사진을 찍는 데 몰두한 나머지 정작 눈앞의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카메라가 자신을 대신해 보게 된다고 지적한 것과 엇비슷한 역설이다. 표어 역시 너무 자주 눈앞에 등장하면 글자는 보이지만 그 의미는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마침내 하나의 배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에는 표어가 더 커진다. 전통적으로 길상과 경사, 활력을 상징해 온 붉은색에다 중국공산당의 혁명적 상징성까지 겹쳐 글씨는 더욱 선명한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강조된다.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입체 글씨가 되고, 조형물이 되고, 심지어 야간에는 불까지 들어온다.

물론, 이런 사진 몇 장만으로 “인민들이 표어를 읽지 않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표어를 대형화했다”고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끊임없는 반복 노출 속에서 표어가 일상의 배경으로 퇴색하고, 다시 사람의 눈길을 붙잡기 위해 더욱 크고 요란한 시각적 장치를 동원하는 듯한 인상을 떨쳐버리기는 어렵다. 나는 이것을 ‘표어의 인플레이션’이라고 부르고 싶다. 화폐가 너무 많이 풀리면 지폐 한 장의 가치가 떨어지듯이, 표어도 너무 많아지면 한 문장의 무게가 떨어진다. 말이 부족해서 문제가 아니라 말이 너무 많아서 아무도 듣지 않는 역설적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중국 사람들은 이런 표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중국공산당의 당원이라면 화장실의 표어를 보고 실제로 앞으로 반걸음 더 다가서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고학력자나 문화적 소양이 있는 이라면 “文明”이라는 말을 보고 공중질서를 한번 생각해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교육 수준이나 생활환경의 지역적 격차가 여전히 존재하는 곳에서는 위생·법률·공공질서와 관련된 생활계몽이 일정한 효과를 갖는 측면도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반대로 공산당 일당 전제에 부정적이거나 현실에 불만을 가진 이들 중에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정치구호에는 별 관심 없이 지나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너무 익숙해져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표어, 슬로건 정치의 역설이 있다. 국가는 더 많이 가르치려고 더 많은 표어를 붙인다. 인민이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다시 더 크고 화려하게 만든다. 그러나 반복이 심해질수록 한 문장이 지닌 충격과 설득력은 오히려 떨어질 수 있다. 계몽이 일상화되고, 일상화된 계몽은 다시 무감각을 낳는다. 그래서 상기 맨 처음의 화장실 표어가 나에게는 단순한 우스갯거리로만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한 발짝만 더 다가서면, 문명으로 나아가는 큰 걸음이 된다.”

위생을 위해서는 맞는 말이다. 한 걸음 다가서면 주변이 깨끗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국가와 인민의 관계까지 이런 문법으로 구성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국가는 늘 앞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오라”고 말하고, 인민은 그 뒤를 따라가는 존재여야 하는가?

진정한 문명은 화장실 벽에 ‘文明’이라는 글자를 많이 붙이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일일이 가르치지 않아도 사람들이 공공질서를 지키고, 정부가 항상 정답을 제시하지 않아도 개인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며,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와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오히려 한 단계 더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상이나 가치 측면에서 한 방향만을 제시하는 공산당 지배 사회에서는 요원한 길이다.

과연 중국의 거리와 역, 농어촌과 관공서, 심지어 화장실까지 뒤덮고 있는 이 수많은 표어와 구호들은 언제쯤 줄어들까?

아마 중국 정부가 인민을 끊임없이 계몽하고 지도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시민으로 더 많이 신뢰하게 될 때가 아닐까?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또한 요원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 중국에도 각종 NGO단체들이 있지만 그들은 예외 없이 전부 중국 공산당의 예산과 활동비를 받아쓰고 지침도 받아서 움직이기 때문에 관에 예속돼 있는 장식품이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유럽사의 산물인 “시민”의 자율적 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가 형성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국가가 굳이 벽마다 ‘문명’을 써 붙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문명적으로 행동하고, 곳곳에 ‘신앙’과 ‘희망’을 적어놓지 않아도 사람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스스로 믿음과 희망을 찾을 수 있을 때, 표어 역시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다.

이 단촐한 촌평을 닫기 위해 나는 이번 중국 화장실에서 보게 된 그 짧은 문구를 다시 꺼내 본다.

“向前一小步,文明一大步”
“앞으로 한 발짝만 더 다가서면, 문명으로 나아가는 큰 걸음이 된다”고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표어와 현실은 늘 따로 논다. 지금 중국 사회에서 정말 앞으로 한 걸음을 더 내디뎌야 할 쪽은 소변기 앞에 서 있는 인민일까, 아니면 인민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국가일까?

어쩌면 중국의 ‘문명’을 생각할 때 더 중요한 질문은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중국 민족의 운명, 그리고 공산당이 말하는 ‘인민’ 개념이 아닌 중국 ‘민중’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2026. 7. 25. 17:33.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