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하이게이트에서 마르크스에게 묻다 : “당신은 지금 지하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생애 처음 영국을 찾았다. 아내와 함께한 유럽 여행의 마지막 코스였다. 지난 30여 년 동안 19세기 유럽 사회주의 운동과 러시아혁명을 시발점으로 마르크스사상, 중국근현대사 및 중국공산당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한국전쟁을 포함한 여러 전쟁들을 연구해 온 나에게 런던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었다. 지난 세기 세계를 뒤흔든 공산주의 혁명의 사상적 출발점을 직접 확인하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번 여행엔 다른 견학도 많이 했다. 런던에서 닷새를 머무는 동안 전형적인 영국 농촌마을 코츠 월드와 유서 깊은 옥스포드 대학도 가보고, 대영박물관도 둘러보았다. 그리고 버킹엄궁, 웨스트민스터 사원, 영국 왕실의 안녕을 상징하는 비둘기 얘기로 유명한 런던탑도 찾았으며, 중간에 조금 졸긴 했지만 뮤지컬도 감상했다. 소호와 차이나 타운을 비롯한 런던 시가지도 걸어 보았다. 대영박물관을 보고 나와서 아내의 감동이 길거리에까지 지속되다가 순식간에 소매치기를 당해서 황당해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귀국 날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영국을 떠나는 날, 아침 식사를 하고 난 후 저녁 비행기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조금 있었다. 아내는 런던 시내의 유명한 하이드 파크(Hyde park)를 산책해 보자고 한다. 나는 그기까지는 가서 돌아 볼 시간이 안 된다고 했지만 아내는 계속 떼를 쓰다시피 가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하이드 파크까지 갔다 오면 공항 가는 시간이 너무 빠듯했기 때문에 가까스로 아내를 설득해서 내가 생각해놓은 곳에 가기로 했다.
나는 애초부터 불순(?)하게 공산주의 사상의 시조를 찾아가 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도버해협을 건너면서부터 어렵사리 영국까지 온 이상, 한 사람만큼은 반드시 만나보고 돌아가야겠다는 복안이 있었다. 물론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마지막 일정은 우리가 묵은 호텔에서 가까운 런던 시내 북쪽 교외의 하이게이트 묘지(Highgate Cemetery)로 결정되었다. 지난 200년 가까이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이자 혁명가 가운데 한 사람인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전철 아치웨이(Archway) 역에서 내려 도보로 약 15분 정도면 너끈히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도착해보니 하이게이트 묘지는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다.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런던 시내의 소음은 사라지고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나무들이 서 있는 작은 길과 잎이 듬성한 나무들이 이어졌다. 정말 조용했다. 얌전한 학생들의 수업시간 같이 조용했다. 한적함이 오히려 지난 200년 동안 인류를 뒤흔든 혁명과 전쟁, 계급투쟁과 이념 대결의 역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듯했다.
마르크스의 안식처는 정문에서 직선 거리로 200m도 안 돼 보였다. 묘지 한 켠에 결코 작지 않은 청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사진으로는 수없이 보아서 낯익은 바로 그 얼굴!


독일 태생인 마르크스가 이곳 하이게이트에 묻히게 된 데는 곡절이 있다.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급진적인 사상 때문에 조국과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 추방당했다. 결국 1849년 런던으로 망명해 평생을 '국적 없는 이방인'으로 살았다. 그리고 1883년 마르크스가 사망했을 때, 그는 대영박물관 근처에서 말할 수 없이 궁핍하게 살던 망명객이었다. 당시 그는 유명 인사가 아니었기에 가족들이 묻혀 있던 하이게이트 묘지의 작고 구석진 자리에 안장되었다. 첫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은 그의 후원자이자 사상적 동지였던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를 포함해 고작 11명뿐이었다고 한다.
묘비의 명판을 자세히 보면 그 이름들이 세상을 떠난 사망 순서대로 적혀 있다.
JENNY VON WESTPHALEN▶아내 1814~1881, 67세로 사망
KARL MARX▶마르크스 본인
HARRY LONGUET▶외손자 - 마르크스 사후 며칠 뒤 사망
HELENE DEMUTH▶가사도우미, 1820~1890, 69세로 사망
ELEANOR MARX▶막내딸
묘비 아래 부분에는 굵은 대문자로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구절이다.
WORKERS OF ALL LANDS UNITE.(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그리고 그 아래에는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구절인 또 하나의 유명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THE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HOWEVER IS TO CHANGE IT.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만 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한때, 전 세계 수많은 젊은 혁명가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문장들이다. 앤티 마르크스주의자인 내가 들어도 말만큼은 근사하다. 그러나 나는 그 문장을 보니 전혀 다른 장면들이 떠올랐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뻬이징 천안문 광장, 평양 김일성광장, 캄보디아 킬링필드, 문화대혁명의 홍위병, 시베리아 강제수용소 그리고 6·25전쟁, 중공군의 티베트 점령, 중인전쟁, 중소분쟁, 중월전쟁···.
나는 지난 수십 년간 19세기 유럽의 사회주의운동과 러시아혁명을 시발점으로 마르크스 사상의 중국 전입과 변용 내지 專有(appropriation), 중국근현대사와 중국공산혁명, 그리고 한국전쟁을 연구하면서 혁명과 유토피아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 갔는지를 셀 수 없이 많은 사료 속에서 확인해 왔다.
그래서일까? 이 묘비 앞에선 나는 일반 관광객들처럼 기념사진을 찍으며 웃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한동안 묘비를 바라봤다. 그의 눈과도 마주쳐봤다. 그리곤 마음속으로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여! 당신은 지금 지하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당신은 세상을 바꾸겠다고 했다. 실제로 세상은 바뀌었다. 그러나 그 변화는 과연 인류에게 축복이었는가? 아니면 재앙이었거나, 비극이었는가?

당신은 역사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원시 공산주의 시대를 지나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마치 자연법칙처럼 역사가 반드시 그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믿었다. 이른바 史的 유물론이다.
그러나 내가 30여 년 동안 역사를 연구하면서 얻은 결론은 정반대였다. 역사는 결코 하나의 공식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역사는 수학 공식이 아니었다. 인간은 계급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생존본능에 따른 민생의 해결이 중요했고, 종교가 있었고, 민족이 있었으며, 국가가 있었고, 문화가 있었으며, 지도자의 선택과 결단이 있었고, 수많은 우연과 변수들이 있었다. 때론 민초의 분노와 저항이 역사의 물꼬를 틀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대의 오만한 말과 달리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이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의 역사를 단 하나의 잣대로 설명하려 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당신의 가장 큰 오만이었다는 생각은 변함 없다.
마르크스가 인류 역사의 발전 법칙을 찾아내겠다고 한 그 자체가 자만이자 오만이다. 인류의 역사는 일정한 틀을 갖고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는 인간세상에서 신국으로 나아간다는 기독교 사관과 상통하는 직선론적 사관이 된다. 그래서 인류에게 수세기 동안 인류의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엄청난 분열, 투쟁과 폭력사태, 심지어 그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스탈린, 차우세스쿠, 마오쩌둥, 호찌민, 카스트로, 김일성 따위의 독재와 전쟁을 가져다줬다. 또한 인민들에겐 엄청난 고통과 질곡도 가져다 주었다.
마르크스여! 또 하나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은 1850년대 영국의 식민지 홍콩에서 『뉴욕 트리뷴』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아시아를 논했다. 이 시기 영국 신문에 기고한 인도 관련 글에서 그는 영국의 식민지배를 비판하면서도, 전통 인도 사회를 정체된 공동체로 보는 이중적인 시각을 보였다. 나는 예전에 논문을 쓰면서 이 시기 그대의 언설들을 많이 접했다. 당신은 산업화와 근대화를 먼저 이룬 유럽이 역사를 이끌 것이며, 아시아 사회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근대적 혁명에 성공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게 되었는가? 러시아혁명의 불길은 우랄산맥을 넘어 아시아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번졌고, 중국공산당은 마침내 대륙을 장악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혁명의 불길은 마치 들불처럼 아시아 곳곳으로 번져 나갔다. 김가네 왕조국가가 된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베트남이 뒤를 이었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공산혁명의 물결 속으로 빨려 들어갔지 않는가!? 동구권과 쿠바도 마찬가지였다.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당신은 아시아를 자력으론 변할 수 없는 혁명의 변방으로 보았지만, 정작 당신의 사상이 가장 깊고, 가장 오래 뿌리내린 곳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였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 그대 역시 민족적 우월의식을 가지고 후진국을 식민의 대상으로 보면서 약소민족을 야만시한 유럽인이었다. 그리고 그 아시아에서 당신의 사상은 가장 화려한 성공과 가장 참혹한 비극을 동시에 낳았다.
혁명은 성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대가 꿈꾸었던 공산주의는 어디에서도 완성되지 못했다. 소련은 독재 끝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 위에 시장경제를 덧씌운 기묘한 체제가 되었다. 북한은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사실상 세습체제로 변해 있다. 캄보디아는 어떠했던가? 폴 포트(Pol Pot, 1925~1998)가 당신의 이름을 혁명의 깃발로 내세우며 킬링필드라는 인류사의 참극을 만들어 냈지 않았는가?
마르크스여! 당신은 인류 역사를 설명하면서 고정 불변의 진리라고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역사는 그대의 이론을 배반했다. 아니, 어쩌면 당신의 추종자 내지 후계자들이 역사를 당신의 이론에 억지로 맞추려 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그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억 명이 자유를 잃었다. 그대는 이 사실을 부정하는가? 아니면 사적유물론의 원조로서, 또한 이론적 지침을 제시한 당사자로서 책임을 통감하는가?
나는 러시아혁명과 중국 공산혁명사와 국공투쟁, 그리고 6·25한국전쟁을 연구하면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혁명은 언제나 인민의 이름으로 시작되었지만 노동자가 주인이라고 하면서도 혁명이 성공한 뒤 가장 먼저 권력을 차지한 것은 언제나 공산당이었다는 점이다. 인민은 혁명의 주체자, 주인이라고 했었지만, 혁명 이후에는 다시 통치의 대상이 되었다. 또 평등을 지향한다면서도 인민들 사이에도 불평등이 심하고 공산당 최고 지도자들은 하나 같이 예외 없이 적게는 수 천억에서 많게는 수 조원의 재산들을 비밀리에 숨겨 놓고 산다. 참으로 기막힌 역설이었다.
마르크스여! 당신은 인민해방을 외쳤었지. 그러나 당신을 추종하며 혁명에 성공한 레닌(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1870~1924)의 러시아와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의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정작 인민을 해방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새로운 권력자가 되었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했지만 현실에서는 레닌이 당신의 주장을 비틀어서 “직업적 투사”가 영도하는 공산당 독재를 만들었고, 계급 없는 사회를 약속했지만 새로운 특권계급을 탄생시켰다. 혁명의 이름으로 인민을 해방하겠다던 사람들이 오히려 인민 위에 군림하고, 인민을 감시하며, 인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역설! 러시아가 그랬고, 중국이 그랬으며, 북한은 숫제 왕조체제나 다를 바 없다.
혁명은 끝났지만 독재가 시작되고 억압과 불평등이 더 심하게 됐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또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여, 그대의 추종자들은 이럴려고 혁명을 했는가? 무얼 위해 혁명을 했는가? 인민을 해방하겠다던 혁명은 왜 인민을 해방하지 못하고 공산당만 해방시켰는가? 노동자를 위한 국가를 만들겠다더니 왜 노동자는 다시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었는가? 그토록 국가의 소멸을 말했던 그대의 손오공 같은 수많은 자칭, 타칭 후계자들은 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권력을 만들었는가? 이게 그대가 꿈꾸었던 혁명의 종착역이었는가? 아니면 당신의 사상이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귀결이었는가?
나는 묘비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내도 말 없이 물끄러미 동상을 바라보고 있다. 흥미롭게도 마르크스의 묘지 맞은편 쪽에는 그와 사상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었던 자유주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의 묘가 있다. 사후에도 두 철학자가 마주 보며 논쟁하는 듯한 구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잠시 마르크스를 떠나 또 다른 묘지를 찾아갔다. 가는 중에 보니 브라질에서 왔다는 여교수 한 사람도 우리와 동일한 묘지를 찾고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 합심해서 찾았다. 묘석상의 글자들이 마모가 심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윽고 조금 떨어진 곳에 낯익은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 평생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세계사를 연구했던 역사학자였다. 나는 그의 묘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그의 저서들을 접했을 때는 대만에서 박사과정을 밟을 때였다.


성급한 평가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 홉스봄은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에 이어 영국이 낳은 또 한 명의 걸출한 역사학자, 그는 분명 20세기를 대표하는 뛰어난 역사학자로 보였다. 그의 방대한 독서와 치밀한 사료 분석에는 지금도 배울 점이 적지 않다. 허점이 적지 않은 사관이지만 그래도 참고 할 것이 많은, “도전과 응전”으로 이뤄진 것이 세계사라고 한 토인비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나는 홉스봄의 역사관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 역시 역사를 지나치게 계급과 경제라는 하나의 틀 속에서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과 중국근현대사와 중국공산당, 그리고 한국전쟁을 수십 년 동안 연구하면서 내가 얻은 결론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역사는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경제도 중요하다. 권력과 계층과 계급문제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역사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민족주의 사상 하나가 계급의식을 압도하기도 하고, 종교가 혁명을 멈추게 하기도 하며, 지도자 한 사람의 선택이 한 나라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기도 한다.
나는 홉스봄의 묘 앞에서 그에게도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홉스봄이여! 당신은 평생 역사를 연구했다. 그러나 끝내 마르크스라는 거대한 안경을 벗지는 못했지. 훌륭한 역사학자는 사실을 이론에 맞추는 사람이 아니라 이론을 사실 앞에서 끊임없이 수정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 즉 사료가 말해 주는 대로 양심을 잃지 않고 균형감각을 갖고 정직하게 따라가는 것이다. 광대한 사료를 섭렵하고 치밀한 분석을 가한 점에서 나는 당신의 학문에는 경의를 표하지만, 그대의 역사관에는 동의할 수 없다. 마르크스는 혁명의 이론을 만들었고, 홉스봄은 그 이론으로 인간사와 역사를 읽었다.
나는 지난 세월 동안 걸어온 나의 학문적 궤적 속에서 오히려 역사는 어느 한 사람의 이론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역사는 언제나 이론보다 복잡했고, 인간과 삶은 언제나 사상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다기하고 다양했다. 또 알렉산더나 진시황, 징기스칸 같은 절대권력자 뿐만 아니라 요순 임금이나 링컨 대통령과 세종대왕처럼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도 신이 아니라는 사실, 이 엄연한 사실도 깨쳤다. 마르크스 그대도 신이 아니었다. 나는 이 평범한 진리의 실행을 인류의 지적 보고인 사기를 남긴 사마천(145 또는 B.C. 135~B.C. 86)의 사관만큼이나 중요하게 견지해야 할 역사가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홉스봄의 묘석을 뒤로 하고 천천히 걸어 나오는데 문득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떠올랐다. 사유재산의 폐지를 주장했던 마르크스의 묘지를 찾아오기 위해 우리는 입장료를 냈다. 물론 묘지를 유지하고 관리하려면 비용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던 마르크스를 만나기 위해 자본주의 방식으로 입장권을 구입해야 한다는 사실은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마르크스여! 혹시 이것도 그대가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에게서 전수 받은 정반합의 변증법이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승리라고 말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나는 멀리서 다시 한 번 마르크스의 묘비를 뒤돌아봤다. 이젠 더 이상 찾을 일이 없겠다 싶어서다. 몇몇 관광객들은 여전히 흉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누군가는 존경의 마음으로, 누군가는 호기심으로, 누군가는 세계적인 사상가를 보았다는 기쁨으로 그 앞에 서 있었다. 2005년이었던가? 영국의 공영방송 BBC에서 전문가들의 설문을 거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 10명을 꼽았는데 칼 마르크스가 1위였고, 2위에는 영국의 경험론자 데이비드 흄이 꼽혔다. 물론 몇 년 전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마르크스에 분노한 이가 찾아와서 몰래 그의 동상을 공격한 사건도 있었지만···.
위에서 언급했지만, 이곳에는 그만 잠들어 있는 게 아니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평생 그의 곁을 지켰던 아내 예니, 그의 가족, 그리고 헌신적이었던 가사도우미 헬레네 데무트까지 함께 잠들어 있다.
인간 마르크스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애상감으로 무거워진다. 망명객으로 떠돌며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고, 자식들을 제대로 먹이지를 못해서 결국 7명의 자녀 중 4명을 성인이 되기 전에 잃는 큰 비극을 겪었으며, 조국 독일 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런던에서 눈을 감았으니 말이다. 사람으로서의 당신은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 인간 마르크스에게 연민이 움트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 역시 한 인간으로서 그대의 기구한 삶을 외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여! 나는 그 연민으로 그대를 용서하거나 찬양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 마르크스와 사상가 마르크스는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 개인의 불행이 당신의 사상이 남긴 역사적 결과까지 면죄해 주지는 않는다. 사상가는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 그 사상이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에 대해서도 역사 앞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뒤늦게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한 이래 공산주의 역사와 전쟁을 연구하면서 너무도 많은 희생들을 보았다.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죽어 간 사람들! 계급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숙청당한 사람들! 인민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잃은 사람들!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굶어 죽은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사람은 언제나 평범한 인민의 축에 끼지 못한 지주, 부농, 자본가, 토비, 반공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을 말과 대화로는 설복할 수가 없어서 꼭 인민 아닌 사람들을 죽여 없애야만 공산주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인민의 범주엔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급과 민족부르주아지만 들어간다. 당신은 인민들을 해방시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을 또 다른 권력의 지배 아래 놓았다.
마르크스여! 당신은 발자크를 무척 사랑하지 않았는가? 노년에는 그의『인간희극』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려는 방대한 계획까지 세웠다고 들었다. 나는 지금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그대가 세계혁명의 설계도 대신 발자크 연구를 끝까지 했었더라면 어땠을까하고 말이다. 그랬다면 인류의 20세기는 지금보다 훨씬 덜 비극적이지 않았을까? 불교의 선승들처럼 발자크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려 했고, 당신은 인간을 하나의 이론 속에 욱여넣으려 했다. 근대 이래의 인류역사는 결국 발자크가 본 인간이 더 현실에 가까웠음을 증명한 것은 아닐까?
아무튼 내게 하이게이트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지구의 동쪽에서 그의 사상의 일면과 공산혁명 그리고 전쟁을 연구해 온 한 학인이 인류 현대사의 가장 거대한 실험을 설계했던 한 사상가와 조용히 대화를 나눈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런데 나는 끝끝내 마르크스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물론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아마 앞으로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위대한 사상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하지만, 잘못된 확신과 결합하면 수억 명의 운명을 바꾸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상가는 자신의 의도만이 아니라 그 사상이 역사 속에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에 대해서도 평가받아야 한다.
나는 인간 마르크스에게는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사상가 마르크스에게는 엄중한 역사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역사학자인 내가 하이게이트에서 한번 더 확인하게 된 결론이다. 결론을 거머쥔 이상, 여기서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다.
아내와 나는 걸음이 빨라졌다. 하이게이트를 나와 잰걸음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달포 가까이 함께했던 여행 가방을 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런던의 하늘은 여느 때와 달리 잿빛이 아니라 햇살이 빛났다. 그리고 잠시 후 히드로 공항으로 향하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으로 런던의 풍경이 천천히 뒤로 흘러갔다. 그리고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불과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하이게이트 묘지에서 한 사람의 역사 인물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질문은 모두 내가 했고,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침묵은 어떤 변명보다 많은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지난 세월 동안 러시아혁명과 공산주의 사상, 중국공산당, 한국전쟁을 연구하면서 공문서, 서한, 일기, 회고록, 신문 보도 등등 적지 않은 문헌들을 읽었고, 모스크바와 뻬이징 그리고 베트남을 비롯한 여러 곳의 혁명과 전쟁의 현장을 직접 찾아다녔다. 그리고 오늘 또 하나의 역사 현장을 돌아보았다. 하이게이트! 그곳은 단순히 한 철학자가 잠든 묘지가 아니었다. 지난 200년 동안 인류의 운명을 뒤흔든 거대한 사상의 출발점이었다.
전철은 조용히 런던 시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문득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다.
마르크스여! 만약 지금 당신에게 다시 한 번 인류의 역사를 설계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과연 같은 이론을 다시 쓰겠는가? 아니면 지난 20세기에 시작된 공산혁명의 결과를 모두 지켜본 뒤 다른 결론을 내리겠는가?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아마 영원히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상은 아름다운 이상만으로 평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실 속에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가 역사의 심판 기준이다. 재차 말하지만, 나는 인간 마르크스에게는 일말의 연민을 느낀다. 망명과 가슴 미어지게 어려웠던 가난, 가족을 잃은 단장의 슬픔은 어느 누구에게도 가벼운 삶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연민으로 2세기에 걸친 장구한 세월 동안 인류를 투쟁과 파괴와 증오를 불러일으킨 이념적 꿈을 제공한 불완전하고 불온한 사상가 마르크스를 용서하고 싶지는 않다. 그의 사상은 인류에게 자유보다 혁명을, 화합보다 계급투쟁을, 관용보다 적대적 세계관을 심어 주었다. 그 결과는 러시아와 중국, 북한과 동유럽,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수많은 희생으로 이어졌다. 역사는 결국 선한 동기와 의도가 아니라 결과를 더 무겁게 기억한다.
전철은 어느새 히드로 공항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3주가 넘는 이번 유럽여행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게이트에서 시작된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공산주의 사상과 전쟁을 계속 연구할 때마다 다시 그 질문으로 돌아올 것이다.
“마르크스여, 당신은 지금 지하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어쩌면 마르크스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히드로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템즈강 상공을 선회할 때, 나는 창밖으로 런던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묵상한다. “안녕히 계시오, 허황된 꿈을 꾼 몽상가여, 마르크스여! 나는 결코, 끝까지 당신의 사상을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2025. 3. 2. 12:27.(현지 시각)
영국 런던 하이게이트 벤치에서 초고
2026. 6. 26. 11:43.
북한산 淸勝齋에서 가필
雲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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