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나옹선사의 혼이 서린 영덕 장육사에서

雲靜, 仰天 2025. 11. 30. 22:11

나옹선사의 혼이 서린 영덕 장육사에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말없이, 티 없이 살며 성냄과 탐욕을 내려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라는 이 시는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청산은 나를 보고’라는 작품이다. 지은이는 고려 말의 나옹선사(懶翁, 1320~1376)란 사실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지도 않게 나옹 선사의 위 시를 그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진 영덕군 소재 운서산(雲棲山) 자락의 장육사(莊陸寺) 입구에서 봤다. 이 시가 나옹당이 창건한 절에 붙어 있는 것이 괴이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장육사는 영덕에 사는 친구 東浪과 내가 오래 전부터 같이 가보기로 했던 절이다. 벼르던 게 다소 늦었지만 이제사 인연이 된 것이다.

출발 당일, 친구 정태영 부부가 합류해서 4명이 됐다. 우리 일행은 포항 죽도시장에서 만나 간단히 점심식사를 하고나서 바로 영덕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장육사에 도착한 시각은 2025년 11월 28(금) 오후 3시 경.

장육사는 일주문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속세와 탈세속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느낌은 없었다. 사찰 경내로 들어가기 직전 제일 먼저 우리를 반겨준 게 바로 입구 오른 쪽 벽면에 쓰여져 있는 위 시였다. 이 한글시는 누구나에게 친숙해서 보면 반가울 것이다. 그런데 원래 이 시는 한글이 아니고 아래처럼 나옹당이 한문으로 쓴 한시였다.

靑山見我無言以生, 蒼空見我無塵以生.
靑山兮要我以無語, 蒼空兮要我以無垢.
聊無怒而無惜兮, 如水如風而終我.

불교 수행의 정수인 방하착을 물과 바람에 실어 표현한 싯구다. 위 한시를 쓴 나옹 선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나옹선사의 진영. (사진 출처 : 현대불교신문사)

우선 나옹당의 출생지가 명확하지 않다. 나도 이 절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가 태어난 고향이 이곳 영덕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계기로 자료들을 찾아보니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었다. 즉 경기도 양주 설과 경상도 영해였다는 두 설이 존재했다.

전자에 의하면, 그는 양주에서 태어나서 회암사에서 수행 생활을 시작했다가 고려 말기 왕사를 지낸 후 마지막엔 여주 신륵사에서 생을 마감한 고승이었다고 하고, 후자로는 아버지 아서구(牙瑞具)와 경상도 영산군 출신 어머니 연일 정씨(延日 鄭氏) 사이에 영해에서 외동아들(무녀독남)로 태어났다고 한다.

다음으로 그가 중국인의 피가 섞인 인물이라는 점이 특이했다. 속가의 이름은 아직(牙直), 법명은 혜근(惠勤)이었지만 호로 왜 하필 “나태한 늙은이”, “게으른 노인네”라는 뜻의 '懶翁'으로 불렸는지도 의문이다. 아마도 자신이 나태해지는 걸 스스로 막기 위해서 警責의 의미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부친 아서구는 원나라 함양(咸陽)에서 출생한 중국인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하급관료로 살았다고 전해진다. 함양이라면 오늘 날 중국 섬서성의 서안(西安)시와 붙어 있는 (咸陽)일 것이다. 부친의 성 아(牙)씨는 그 당시도 많지 않았던 성씨였다. 현대 표준 중국어(보통화)에서 “yá(야)”로 읽히는 “牙”씨는 오늘날도 약 2만에서 2만 4000종(어떤 설은 5만종)이나 되는 중국인의 전체 성씨 중에도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성(稀姓)이다.

나도 지금까지 수많은 중국인들을 만나 봤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성이다. 일상적으로는 거의 접하기 힘들고, 중국에서도 일부 지역, 특히 소수민족 지역(광서, 운남 등 서남방)에서만 드물게 확인될 뿐이다. 아씨의 정확한 기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소수민족 계통에서 한자로 음차된 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것이 아니면 고대 중국 관직명의 별칭이었을 수도 있다. 아뭏든 나옹 선사의 속가 성씨는 아씨였던 것은 분명하다.

중국인의 피가 섞여서 그랬는지 그는 중국에 유학을 한 바 있는데 그가 원(元)나라에서 유학한 해외 물을 먹은 유학파라는 사실이 이채롭다. 그 당시의 유학은 수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가서 공부하고 돌아오는 오늘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시대는 해외 유학을 가는 학자나 승려들은 거의 없던, 아주 드문 시절이었다. 당시 고려인들이 유학을 가서 선진문물이나 지식, 학식, 기술을 배워올 수 있는 선진국은 원나라였다. 그는 원나라에서 지공(指空) 등의 선승들에게 불법을 이어받고 귀국했다.

다음으로 나옹당은 세수로 56세 밖에 살지 못했으니 긴 생애는 아니었음에도 고려 말의 선풍(禪風)을 진작시켰고, 공민왕(恭愍王)의 두 번째 왕사(王師)를 지낸 것이 그의 삶에서 가장 돋보이는 이력이다. 그는 지공(指空), 무학(無學)과 함께 고려 말 3대 고승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지공, 나옹, 무학 세 선사(禪師)의 부도(浮圖)와 사적비(事蹟碑)가 회암사 북쪽 산비탈에 있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돼 있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나옹선사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앞서 본 시의 지은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것이니까 특별히 혼자만 아는 지식이 아니다. 그가 한국 불교사에 어떤 사상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는 자세히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 친구 동랑 덕분에 나옹선사를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니 다시금 주목되는 이력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그가 원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여러 사찰(경북 봉화 청량산, 선산, 길림사 등등)을 거친 뒤 오늘 날의 경기도 양주에 있는 회암사에서 정착하며 제자를 교육하고 선풍을 확립한 점, 그리고 회암사를 고려 말 국가적 선종의 중심지(國禪中心)로 만드는 데 주도하고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정도의 공적이 있는 역사 인물이라면 내가 한국불교사에서 점하는 나옹선사의 위치나 평가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볼 필요가 있다 싶어서 이참에 나옹 선사의 불교사상적 궤적을 조금 추적해봤다.

먼저 나옹이 고려말 흐트러진 선가와 선승들의 계율 지계를 정리하고 엄격히 하는 선풍의 기반을 닦았던 것에 주목할만 하다. 사실, 불교의 3보 중 하나인 승단엔 지계가 조직의 기강을 유지시키고 제대로 굴러가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지계는 가장 중요한 승려들의 자기 긴장이다. 그것이 무너져 내리면 한 마디로 승단이 혼탁한 속세와 다를 바 없게 된다. 고려시대는 경제적 부가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사찰도 토지를 소유하고 먹을 거리, 입을 거리와 몸 눕히는데 부족함이 없이 풍족하게 됐다. 결국 고려 말에 이르러선 승단이 정치·경제의 혼란과 부패에다 그것들이 원인이 돼 교단이 분열되면서 불교계 전체가 무너지고 있던 중이었다. 그것이 결국 승려들이 계만 잘 지켰더라면 속인들처럼 쉽게 자신이 속물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나옹 선사가 나서서 승가의 규범, 예절과 계율의 회복을 강조하면서 승단 정화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건 그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상당히 개혁적 성향의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그가 그런 역할을 한 도량이 바로 회암사였다. 회암사는 나옹이 선과 교를 전파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한 도량이기도 했다.

회암사는 고려 후기에는 국가에서 중국 임제종 계열의 선풍을 진흥시키는 주류 도량이었다. 고려 말~조선 초엔 공민왕, 우왕, 창왕 시대에 국찰(國刹)로 발전했고 최대 규모의 왕실 후원 선찰(禪刹)이었다고 한다. 왕실의 후원이 있게 된 것은 공민왕이 나옹당을 신뢰해서 왕사(王師)로 삼았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회암사에 자주 행차했다고 한다. 나옹이 왕사로서 공민왕과 교류함으로써 나옹의 언행과 가르침이 왕실 정책에도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력한 지원자가 나서주지 않으면 기독교든, 불교계든 짧은 시간안에 종단 차원의 발전은 이루기 어렵다. 즉 나옹은 공민왕의 유력한 지원하에 왕사라는 힘으로 회암사를 국가의 선종 중심 대도량으로 키울 수 있었던 셈이다. 회암사가 그 시기 정치, 문화, 불교의 중심으로 위상이 높아진 배경이었다. 요컨대 회암사의 위상을 ‘국찰’로 만든 인물이 호와 달리 부지런했던 나옹 선사였다.

이런 영향력을 배경으로 회암사는 국가 중심 지도 이념이 불교에서 유교로 바뀐 조선 왕조 초기까지도 한동안 권위를 유지했다. 태조에서 제4대 임금 세종 시기에 이르기까지 흥국사를 창건하게 한 태조와 세종처럼 일부 왕들이 불교나 나옹당에 관심을 보인 기록도 있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엔 ‘懶翁’이 12번 나오는데 대부분 조선초의 이 시기에 집중돼 있다. 여기서 말이 길어지겠지만 잠시 조선 초기 유교의 신흥 관료 세력들의 눈에 비친 불교나 나옹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살펴보고 가겠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환관의 제어, 불교의 배척, 여자의 외출제한 등 12개 조목을 건의한 대사헌 남재(南在) 등이 태조 이성계에게 상언(上言)한 내용이다.

“공민왕(恭愍王)은 해마다 문수 법회(文殊法會)를 개최하고 보허(普虛) 와 나옹(懶翁) 을 국사(國師)로 삼았는데, 보허와 나옹이 모두 사리(舍利)가 있었지만, 나라의 멸명을 구원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일로 미루어 생각한다면,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설(說)은 믿을 것이 못됨이 명백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불교의 청정 과욕(淸淨寡欲)을 흠모하려 한다면, 선왕(先王)의 공묵무위(恭默無爲) 사상을 본받을 것이고, 불교의 자비 불살(慈悲不殺)을 본받으려 한다면 선왕의 능히 관인(寬仁)하고 능히 호생(好生)하는 덕을 생각할 것이고,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설(說)을 두려워한다면 선한 자를 상주고 악한 자를 처벌하고, 죄 가운데 의심나는 것은 경하게 처벌하고, 공 가운데 의심나는 것은 중하게 상주는 것으로 규범을 삼을 것입니다. 이같이 한다면 다만 백성들만 그 은택을 입을 뿐만 아니라 천지 귀신도 또한 몰래 돕게 될 것입니다.”

위 내용에서 선한 자를 상주고 악한 자를 처벌하자고 주청한 것은 딱히 불교 사상만의 영향은 아니다. 유교의 권선징악 개념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이 시기 보다 조금 앞서 중국 송대에서 유학자들이 불교의 사상을 대폭 받아들여 유교사상의 뼈대를 세운 바 있듯이 중국에서 유학이 들어온 여말선초에 조선의 유학도 불교사상의 주요 개념들이 습합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위 간언에서 남재가 왕에게 “인과응보의 설을 두려워한다면”이라는 말이 단서가 될 수 있다. 한국사상사에서 유교의 틀이 잡히는 과정에서 불교의 사상이나 교리가 영향을 미친 것을 주제로 연구하면 아마도 박사학위 논문이 최소한 몇 편이 나올 것이다.

물론, 불교가 긍정적으로 평가된 것만이 아니라 부정적으로 논의 평가된 사실도 같은 비중으로 유념해야 한다. 나옹의 사상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아래처럼 말이다.

“보허와 나옹은 모두 사리(捨利)가 있고 득도(得道)하였다고 칭하였으나, 공민왕의 화(禍)를 구제하지 못하였고, 공양왕(恭讓王)의 부처를 섬김이 또한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마침내 나라가 망하고 말았으니, 나라를 돕고 복을 빈다는 말이 진실로 믿을 수 없습니다.”(태종실록 10권, 태종 5년 11월 21일)

나옹의 이력 중 두드러지게 시선을 주목시키는 부분은 아무래도 불교사상적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간화선 중심의 실참 불교”를 정립한 점일 것이다. 불교 교리 측면에선 당시 고려 말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던 승단에 “실참+ 교학”의 조화라는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말 혼란 속에서 나옹이 간화선 중심의 수행체제를 정비한 것이 하나의 흐름이 돼 그의 수행법이 무학을 통해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조선시대 선문이 ‘화두 수행 중심’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나옹은  제자들에게 선과 교(禪敎)를 병행해서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 즉 간화선으로 화두를 참구하면서도 경전의 이해도 게을리하지 않도록 했다. 정혜쌍수를 지향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간화선 중심의 수행체제를 정비했다.

그런데 이외로 자료를 찾아보니 나옹 선사의 저작은 많지 않았다. 그의 저술은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을 중심으로, 시·게송·법어가 제자들에 의해 편집된 형태로 전해지는 게 전부다. 이 책도 그가 직접 집필한 게 아니고 제자들에게 준 가르친 법문과 선문답 성격의 선시들의 모음집이다. 나옹의 글은 사후에 제자들이 정리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주로 어록(語錄), 시집 형태의 모음과 잡록(법문과 시의 혼합)이 주종을 이룬다. 이 점에서 불교사상의 요체를 건드려 자기식으로 재해석한 대승기신론소나 화쟁십문설 등의 저서를 남긴 원효 성사와 대비된다.

나옹선사의 대표작은 '나옹화상어록'이다. 이 책엔 그가 제자나 신도에게 내린 짧은 법어(法語)가 많은데 매우 간결하고 직설적이며, 때로는 불교의 선문답을 기록한 공안(公案) 형식을 띄고 있다. 이외에 깨달음의 순간을 표현한 게송이나 시문이 제법 된다.

이 시들은 오언·칠언의 한시로 불교의 무상(無常)과 공(空)을 노래한 선시(禪詩) 위주다. 우리가 장육사 입구에서 본 시도 그런 것이다. 나옹이 선적 통찰이 뛰어난 시승(詩僧)으로 알려진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 참에 인터넷상에서 나옹 선사가 쓴 것처럼 소개되는 시가 있던데 그것은 나옹의 시풍과 비슷해보이긴 하지만 그의 작품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무상(無常)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한 아래 시도 그 중 하나인데 통상 '生死浮雲偈'이나 '無常偈'라고 명명되고 있다.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삶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짐이라.
뜬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으니
삶과 죽음이 오가는 것 역시 그러하다.

각설하고, 전체적으로 나옹의 저술에 나타난 사상적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바 세계의 현실 속에서 수행해야 한다는 정신에 입각해 시와 노래로 설법하고 민중 교화를 강조한 점 그리고 마음 하나가 세계를 가린다는 선종 특유의 “직지인심”(直指人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나옹과 함께 고려 불교의 세 축을 이룬 지눌과 보우의 사상과 조금 거리가 있는 대목이다. 나옹이 실천과 감성으로 중생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어필했다면 지눌과 보우는 각기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정통 선은 무엇인가”에 방점을 찍어놓았기 때문이다. 나옹의 정신과 사상은 오히려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저잣거리에서 포교하면서 마음이 곧 부처임을 강조하며, 집착을 제거하고, 형식화된 불교와 귀족화된 불교를 비판한 원효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한 것으로 판단된다.

벌써 글이 너절하게 많이 길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옹 선사의 사상이 후대 불교에 미친 영향에 대해선 도저히 건너뛸 수 없다. 글의 정수나 결론이 빠진 글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몇 가지를 더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불교가 숭유억불 정책으로 많이 위축되었지만, 나옹선사가 조선 초기 불교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고, 그의 법맥은 조선 불교의 핵심 인물 무학(義天)대사를 통해 새로운 방향으로 이어졌다는 게 불교사상계의 평가다. 무학대사는 나옹 문중에서 배출된 제자들 중에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나옹의 대표적인 제자로서 간화선, 실참 강조한 나옹 선사의 선풍을 충실히 계승한 법기(法器)였다. 그가 스승 나옹의 법을 이어받음으로써 여말선초의 불교사에서 매우 큰 변곡점이었던 시기에 나옹에서→ 무학→ 조선 초기로 선(禪) 법맥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비록 조선조 초기에 정권 차원에서 국가적으로 불교가 억압되었지만, 나옹이 정립한 간화선·계율 중심의 선풍이 조선에서도 유지되어 한국 선종의 주된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공적이다. 조선 초기 불교가 정치의 주류에서 밀려났음에도 무학, 함허 등 선승들이 문화·사상적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옹 선사의 사상적 뿌리가 컸다.

이러한 이판 외에 나옹 선사의 사판 정신도 불교 종단의 제도·교단 운영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 억불정책 속에서도 나옹이 체계화한 계율 중심의 승가 질서가 살아남아 후대 선문 운영의 토대가 됐다는 평가도 있다.

나옹 선사의 사상이 제자 무학을 통해 조선 초기 문화 면에도 간접적 영향을 미친 점도 기억할만 하다. 나옹이 입적한 뒤 무학은 회암사를 중심으로 법맥을 이어가며 태조 이성계와 관계를 맺는 등 조선 개국 세력과도 교류했다. 그는 태조 이성계의 정신적 멘토 역할을 하면서, 조선 초기 경복궁·한양 도성의 터 선택 등 왕조의 궁궐·도성 건설에도 도참사상을 가지고 조언했다. 불교적 이론과 사상 등이 왕실의 궁중 문화·건축(풍수 논리)으로 연결된 것은 직접적으로는 무학 대사의 역할이었지만, 그 기반에는 그의 스승 나옹 선사가 심어 놓은 선풍과 사상적 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태조 이성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또 태조가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는 아래 이성계가 그를 평가한 글을 보면 단박에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 지공 대사(指空大師)·나옹 대사(懶翁大師) 이후에 내(태조)가 보고 아는 바로서는 한 사람의 중도 그 도에 정통한 자가 없었다.”(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7월 8일.)

반면, 태조 사후 나옹에 대한 평가는 유교 세력이 유교이념을 국시로 내세운 이상, 전조인 고려를 부정하는 측면에서 불교를 매도했듯이 나옹선사도 도매금으로 부정 일색이다. 예컨대 성균관 생원 이영산(李永山) 등 6백 48명이 동시에 세종 임금에게 불교의 폐단에 대해 상소하면서 고한 주청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신 등은 또 듣건대, 전조(前朝)의 말기에 중 나옹(懶翁)이 있어서 허무적멸(虛無寂滅)의 가르침으로써 어리석은 무리들을 유혹하였습니다. 당시에 이를 추대하여 ‘생불(生佛)’이라고 지목하여서, 천승(千乘)의 존귀(尊貴)한 몸을 굽혀서 천한 필부(匹夫)에게 절하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나라의 형세가 그 후로 기울어졌고 우리 유교가 점점 쇠퇴하였사온데,(하략)”(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4월 18일.)

끝으로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난다. 나옹 선사가 양주 출신이었다면 그가 어째서 이 먼 영덕까지 와서 장육사를 지었을까? 나옹 선사와 장육사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까 창건에 얽힌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밝힌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이곳 스님들이라도 있었으면 그들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장육사의 사찰 명칭에 관한 연구는 조금 보여서 이에 관해 핵심만 소개하고 이 긴 졸문을 마칠까 한다. 현재 이 절의 현판과 문화재로서의 공식 명칭은 莊陸寺이지만 이 외에 丈六寺, 藏陸寺 등 몇 가지 다른 한자 이름이 존재한다. 셋 중 어느 한자명이 옳은 것일까하는 하는 게 의문이다. 이 문제는 이 절이 丈六佛像과 관련이 있었는가 하는 의문과 관련이 있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현 莊陸寺는 ‘丈六佛 사찰’로 단정할 기록과 근거가 없으며, 莊陸寺나 藏陸寺로 쓰인 것은 세월이 흐르면서 “장육”이라는 소리를 먼저 적어놓고 거기에 맞는 같은 음의 한자 '莊陸'이나 '藏陸'을 붙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즉 장육이 의미어라기보다 ‘지명화된 표기(음차·차자)’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자~ 이제 마무리를 짓자. 이번 졸고에선 장육사의 가람 배치와 유물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생략했다. 한국의 사찰은 창건 연대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자연 지세에 따라 형성된 것이 많다. 장육사도 그 중 하나로 보인다. 법당에 있는 유물들은 문을 잠궈놔서 구경도 못했다. 또 장육사를 찾은 감회도 조략해서 쓰지 않았다. 사찰 내 건물들이 다 문이 잠겨져 있었고, 심지어 요사채까지도 문이 잠겨 있고 입구엔 일반인들이 못 들어가게 빗장까지 쳐져 있었다. 그래서 스님들과 차도 한잔 못했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 무렵에 날씨가 차서 같이 간 친구들과도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감회에 갈음해서 한시 한 편 쓰는 걸로 만족한다.

靑山無言勸無住
蒼穹無垢示淸淨
性難改易塵未盡
吾願如風水流逝

貪嗔捨盡翁勸我
同友來依聽法音
人生如水隨風逝
我們奔馳效汝躡

푸른 산은 말 없이 머물지 말 것을 권하고,
창공은 티 없이 청정함을 보이네.
본성은 바꾸기 어렵고 번뇌 다하지 않으니,
나는 바람과 물처럼 흘러가길 바라오.

탐욕 성냄 다 버리라 선사께서 권하시니,
친구들과 함께 가르침 따르려 왔네.
인생은 물처럼 바람 따라 흘러가니,
우리도 그대의 길을 따라 달려왔소이다.

2025. 11. 30. 22:11.
고향 포항집에서 초고
2026. 3. 16. 13:54.
일산 향동에서
雲靜 가필

우리 세 사람이 갔을 때는 종무소, 요사채 등의 주요 건물이 전부 문이 잠겨져 있었다. 사람 사는 흔적은 보였지만 공교롭게도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일행 외에는 관광객이나 방문객도 한 사람 보지 않았다.
운서산으로 들어가는 운서교
운서 산방
이 사찰이 어떻게 건립되었는지 유래에 대해서는 설명이 턱없이 미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