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낙후성, 식민지의 잔영인가? 새로운 질곡의 결과인가?
이번이 세 번째 인도 여행이다. 인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은 적어도 생활환경과 사회 인프라의 측면에서 인도는 아직도 낙후된 모습을 적지 않게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세계 5위의 경제 대국이라는 위상과는 대조적인 풍경도 곳곳에서 마주쳤다. 그렇다면 이러한 낙후성의 원인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영국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 때문일까, 아니면 독립 이후 인도 정부의 정책적 실패 때문일까?
인도의 하층 계급은 기득권층에 대한 저항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은 역사가 없었기 때문일까? 물론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체의 역사와 정치의식을 어떻게 공유했는가는 사회 변동의 중요한 변수였음은 분명하다. 그 상관관계는 앞으로도 더 깊이 천착해 볼 문제다.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인도에는 역사가 없다고 말했고,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역시 인도는 “시간의 이빨 속에서 식물처럼 성장했으며 역사는 계속되는 침입자의 기록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역사가 없는 인도', '역사성이 부족한 인도'라는 관념은 근대 영국의 인도 통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다. 역동적인 역사를 가진 영국이 정체된 인도를 근대 세계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도사 전공자인 이옥순도 『인도에 미치다』의 프롤로그에서 이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발상은 19세기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논리였다. 유럽 열강은 자신들을 문명국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미개 사회로 규정하면서 식민 지배를 '문명화의 사명'이라고 포장했다. 일본 역시 메이지유신 이후 같은 논리를 받아들였다.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후진적인 조선을 문명으로 이끈다는 명분 아래 식민통치를 정당화했던 것이다. 제국주의는 총칼만이 아니라 역사관까지 함께 수출했다.
그러나 기록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 사회가 열등하다는 뜻은 아니다. 인도에는 방대한 서사시와 종교 문헌, 철학과 구전 전통이 존재했다. 다만 그것이 서구식 연대기 중심의 역사서와 달랐을 뿐이다. 서구 지배자들에게 맞서고자 했던 인도의 민족주의자들은 오히려 그들의 방식을 역으로 받아들였다. 19세기의 1880년 벵골의 민족주의 작가 밴킴 찬드라 차토파디야이(Bankim Chandra Chattopadhyay, 1838~1894)는 “우리도 역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의 역사 의식을 강조하였다. 그는 “인도인도 자신들의 역사를 가져야 한다”는 역사의식을 일깨운 초기 민족주의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요컨대 역사서를 쓰지 않고 시와 신화를 남겼다는 이유만으로 인도인을 야만인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인도의 낙후성을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은 모든 원인을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찾는다. 실제로 영국은 인도를 원료 공급지이자 상품 시장으로 이용했고, 전통 수공업은 크게 쇠퇴했으며 철도와 항만 역시 인도인의 발전보다 제국의 수탈을 위해 건설된 측면이 강했다. 식민지 말기에는 빈곤과 기근도 반복되었고, 독립 당시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인도를 이해하려면 영국 식민통치의 상처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현재의 인도를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1947년 독립 이후에도 인도는 수십 년 동안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 경제 노선을 선택했다. 허가와 규제로 기업 활동을 억제한 이른바 '라이선스 라지(License Raj)'는 민간의 창의성과 투자를 크게 위축시켰다. 복잡한 관료주의와 비효율적인 공기업, 만성적인 부패는 경제 성장을 가로막았고, 세계 시장과도 오랫동안 거리를 두었다. 같은 시기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이 수출 중심 산업화를 통해 빠르게 성장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결국 오늘날 인도의 낙후성은 식민지의 유산과 독립 이후 정책 실패가 서로 겹쳐 만들어진 결과라고 보는 것이 보다 객관적이다. 식민지배는 출발선을 크게 뒤로 물렸고, 독립 이후의 정책은 그 격차를 충분히 만회하지 못했다. 만약 모든 책임을 영국에만 돌린다면 독립 이후 수십 년의 정책 실패를 설명할 수 없고, 반대로 모든 책임을 인도 정부에만 돌린다면 식민지배가 남긴 구조적 상처를 외면하게 된다.
1991년 경제개혁 이후 인도는 비로소 시장경제를 확대하고 규제를 완화하면서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정보기술 산업의 성장과 중산층의 확대는 새로운 인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럼에도 도시와 농촌의 격차, 교육 수준의 불균형, 관료주의와 부패, 카스트의 사회적 잔재는 여전히 인도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인도의 미래는 식민지의 과거를 얼마나 극복하느냐보다 독립 이후 스스로 만든 새로운 질곡을 얼마나 걷어내느냐에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카스트 제도 역시 법적으로는 오래전에 폐지되었다. 인도 헌법은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으며, 적극적 우대정책까지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지방의 작은 촌락에서는 아직도 카스트 의식이 생활 속에 남아 있다. 상당수 중산층 가정은 불가촉천민 출신과의 혼인을 꺼리고, 직업과 사회적 관계에서도 보이지 않는 장벽이 존재한다. 법은 바뀌었지만 사람들의 의식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례다.
인도가 전쟁을 많이 치른 것도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의 하나다. 인도인과 파키스탄인은 오늘날에도 자유롭게 상대국을 왕래하기 어려운 관계다. 두 나라는 1947년 분리독립 이후 세 차례의 전쟁을 치렀고, 카슈미르 분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서로를 사실상 최대의 적국으로 인식하고 있다. 인도인들이 가장 경계하는 나라 역시 파키스탄이다. 그 다음으로 중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이는 1962년 중인전쟁의 패배와 국경 분쟁, 티베트 문제, 그리고 최근까지 이어지는 히말라야 국경의 군사적 충돌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역사적 기억은 국경을 넘어 오늘날의 외교와 국민감정까지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에 대한 평가 및 인식을 이 글의 결론 격으로 제시할 수 있다. 즉 한 마디로 “영국이 출발선을 망가뜨렸지만, 독립 이후 수십 년간의 정책 실패가 그 낙후를 더욱 고착시켰다”고 볼 수 있다.
2025. 1. 28. 12:03.
뭄바이 기차역 대합실에서
雲靜 초고































'왜 사는가? > 여행기 혹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도를 떠나면서 (0) | 2025.01.30 |
|---|---|
| 두 세계의 뭄바이, 세계 최고 부호와 최대 빈곤이 공존하는 곳 (0) | 2025.01.30 |
| 인도 제2의 도시 뭄바이 입성 : '뭄바이' 유래, '게이트웨이'와 헌책방 탐색 (0) | 2025.01.28 |
| 코지 코드를 떠나면서 (0) | 2025.01.25 |
| 세 번째의 인도 입국, 주마간산 식의 첸나이 정부 박물관 견학 (0) | 2025.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