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의 인도 입국, 주마간산 식의 첸나이 정부 박물관 견학
내가 탄 비행기는 스리랑카 옛 수도 콜롬보의 푸른 하늘을 솟아 오른 후 정확하게 1시간 20분을 날아갔다. 그 사이 나는 혼곤히 한 숨 잤다. 덜커덩! 활주로 착지 소리에 깨어보니 비행기가 막 인도 동남부 지역의 최대 거점 도시 첸나이(Chennai)의 타밀나두(Tamil Nadu) 국제공항에 도착한 찰나였다. 지기개를 켜면서 시계를 봤다. 정확히 2025년 1월 21일 오후 6시 25분이었다.
모든 초행길은 순조롭지 않기 십상이다. 말이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해외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이번이 세 번째 인도 여행이고 '마드라스'(Madras)라는 이름은 옛날부터 익히 알고 있었어도 '첸나이'는 초행지다. 인구 800만 명이 넘는 인도 제4의 도시인 첸나이! 옛날 내가 자랄 때 중학교 지리시간에 “마드라스”라고 배운 곳이다. 또한 중고등학생 시절, 내고향 포항항에 입항한 작은 키에 까무잡잡한 인도 선원들이 자주 내가 살던 북부시장에 부식거리를 사기 위해 장을 보러 왔는데 이곳 마드라스 출신들이 많았다. 그래서 일찍부터 마드라스는 내 머리속에 각인돼 있던 도시였다. 지금은 현대자동차의 인도 현지 공장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도 입국 첫날, 첸나이 공항에서 도착 비자는 순조롭게 받았다. 비자비는 미화로 50달러였다. 절차도 간단하고 출입국 관리 직원들도 친절했으며, 나하고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여유까지 있었다. 두 직원이 입국심사를 하는데 한 사람은 부스 안에 앉아서 나의 여권과 컴퓨터 모니터를 번갈아 보면서 있고, 다른 한 직원은 그 부스 옆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낸 입국신고서를 보던 직원이 나에게 물었다.
직원 1(Staff1) :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인 것 같은데 인도에는 무슨 일로 왔습니까?”(“This seems to be your third visit. What brings you to India?”)
멀대(Meldae) : (싱글거리며) “관광입니다만, 이번엔 사두 수행자를 직접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smiling) (“I'm just sightseeing, but this time I came because I wanted to see the Sadhu practitioners in person.”)
'사두'란 나이가 들어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 되면 집과 처자식을 버리고 히말라야나 바라나시 등 전국의 명소를 떠돌면서, 아니면 적당한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삶에 더 이상의 미련도, 욕심도, 집착도 버리고 수행이랍시고 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떠돌이 수행자를 말한다.
직원 2 (Staff 2) : “오호! 그래요?”
(“Oh! really?”)
멀대(Meldae) : (계속 싱글거리며) “보고 괜찮다 싶으면 나도 그렇게 살아볼까 싶어서요!
(still chuckling) (“If it looks good, I thought I'd try living like that!”)
직원 2(Staff 2) : “보아하니 당신은 아직 많이 젊어보이는데요?” (“You still look quite young, don't you?”)
멀대(Meldae) : “삶과 죽음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건가요!” (웃음) (“Is life and death something you can control?”) (laughs)
직원 1(Staff 1) : “그래도 사두를 하기엔 젊습니다.” (웃음) (“But you're still young to become a Sadhu.”) (laughs)
멀대(Meldae) : “아닙니다. 난 세상살이에 미련이 없습니다!” (웃음) (“No. I have no regrets about life!”) (laughs)
직원2 (Staff 2) : “좋아요! 괜찮은 곳을 보게 되면 나에게도 알려주십시요. 나도 이런 삶이 지겨우니까요.” (웃음) (“Good! If you see a good place, please let me know. I'm tired of this kind of life, too.”) (laughs)
꽝! 도장 찍는 소리와 함께 유쾌한 농을 주고받은 뒤 나는 잰걸음으로 입국수속장을 떠났다. 등에 짊어진 배낭과 작은 가방이 전부여서 수하물도 찾을 게 없어 기다릴 필요도 없다. 바로 보세구역을 빠져나갔다. 내가 인도 화폐 루피로 얼마를 환전한 뒤 공항 청사를 나가니 사방에 깔린 어둠 속에 자코메티의 조각작품처럼 앙상하고 높게 솟은 가로등만 밤을 밝히고 있었다. 첸나이 국제공항은 지하통로로 전철역과 연결돼 있는 곳도 있었지만 전철 타는 곳을 모르고 청사 바깥으로 나가면 전철역은 조금 걸어가야 할 만큼 거리가 있다.
이윽고 나는 예약해놓은 호텔 방향으로 가는 전철에 올라탔다. 전철을 타자마자 머리속에 훅 떠오르는 첫인상이 여기는 한국과 다른 다민족 국가라는 점이었다. 피부색부터 얼굴 모양, 말 등이 각양각색이었다. 나를 쳐다보는 그들도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도 일본인이거나, 한국인일 거다." 아니면 “또 중국 놈이 한 놈 들어오는구나”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알다시피 중국과 인도는 중국과 베트남만큼이나 견원지간이다.
핸드폰으로 지도를 보면서 우선 내가 내릴 첸나이 시내 전철 에그모어역(Egmore Station)의 위치를 찾아봤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도 아직 첸나이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못해서 조금 신경이 쓰였다. 물론 인도 서해안의 케랄라(Kerala)주 코치(Kochi)에 가는 건 변함 없지만 어디를 거쳐 어떻게 갈 것인지 노선을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처음엔 육로로 내륙의 IT산업 중심 도시인 뱅갈루루(Bengaluru)로 가서 2박 3일 정도로 보고 그곳에서 밤차를 타고 캐랄라주로 갈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교통편과 이수를 꼽아보니까 도저히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이윽고 에그모어역에 도착! 내가 역에서 내려 근방의 도로(17 Whannels Road) 길가 샤르마 레지던시(Sharama Residency)에 도착하니 이미 밤 10시가 넘었다. 여인숙을 보니 형편없는 시설이었다. 이런 곳에서 며칠을 머물 수 있을까? 첵크 인과 동시에 나는 첸나이에선 하룻밤만 머물고 이튿날 밤에 바로 비행기로 코치로 날아가기로 결정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어떨 때는 과감하게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다. 이번 케이스가 그런 경우다. 이곳 첸나이에서도 낮엔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지친다 싶으면 차를 타거나 하면서 가고 싶은 대로 돌아다녀볼 생각이었다. 그 가운데 첫번째 볼거리로 첸나이 시정부 박물관(Government Musium Chennai)을 정했다. 따라서 이번 여행기도 박물관 관람기가 주된 내용이 될 것이다.
오늘은 그 첫날 밤이다. 처음 첸나이에 도착해서 내가 찾아간 이 “호텔”은 인도 서민들이 여행할 때 많이 이용하는 저렴한 숙소였다. 인도에선 말이 호텔이지 시설과 서비스 면에서 한국의 허름한 여인숙보다 못한 곳이 대부분이다. 하룻밤에 한국돈 10,000원(정확히 9,927원) 정도의 최저가 싸구려 여인숙이었다. 방 하나에 대략 2~30명이 자는 도미토리니까 완전 싸구려다.
이런 숙소에 머물면서 뭔가를 기대하면 안 된다. 실내에는 칸막이 없이 딱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침상들이 빽빽히 놓여 있고, 전등도 희미하고 해서 방안은 동굴 속같이 어두컴컴하다. 냄새도 나고, 좁은 공간에 딱 한 사람만 누울 만큼 침상도 작다. 다행히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눈도 침침해지고 후각도 퇴화되고 있는 중이어서 '노 뿌로브람(No problem)!'이다. 나이 들어가는 게 아쉽기만 한 게 아니다. 좋은 점도 있다. 나에겐 거부감이 전혀 없어 개의치 않았다. 더운 날씨에 새벽부터 일어나 스리랑카에서 이곳까지 오면서 하루 종일 쉬지를 못해서 피곤했기 때문에 침상에 드러눕자마자 바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 여행 일정은 아침에 일어나서 밝은 곳에서 계획을 잡기로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곯아 떨어졌다.
나는 한국에서든 외국에서든 자리에 누우면 5분이면 잠이 든다. 침상이고, 의자고, 땅바닥이고 간에 가리지 않는다. 완전 자동이다! 이 자동 入睡가 해외여행지에선 더 빠르게 가속도가 붙는다. 비결은 마음을 비워내는 것이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인도에서의 첫날밤은 동굴 속에 사는 원시인들처럼 그렇게 칠흑 같이 깊어갔다.
다음날, 새벽 일찍 눈이 떠졌다. 실내는 어두워서 날이 밝았는지 새벽인지 알 수가 없지만 나의 몸시계로는 대략 6시가 덜 되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일어나서 방을 나가 바깥을 보니 날이 훤하게 밝았지만 시각은 정확하게 5분 전 6시였다. 화장실이 샤워실과 겸용으로 쓰도록 돼 있는 공용이어서 아침엔 이용자가 많아서 용변도 차례를 많이 기다려야 하고 샤워도 안심하고 마음껏 할 수 없었다. 며칠째 먹은 게 별로 없으니 화장실은 급할 것도 없다. 몸은 조금 땀으로 끈적거렸지만 샤워는 짐이나 달러를 털려도 괜찮을 만큼 부자이거나 강심장이 아니면 생략하는 게 현명하다. 빈한한 나는 간단하게 고양이 세수만 하고 짐을 챙겨서 바로 여인숙을 체크아웃했다.
아 참, 오늘 첸나이를 돌아다니려면 실탄부터 장전해야지! 여인숙 카운터에 물어서 가까운 뒷골목의 환전상에 가서 일차로 우선 미화 500달러를 루피로 바꿨다. 환율이 어젯밤 첸나이 공항보다 훨씬 좋았다. 대충 비교해보니 공항 환전소에선 수수료로 떼간 게 전체 금액의 5분의 2 가까이나 됐다. 날도둑놈들 같으니라고! 물론, 나는 오랜 여행 경험에서 미리 그럴 것이라고 판단해서 20달러 밖에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큰 손해는 보지 않았지만!
자, 이제 오늘 돌아다닐 계획을 세워야 한다. 우선 아침밥을 먹으면서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아침 7시 반도 되지 않았지만 벌써 첸나이 거리는 출근길 상황으로 분주하기 시작했다. 멀리 갈 거 없었다. 나는 한길가 좌판에서 뜨네기 인도인들과 같이 앉아서 식사를 했다. 오물 냄새도 나고 쓰레기들이 마구 버려져 있는 곳이긴 했지만, 현지인들이 먹는 밀가루 반죽을 구운 것에다 계란 후라이와 붉은 양파조각을 올려 먹으니 꿀맛이다. 내가 먹은 건 아마도 이름이 로띠(Roti)이거나 푸리(Puri)일 것이다. 팬 위에 간단하게 굽는 로띠와 달리 푸리는 밀가루 반죽을 작게 동그랗게 펴서 뜨거운 기름에 튀기는 것이다. 그러면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 오르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식감이 부드러운 빵 같이 된다. 내가 먹은 건 모양과 맛이 후자였으니 푸리가 맞다. 인도는 남인도와 북인도가 문화적으로 많이 차이 난다. 음식도 그 중에 하나다. 로띠는 북인도에서 많이 먹는 음식이다.
인도인들처럼 아침식사로 푸리 두 조각에다 계란 후라이 2개와 양파 몇 조각으로 때우는데 한국돈 1,000원이 안 든 저렴한 식사였다. 인도를 오래 여행하다 보면 입 짧은 한국인들에겐 이 정도 식사는 호강에 속한다. 나는 거의 매일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매 끼니 마다 면이나 바나나, 사과, 수박 등의 과일만 먹으면서 다녔다. 그러다가 어제 스리랑카 니곰보의 중국식당에서 먹은 중국 음식에 이어서 뜻밖에 오늘도 맛있게 먹게 된 것이다. 식사 후, 맨 먼저 찾아가보기로 한 곳은 원래 계획대로 첸나이 정부박물관이었다. 그걸 보고나면 그 다음은 시가지를 보면서 걸어 산토니 성당에 가보기로 하고 식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행동에 나섰다.
첸나이 정부박물관은 전철 에그모어역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세 바퀴 자동차 “툭툭” 기사와 흥정해서 차비로 50루피를 주기로 하고 갔으니 나의 공간감각으로는 대략 3km 정도 쯤 떨어진 거리였다. 출근길 교통에 조금 밀려서 대략 30분 정도 지나 박물관 문앞에 도착했다. 정문에서 바라보니 박물관은 중급 정도의 규모로 보였다.
일반적으로 박물관학에선 소장품에 따라 종합박물관과 전문박물관으로 나누고, 또 대상에 따라 어린이 박물관, 장애인 박물관으로, 전시 방법에 따라 실내박물관, 실외박물관, 가상 박물관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나는 이 박물관이 어떤 성격의 박물관인지 전혀 모르고 왔다. 말 그대로 나그네처럼 발길 닿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또 전문박물관 중 인문계 박물관으로는 고고학박물관, 미술박물관, 민속박물관, 역사박물관, 종교박물관, 민족학박물관 등이 있고, 자연계 박물관으로는 자연사박물관, 지질박물관, 과학박물관 등이 있다. 안내판과 관내 약도엔 설명이 조금 돼 있지만 이제 들어가 보면 정확히 알게 될 것이다.


개관 시간인 9시 30분까지 기다렸다가 들어가려니 첫 관문인 박물관 입장료가 눈에 거슬린다. 인도인 성인은 한 사람 당 50루피였는데 외국인은 그보다 다섯 배나 더 많은 250루피라니! 외국인을 환영한다 해놓고 이곳에선 외국인을 차별한다. 인도도 중국처럼 사람이 많고 땅덩어리만 크지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대국”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내 장담한다. 당당하고 관대한 대국이란 지구상에 단 한 나라도 없다!
물론, 나는 이미 1990년대 한동안 인도처럼 외국인을 대상으로 내국인과 다른 이중 가격 정책을 썼던 중국에서 경험한 바 있어 낯선 게 아니었다. 과거 내가 수도 없이 자주 오갔던 중국에선 아예 화폐가 내국인용과 외국인이 쓰는 것이 달랐다. 과거 중국, 인도 외에도 저개발 국가인 북한, 미얀마,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등 사회주의 국가들에선 전부 이런 식이었다.
250루피라 해봤자 우리돈으로 4,000원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인도인과 외국인의 입장료 차이를 800원 대 4,000원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근거가 무엇일까? 인도를 찾는 외국인이 모두 인도인들보다 다섯 배 더 잘 산다는 소린가? 인도엔 세계적인 갑부가 적지 않는데 이런 곳엔 구경 오지도 않겠지만 인도 부유층인 그들에겐 외국인들보다 5배나 싸게 보도록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어차피 외국인들에게 욕 먹을 거 돈이라도 좀 많이 받자는 심보인가? 인도를 여행하는 외국인이 어디 나 혼자뿐이겠는가? 아뭏든 이렇게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덤터기 씌워서 거둬들이는 외화 수입은 인도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재정에 적지 않게 도움이 될 것이다. 국가 이미지가 나빠지는 걸 염려하기 보다는 수익을 우선시한 셈이다. 명분보다 실리를 더 선호하는 정신성을 지닌 인도인다운 거래(?)다. 이 특성은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완벽하게 중국인들과 닮았다. 한국인과는 판이하게 다른 점이다.






이윽고 관람시간이 돼서 안으로 들어갔더니 맨 먼저 박물관의 메인 전시관 가는 도중 박물관 경내 야외에 전시돼 있는 각종 오래된 철포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래 사진 속의 대포는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직물상이 가져온 것이라고 소개돼 있다. 시기는 1762년으로 돼 있지만 대포의 양식을 보면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고, 아마도 스페인군이 사용한 게 아닐까 싶다. 오래된 옛날 일이지만, 나는 약 35년 전 쯤에 필리핀을 세 번에 걸쳐 석 달을 여행한 적이 있다. 내 기억에 그 당시 그곳에서 내가 본 유사한 무기 장비들이 많았는데 그 광경이 오버랩 된다.




야외 전시물들을 보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노라니 유치원생들로 보이는 한 무리의 아동들이 줄지어서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인솔 교사들도 여럿이다. 이들을 보니 또 다시 역시 다인종의 나라 인도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부 색깔이 다를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도 다른 아이들이 같이 섞여 있었다. 다만, 국가의 교육이란 이름하에 말은 인도 공용어인 영어로 사용하고 있다.
내가 40여 년 전 옛날 대학 시절 문화인류학을 공부할 때 인도에는 언어가 500여 가지가 넘는다고 배웠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인도에선 회사 사장이 아래 말단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면 종족이 여러 종류가 있고 제각기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하루나 이틀이 지나야 온전하게 의사가 전달된다고 한다. 그것도 뜻이 정확하게 전달됐는지도 의문이지만!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언어소통 문제는 인도의 사회 발전을 더디게 만든 원인임을 부정할 수 없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인도엔 표준어라는 게 있을 턱이 없다. 대체로 인도는 언어로 남북이 확연이 갈려 있다. 북쪽의 아리안 계통의 언어와 남쪽의 드라비다 계통의 언어로 크게 갈린다. 물론 언어 뿐만 아니라 자연경관, 기후, 민족, 인구성장률, 문해율, 정치, 경제, 복지의 정도, 음식, 문화, 종교 등등 여러 방면에서도 남북으로 나눠져 있다. 우리나라 남북한 만큼의 갈등 구조로 존재하고 있는 게 인도 사회다. 이 사실은 인도를 구조적으로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선 미리 인식하고 있어야 할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언어이든 표준어로 정할 경우 그것은 언어문제를 넘어서 정치문제가 되고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도는 헌법으로 단일한 국어를 채택하지 않고 있다. 현재 인도에는 크게 연방정부 공용어와 주별 공용어가 정해져 있다. 인도 헌법에 규정된 연방정부 공용어로는 힌디어(데바나가리 문자로 표기)와 영어 두 종류 뿐이다. 중앙정부에서 헌법에 힌디어를 장려하는 조항을 만들어 놨는데 이것은 따밀어 등 남인도 언어의 사용을 좋지 않게 보는 북인도인들의 조금 삐딱한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힌디어는 중앙정부와 일부 주(우타르 프라데시, 히마찰 프라데시, 마드라스 등)에서 주로 사용되며, 인도 사회통합의 도구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영어는 행정, 사법, 고등교육, 외교 등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연방정부의 공식 언어 외에 각 주와 연방지역은 자체적으로 공용어를 지정할 수 있는데, 헌법상 22개의 지정언어가 있다고 한다. 예컨대 이곳 첸나이 지역에서 통용되고 있는 따밀어(따밀나두), 꼴까따(Kolkata)를 중심으로 한 벵갈어(서벵골), 텔루구어(안드라 프라데시), 마라띠어(마하라슈트라), 우르두어(북부 도시 및 무슬림 중심) 등 다양한 언어들이 제각기 주별로 사용되고 있다. 1956년 인도 중앙정부에서 언어 사용 지역을 기준으로 주를 만들어 준 바 있다. 언어 이야기, 특히 따밀어 이야기가 나오니까 생각나서 여담으로 하는 말인데 한국에는 따밀어의 단어들과 한국어 단어들의 발음이 같거나 비슷한 것을 근거로 한국어가 따밀어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자칭 언어학자들이 있다. 나도 몇 번 그들의 유투브 방송을 들어보고 반박하는 글도 쓴 적이 있지만 모두 말도 안 되는 황당무계한 소리다.
다른 한편, 인도 전역에 지금 이 아이들이 누리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는 여타 아동들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퍼뜩 머리를 스쳐 갔다. 옛날 전통사회에서나, 현대사회에서나 교육이 사회 구성원들간의 계층을 결정 짓고 그것은 대물림 된다. 경제력도, 삶의 질을 높이거나 인생을 향유할 수 있는 문화적 소양도 교육에서 길러진다. 동시에 한 나라의 국력도 여기서 결정된다. 인도 또한 예외가 아닐 것이다.

뒤이어 내가 박물관 내부에 들어가서보니 이곳 박물관의 성격이 확연히 보였다. 고고학박물관, 미술박물관, 민속박물관, 역사박물관 등의 인문학 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 일부 지질박물관, 과학박물관 등의 자연계 박물관이 결합된 박물관이었다. 구체적으로는 화폐학, 동물학, 자연사, 조각, 야자잎 문서 사본, 암라바티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고고학, 인류학, 자연사 유물의 보고였다.
이 박물관은 영국의 인도 식민통치 시기인 1851년에 건립되면서 동년 1월, 인도 총독 경호원의 의무 장교였던 에드워드 밸푸어(Edward Balfour, 1813~1889) 박사가 박물관의 초대 책임자로 임명됐다고 하니 역사가 170년이 넘는다. 첸나이 정부 박물관은 꼴까따 박물관 다음으로 인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곳이라고 한다.

먼저, 나는 인문학(고고학+인류학) 박물관으로 들어가서 전시실을 주마간산격으로 돌아보았다. 박물관 전체는 총 면적 6만 6,000m²에다 22개의 건물과 46개의 전시장이 있는 단지여서 규모가 작지 않았지만 전시실 건물은 모두 지은지 오래되고 작아서 내부가 비좁았다. 아직까지 첸나이 시정부가 문화재의 발굴, 보호, 연구, 관리 등에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있을 만큼 예산이 충분하지 않다는 걸 직감했다. 이곳 첸나이 시정부 박물관이 내게 주는 전체적인 느낌은 하나의 시각, 하나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고 해석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점, 인도의 역사와 문화, 종교의 다양성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으면 전시자료에 대한 공부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곳 남인도의 역사, 종교, 문화에 대한 이해에도 마찬가지다.
통상 박물관은 자료 수집, 보존, 연구, 전시, 교육의 기본적인 기능을 갖고 있고 이 기능들이 각각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수집된 자료에 거짓, 가공과 왜곡이 없고, 그것들의 연구와 전시에 편견이 없을 때 비로소 박물관의 교육적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용될 것이다. 그런데 나처럼 수집된 자료에 거짓과 왜곡이 있는지, 또 그것들의 연구와 전시에 편견이 있는지 없는지를 감별해낼 수 있는 전문적인 눈이 없는 외국인이나 비전문가들은 그저 수박 겉핥기식의 구경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내가 아주 기본적인 것까지 보는 사전 지식이 없는 완전 맹탕은 아니다. 아는만큼 보이는 법이다. 나는 그냥 겸허하게 아는 만큼만 보고 가려는 것이다. 내가 입구에서 입장료로 낸 250루피 만큼만 볼 수 있으면 족하다. 고고학 코너는 주로 과거 남인도 시기의 조각품, 건축 조각품, 금속 및 돌로 만들어진 유물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남인도 지역의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것들이다. 컬렉션은 크게 (1) 청동 조각, (2) 조각 및 건축 조각의 표본, (3) 비문 및 (4) 산업 예술품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전시물은 주로 석재와 금속으로 만들어진 힌두교의 신상과 불교의 불상들이 많았다. 코끼리, 사자 등의 동물로 조각된 신상들도 적지 았았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석상들은 힌두교와 불교가 혼합된 양식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 대목에서 이 졸고를 읽는 독자들을 위해 한 가지 코멘트 해둘 게 있다. 인도 여행 중 흔하게 눈에 띄는 기이한 상, 즉 인간의 몸에 코끼리의 머리를 한 그림이나 상을 봤을 것이다. 이 코끼리 얼굴을 한 사람의 실체를 안다면 힌두교의 조각상들이나 인도문화의 한 면을 이해하기가 수월할 수 있다는 걸 얘기해두고자 한다. 사람몸에 코끼리 머리를 한 기괴한 이 상은 “가네샤(Ganesha)”라고 불린다. 힌두교에서 신의 하나로 받들어지고 있다. 힌두사원 뿐만 아니라 식당에도, 택시 안에도, 조그만 가게 안에도 조각상, 그림이나 액세사리, 장식물로 붙어 있다. 이 현상은 중국인들이 재물의 신으로 좋아하는 배뿔둑이 포대화상(布袋和尙)을 가까이 하는 것과 비슷한 민간신앙이나 다름 없다.





그런데 인도인들은 힌두교도이든 비힌두교도이든 왜 코끼리와 사람의 형체가 결합된 가네샤를 좋아할까? 이유는 가네샤가 힌두교에서 지혜, 행운, 학문, 장애물 제거를 상징하며, 힌두교의 중요한 신이기 때문이다. 또 코끼리의 머리와 네 개의 발, 두 개의 긴 이(상아)는 각각 지혜, 힘, 인내, 성취를 나타낸다. 간혹 가네샤는 쥐 위에 올라타고 있거나 쥐떼를 거느린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과거의 업보와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
그러면 왜 가네샤가 그러한 상징체가 됐을까? 그렇게 된 연원을 밝히려면 책을 한 권 써야 할 판이다. 여행 중에 그렇게 할 순 없고 간명하게 이 줄거리의 핵심만 간추리면 이래와 같다.
B.C 9세기~B.C 8세기 무렵,『마하바라타』(산스크리트어: महाभारतम् 마하바라탐, 위대한 바라타)라는 인도 고대의 3대 서사시(마하바라타, 라마야나, 바가바탐)의 고안자 비야사(Vyasa)가 이 위대한 대 서사시를 마음속으로 완성한 것을 입으로 낭송하고 이 구술을 받아 적은 것이 인간의 몸에 코끼리 머리를 가진 지혜의 신 가네샤였다. 그래서 힌두문화에선 가네샤를 작시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기도 한다. 비야사에게『마하바라타』의 낭송을 받아적을 수 있는 적임자로 가네샤에게 부탁하라고 한 것은 브라흐마 신이었다.
암튼 이곳 박물관 안의 엄청나게 많은 석조 조각품들을 보니 입이 딱 벌어졌다. 이것들은 크게 초기 불교, 자이나교, 힌두교 관련 조각과 중세 및 후기 시대의 조각 등 두 카테고리로 나뉜다. 초기 불교 조각의 연대는 B.C 약 200년부터 A.D 250년까지이며, 자이나와 힌두교 조각품의 연대는 A.D 600년부터 최근년까지라고 소개돼 있다. 평소 내가 관심이 많은 불상 코너에는 1801년에 발굴된 크리슈나(Krishna) 계곡에 있는 아마라바티(Amaravati)의 폐허가 된 스투파에서 나온 많은 조각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이한 점은 사계의 연구 결과 이곳에 놀랍게도 초기 기독교시대 예술의 표본 혹은 전형이랄 수 있는 형태가 있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금속 조각상 코너에는 1,500점이 넘는 유물이 전시돼 있다고 하니 컬렉션이 엄청나다. 이 중 내가 본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전시돼 있는 청동상 중 500개는 연대가 B.C 1,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이 박물관 측에선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금속 조각상들이 한 지붕 아래에 모여 있는 박물관은 여기 외엔 없을 것이라고 자랑한다. 대부분 불교, 자이나교, 힌두교와 관련된 조각상이다.
또 다른 건물에는 자연사 박물관도 별도로 마련돼 있었는데 여기도 주마간산으로 둘러봤다. 고대 인도 대륙에 생존했었던 공룡, 맘모스, 코끼리 등 육지의 여러 가지 동식물 그리고 어류, 고래, 상어를 포함한 각종 해양생물의 척추뼈까지 전시돼 있었다.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박물관을 급행으로 보고 바깥으로 나오니 벌써 점심시간이 넘었다. 인문학 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의 전시물을 짧은 반나절만에 다 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 마디로 주마간산으로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壯子의 知北遊篇에 나오는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는 표현도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지금 나의 이 경우에 어느 정도는 적용이 가능하다. 흰 망아지가 빨리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본다는 뜻으로 인생이나 세월이 덧없이 짧고 빨리 지나간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첸나이에서의 짧은 체류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는 가운데 박물관도 총총 걸음으로 서둘러 보고 나왔으니 시간이 너무 짧고 아쉬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가 고대 인도 미술이나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첸나이에 발을 디뎠으면 시내 풍경은 보고 분위기 정도는 느끼고 갈 필요가 있지 않는가? 또 인도양 벵골만(Bay of Bengal)의 바다도 직접 접해보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핑계 같이 들릴 수도 있지만, 첸나이 박물관에선 전시된 모든 유물을 다 볼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봤다고 해서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럴 바엔 다음 행선지를 고려해서 빨리 보고 나오는 게 현명한 일이다. 또 유물을 다 사진기에 담을 수도 없고 일일이 해설을 붙일 수도 없다. 일차적으론 내가 좋아서 즐기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아마츄어의 눈이긴 하지만 나의 눈에 띄는 몇 가지 유물들에 대해서만 아래에 사진과 함께 설명을 조금 해놓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뿐이다.
2025. 1. 22. 21:25.(현지시각)
인도 첸나이 공항에서 코치(Kochi)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雲靜 초고























































'왜 사는가? > 여행기 혹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도 제2의 도시 뭄바이 입성 : '뭄바이' 유래, '게이트웨이'와 헌책방 탐색 (0) | 2025.01.28 |
|---|---|
| 코지 코드를 떠나면서 (0) | 2025.01.25 |
| 스리랑카 니곰보의 인심 좋은 게스트 하우스 주인 (0) | 2025.01.22 |
| 스리랑카 불교 유적지에서 바람처럼 지나가는 덧없는 생각들! (4) | 2025.01.20 |
| 스리랑카 여행의 목적과 첫인상 (0) | 2025.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