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스리랑카 여행의 목적과 첫인상

雲靜, 仰天 2025. 1. 14. 14:02

스리랑카 여행의 목적과 첫인상


인도양의 진주라고 불리는 스리랑카로 떠났다. 아주 오래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생애 처음 가는 여행지여서 그동안 내가 수없이 들락거렸던 중국, 대만, 일본에 가는 것과 기분이 사뭇 달랐다. 미답지를 갈 때마다 그랬듯이 이번에도 가슴이 조금 뛰었다.

2025년 1월 13일 07:35분, 나를 태운 T1에어 아시아 비행기가 인천공항을 이륙해서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를 거쳐  드디어 콜롬보 반다라나이케(Colombo Bandaranaike)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연발과 연착이 길어져 예정 도착 시간보다 훨씬 늦게 이곳 시각으로 밤 늦은 11시가 넘었다. 스리랑카는 한국보다 세 시간 반이 늦다. 따라서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3시 반이었다. 그러니까 총 비행시간이 무려 18시간이 넘었다. 싸구려 비행기만 골라 타면 이런 것쯤은 감수해야 된다.

과거 오래 전 인도에는 두 번 갔었지만 그땐 이곳을 올 수 없어서 아쉬워했었는데 이제 오랜 숙원을 풀게 됐다. 공중에서 내려다 본 밤의 콜롬보는 암흑 그 자체였다. 이와 달리 콜롬보 공항은 엄청나게 불을 밝혀놓았다. 도착 후 모든 게 순조로웠다. 공항에서 도착 비자(비자비는 미화 60달러)를 받는 것도 간단했고, 입국수속도 태국 방콕처럼 까다롭지도 않았고 복잡하지도 않았다. 공항 직원들도 태국 돈 므앙 공항 직원들처럼 고압적이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모두 친절하였다.

여행은 현지의 첫인상이 대단히 중요하다. 첫인상은 현지 사람들, 자연환경, 사회적 환경에서 좌우되기도 한다. 첫인상이 여행의 목적 달성을 결정 지을 수도 있다. 나에게 스리랑카의 첫인상은 굉장히 좋았다. 이 기행문을 읽어가다 보면 내가 한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간단하고 짧은 수속을 마치고 보세구역을 나가니 공항 로비에는 한국에서부터 미리 연락하고 온 이곳 수자타(Sujathathero Wathuruwila) 스님이 시자와 운전기사를 데리고 친히 마중 나와 계셨다. 작년 여름 서울에서 잠시 뵙고 이번이 두 번째다. 수자타 스님은 콜롬보 대학에서 불교학 박사 학위를 받고 법랍이 짧지 않은, 이곳 스리랑카 불교에서 상당한 권위가 있는 종교 지도자이다.

친히 공항까지 친히 마중 나와 밤늦게까지 기다려 환영해주신 수자타 스님과 함께

나의 첫 행선지는 수자타 스님이 주지 스님으로 주석하고 계시는 사찰이다. 그곳에서 며칠을 묵게 돼 있다. 달리는 밴 안에서 수자타 스님과 인사말, 간단한 자기소개 그리고 스리랑카의 근황과 방문 목적 및 일정을 위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절로 가는 길에 보니 밤이 늦어서 그런지 콜롬보 시내는 어두웠다. 아마도 전력 사정이 좋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는 약 40분 정도를 달려 라자기리야(Rajagiriya)에 위치한 스님의 절 스리 수다르마라마 푸라나 비하라야(Sri Sudharmarama Purana Viharaya)에 도착했다. 밤이라서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입구에서 언뜻 보아도 규모가 작은 사찰이 아니었다.

절에 도착해서도 주지 스님과 나는 접견실에서 또 환담을 약 한 시간 가까이 했다. 남방의 소승불교(Hynayana)와 북방의 대승불교(Mahayana)의 차이 그리고 스리랑카 불교의 특징, 이곳 스님들의 계를 지키는 내용, 향후 나의 행선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 날, 3시간 반의 시차로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자는둥 마는둥 하다가 나는 새벽에 일어나 사찰 경내를 돌아다녀 보았다. 절은 아주 오래된 고찰은 아니었다. 규모도 한국의 법주사나 대만 까오슝(高雄)의 불광사처럼 대형 사찰은 아니고 중간 정도의 크기였다. 주지 스님 외에 비구 승려들이 6명, 절 살림을 사는 민간인들 너댓 명과 차량 기사들이 함께 사는 정도였다. 법당, 대형 부처 좌상, 파고다, 설법강당, 회의실, 작은 도서실과 요사채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또 콜롬보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시골에도 수행을 위한 사찰이 또 있고 그곳에도 수자타 스님의 상좌인 수 명의 비구들과 직원들이 수행하고 있다고 했다.

가람 배치는 북방 불교의 사찰과 완전히 달랐다. 한국, 중국, 대만이나 일본 사찰이 서로 다르지만, 그래도 크게는 좌우 대칭으로 그 가운데 중심에 대웅전을 안치하는 한국의 사찰형태는 볼 수 없다. 나는 과거 인도, 필리핀(화교 사회의 사찰),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등지에서 남방 불교의 사찰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가람배치와 시설들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수자타 스님이 계시는 사찰 입구의 정문. 한국 사찰로 치면 일주문인 셈이다.
석주에 새겨진 8정도가 인상적이다. 새겨진 문자는 스리랑카 국어인 싱할리어다.
주석하고 있는 승려들 수에 비해 사찰 넓이는 매우 넓었다.
사찰 입구 안쪽에 안치돼 있는 석가세존의 불상
남방 소승불교의 전형적인 탑 스투파.
불상의 나발과 육계가 대승불교권의 그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마도 초기불교 시기의 불상 형태를 따른 것 같다.


이튿날 7시 반, 아침 공양 시간이 되자 젊은 비구 스님 한 분이 내가 머무는 독채 내의 식당에 와서 식사를 손수 차려주었다. 주지 스님의 분부를 받아서 나의 식사를 담당해주는 것 같았다. 식사는 안남미 밥에다 작은 종지에 버섯볶음, 채소 무침, 구운 생선 등등 대여섯 가지의 반찬이 차려졌다. 나에겐 모두 과거 오랜 대만 생활에서나 동남아 여행에서 자주 접해 보던 음식이어서 새로운 건 아니었다.

다만 한국, 중국, 일본, 대만과 홍콩의 사찰들과 달리 소승 불교 스님들은 육식도 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첫날 아침 공양으로 확인하게 된 게 기억에 남을 만하다.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 소승불교권의 남방불교에는 담배까지 피우는 스님도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나에겐 육식도 그다지 이상할 게 없었다. 더군다나 부처님도 재세시 육식을 했으니 육식은 남방불교의 오래된 전통이니 말이다.

반찬 맛은 전체적으로 담백했다. 짜지 않고 자극적이지도 않았다. 식사 후 후식으로 나온 사과, 귤, 바나나 등의 과일이 푸짐했다. 과거 영국인의 음다 문화의 한 습속이지만 차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문화가 이곳 스리랑카에도 있었다. 나도 설탕을 넣어 차를 1잔 마셨다.

아침 공양 후,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세 사람의 젊은 비구들이 나를 본전에 데리고 들어가서 짧은 의식을 베풀어줬다. 그들은 속가 나이로 대략 20대에서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젊은 비구들이어서 굳이 법랍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세 비구들 중 법랍이 가장 많아 보이는 스님이 흰 실을 나의 왼손 손목에 매주면서 스리랑카말로 뭔가를 주문을 외었다. 내가 스님에게 주문 내용이 뭐냐고 물으니 내가 여기 머무는 여행 기간 동안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빌어준다는 것이었다.

소승불교에서나 대승불교에서나 공통적으로 초기불교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고 불교가 전해진 현지의 민간신앙과 습합되는 현상이나 원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다소 변형된 요소가 존재한다. 한국 사찰에선 산신각이나 칠성각이 대표적 예인데 스리랑카 불교에서도 스리랑카 고유의 민간신앙과 습합된 것으로 보이는 기복적 요소가 눈에 띄었다. 이것 역시 부처가 원래 주술이나 사주팔자와 같은 운명론을 부정한 사실에서 보면 부처의 가르침에서 조금 비켜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제 그저께 이곳으로 오면서 한국에서 엄청난 정치적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마음 한 구석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이곳으로 오기로 정해진 일정이어서 미련없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까지 와서 국내 정치적 혼란이 잘 수습되도록 기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빌어 봤자 그 기도로 인해서 사태가 바뀌게 되면 누구라도 기도를 열심히 할 것이다. 호국불교니 하면서 국태민안을 바라는 법회나 기도를 하는 것은 부처님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자신 혹은 가족의 행운이나 복을 비는 기복불교는 한국에서 특히 강한 동아시아 불교의 한 특징이다. 물론 중국, 대만, 일본이라고 해서 기복적인 특성이 없는 건 아니다. 부처님은 득도 후 49년 간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리는 없고 모든 것은 상대성이 있으며, 영원한 것은 없다는 점을 설하셨다. 제자들에게도 이 사실이 변하지 않는 진리이니 열반 후 불상이나 탑을 만들어 자신을 숭배해서 절대화하지 말라는 유촉을 남겼다. 그는 입멸하시면서 오직 법(Dharma, 진리)에 의지하고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당부했다. 이른바 법등명 자등명(自燈明 法燈明)의 말씀이 그것이다.

나는 수행자의 신분이 아니라 우선 여행자로서 며칠을 보내려고 했다. 이곳 콜롬보 시내를 돌아다니려면 스리랑카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환전할 수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달라고 젊은 비구들에게 부탁을 했지만 그들이 여차저차한 일 때문에 같이 가기로 한 약속이 네 번이나 연기됐다. 그래도 그 스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스리랑카사람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며 삿기는 전혀 없이 싱긋 싱긋 웃어보였다.

내가 스리랑카에 온 지 이틀 밖에 되지 않았지만 스님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존경심과 경배심이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걸 확인하는 데는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바로 이 절에서 자연스레 눈에 띄었다. 스님에 대한 존경심이 일반적으로 중국, 한국, 일본 등 대승불교 국가들보다는 훨씬 깊다. 특히 이곳 스리랑카는 불교가 국교여서 불교국가다운 면모가 보였다. 절에 오는 신도들은 모두 무릎을 끓고 바닥에 엎드려서 스님의 발을 잡고 인사를 한다. 그만큼 승려들이 계율을 잘 지키고 일반 신도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신행 생활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불교국가지만 이 나라에서도 정치인들은 문제라고 한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정치가 정상적으로 움직여지고 정치인들이 깨끗한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는 곳은 없다. 이곳 스리랑카에서도 신문과 TV 방송 뉴스의 헤드라인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정치 문제다.

신도들이 비구스님에게 꿇어 앉고 발에다 예를 표한다.


이곳에 머문 단 짧은 이틀 사이에도 나의 눈에 들어온 한국과 다른 모습들이 적지 않았다. 경내에서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쓴다거나 청소를 하고 화초를 다듬는 비구들은 모두 맨발로 움직였다. 또 스님들뿐만 아니라 이곳 절집과 관련된 고용인들도 모두 천진무구한 모습들이었고 스님들에 대해서 얼굴 표정이나 언행이 깍듯했다.

또 내가 콜럼보 시내를 몇 군데 돌아다녀 보니 첫인상으로 물가가 대단히 비싸다는 점이 제일 크게 눈에 띄었다. 이 나라 GDP와 국민들 소득에 비해서 물가가 상당히 비싸서 인플레가 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농산물은 값이 쌌지만 이곳 스리랑카가 공업이 발달하지 못해서 자동차, 가전제품은 물론, 생활용 공산품들은 모두 해외에서 들어오는 수입품이 대부분이다. 스리랑카는 공장이 부족하고 생산하는 공산품은 자체 생산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공산품의 물가가 대단히 비싼 편이다. 예를 들어 소형 자동차 한 대에 한화로 3,000만 원에서 4,000만 원 정도 한다니 거의 한국과 맞먹는 수준이어서 놀랐다. 비싼 물가의 고충은 스리랑카의 깨끗한 자연환경을 누리는 향유와 맞바꾸는 셈이다.

한국 식품과 관련된 상품은 더욱 천정부지의 가격이었다. 시내에 있는 한국식품과 한국 음식점에 가보니 가격이 한국보다 최소 서너 배 이상, 비싼 곳은 다섯 배 이상 비싸서 깜짝 놀랐다. 예컨대 한국 식품을 파는 매점에서 한국라면 하나에 한국돈 3,000원 정도하고, 한국식당에선 작은 삼각 김밥 하나가 7,000원 정도 한다면 어느 정도 비싼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나라든, 특히 국민소득이 낮은 저개발 국가를 여행할 때 화폐가치라는 측면에서 그 나라 현지 국민들의 생활수준으로 먹고 마시고 자면 크게 비싸지 않다. 그러나 한국에서 사는 것처럼, 한국생활에서 누리는 식으로 여행을 하면 그건 엄청나게 비싼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해외의 어디를 여행하든 기본적으로 그 나라 현지인들과 똑같은 수준으로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아, 물론 우리나라보다 물가와 생활 수준이 높은 선진국에 가면 한국 사람들이 사는 수준에 맞춘다.

내가 이 곳에 오기 전에 세운 이번 스리랑카 여행의 목적은 세 가지였다. 첫째가 단기 출가를 해서 잠시 승려생활을 할 수 있을지 조건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만약 괜찮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수속을 밟아서 몇 개월 수행하고 갈 생각이다. 둘째는 한국에서 서적을 통해 알고 있는 남방 소승불교의 현실을 직접 확인하고 경험해보는 것이다. 셋째, 스리랑카의 역사 중 근현대 영국, 인도와의 관계를 공부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두 번째 목적은 벌써 실행되고 있다. 이제 며칠 더 머물면서 다른 사찰과 이곳 주지 스님의 소개를 받아서 선방을 찾아가기로 돼 있다. 수자타 스님 이야기로는 스리랑카는 교학이 발달했고 선학은 발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산스크리트어와 빨리어 공부는 여기 스리랑카에서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참선 위주로 하는 단기 출가는 미얀마로 가는 게 좋을 것이라고 권했다. 이 사실은 나는 이미 오래전 한국에 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이에 대해 나는 미얀마는 이미 갔다 왔는데 다음에 갈 가능성이 없지 않고, 이곳 스리랑카에서도 참선 수행을 하는 선센터가 있다하니 일단은 가서 보겠다고 답했다. 그곳에 가보면 첫 번째 목적을 행할 수 있을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목적인 스리랑카의 역사공부는 급할 게 없다. 이곳저곳 명소를 다니면서, 또 책방을 다니면서 천천히 할 생각이다.

이 기록을 남기고 있는 사이 또 다시 젊은 비구 한 분이 와서 나의 방문을 두드린다. 나를 승용차에 태워 시내와 몇몇 사찰을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시켜주겠다는 것이다. 나는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 고로 방문을 두드리자마자 바로 그들과 함께 콜럼보 시내로 나갔다. 콜롬보 시내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오랫동안 수도로 번창했던 도시답게 현대적 면모도 보인다. 콜롬보는 1372년부터 1985년까지 스리랑카의 수도였지만 지금 법률상의 수도는 콜롬보 시에서 15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스리자야와르데네푸라 코떼(Sri Jayawardenepura Kotte)이다. 이곳 사람들은 흔히 “코떼”라고 줄여서 부른다.

오늘 하루도 운전기사와 젊은 비구가 나를 위해서 수고할 것이다. 이것도 부처님의 은덕이다. 오로지 감사할 따름이다. 이스뚜띠! 이스뚜띠!(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2025. 1. 15. 09:35.(현지 시각)
스리랑카 콜롬보 시내 스리 수다르마라마 푸라나 비하라야(Sri Sudharmarama Purana Viharaya)에서
雲靜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