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여행기 혹은 수필

장군의 외손녀,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雲靜, 仰天 2025. 6. 19. 07:02

장군의 외손녀,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마도 1994년 7월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대만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델타항공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한 몸을 쉬고자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옆 좌석에 앉은, 대만인으로 보이는 내 또래의 한 남성 승객이 내게 물었다.

“내 오른쪽 옆에 앉아 있는 여자는 한국인일까요, 중국인일까요?”

고개를 돌려 그가 가리키는 쪽을 보니 나이가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한 여성이 앉아 있었다. 옆모습만 보아도 키가 훤칠했고 실루엣만으로도 대단히 우아한 자태를 풍기는 미인이었다. 질문을 던진 남성에게 나는 웃으면서 “관심이 있으면 직접 물어보지 그래요?” 하고 말했으나, 그는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몰라 무슨 말로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며 어물쩍거렸다. 결국 내가 대신 그녀에게 한국어로 말을 건넸다.

여성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답했다.
“한국인이 반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나머지 반은요?”

나머지 반은 중국인이라고 했다. 그녀는 대만인 부친과 한국인 모친 사이에 태어난 한국인이자 중국인이었다. 이름은 판춘래(潘春來), 국적은 중화민국이라고 했다. 요즘과 달리 그 시절에는 대만 사람 중 스스로를 중국인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녀는 한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잠시 대만에 볼일이 있어 갔다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한국어를 어찌 그리 잘하느냐고 물으니 이화여대를 나오고 서울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며, 한국어 구사는 물론 중국어도 모국어처럼 자유롭게 쓴다고 했다.

내 옆자리 승객은 한국어를 몰라 우리 대화 내용을 퍽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녀가 중국어도 잘하니 직접 대화를 나눠보라고 승객에게 일러주었다.

기내 통로를 오가며 서빙하던 남자 승무원조차 관심이 생겼는지 통로에 서서 이야기를 들으며 탄성을 내뱉기도 했다. 남자 승무원이 그녀를 보며 웃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이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20대 초반 '미스 대만 선발대회'에 나가 4위인 포토제닉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한국처럼 대만에서도 매년 국가를 대표하는 미인을 뽑는 대회가 열리곤 했다. 대만도 한국처럼 진선미 포토제닉 등으로 당선된 미인들을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면서 그 대회를 지원한 큰 손들 사업에 이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것들이 싫어서 아예 모든 혜택을 포기하고 휩쓸려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에 나는 감동을 받았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녀는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최용덕 장군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내게 “혹시 들어본 적 있으세요?” 하고 물었다.

내가 되물었다. “혹시 일제강점기 때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이후 한국 공군 창설의 주역이셨던 그 분 아니신가요?”

그녀는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어머, 어떻게 아세요?”

나는 한국독립운동사를 연구한 바 있어 장군님을 잘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내가 최용덕 장군에 대해서 중화민국의 최고 권력자 장개석(蔣介石)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 주었다. 그러자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듣고 있던 그녀는 내가 자기 외할아버지의 전기를 써주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 자기 집에는 최용덕 장군과 관련된 자료도 있다고 했다. 학자로서의 직업의식이 발동해 자료에 구미가 당겼고 한 번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그녀는 나중에 다시 만나면 자료를 보여주겠다며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리가 떨어져 있어 길게 대화를 이어가기엔 적절치 않았다. 우리는 나중에 다시 만나 외조부 이야기를 더 나누기로 하고 대화를 마쳤다. 나는 옆자리 남성이 그녀와 대화를 이어갈 수 있도록 물러나 주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귀국 수속을 마치고 로비로 나왔을 때 다시 본 그녀의 미모는 참으로 뛰어났다. 비행기에서 관심을 보였던 남성은 여전히 그녀 곁에서 말을 걸며 시간을 같이 하고자 했다. 나와 그녀는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은 뒤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당시 한국 연락처가 없어 대만 학교 기숙사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주었고, 그녀는 한국 집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내가 먼저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하는 동안, 그녀와 그 남성은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공항 로비의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해 늦가을쯤 기숙사 방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아보니 볼일이 있어 대만에 다시 들렀다는 반춘래였다. 우리는 다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춘래는 보석감정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다시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뒤 한국에 들어갈 일이 있어 들어간 김에 약속대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외조부 최용덕 장군의 자료를 건네주었으나, 막상 받아보니 전기를 쓰기에는 분량과 내용이 다소 부족했다. 결국 자료 조사와 관심은 계속 이어가기로 하고 자리를 마무리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미국 뉴욕을 여행 중이라며 보낸 엽서가 날아왔다. 그 다음에는 이집트를 여행 중이라는 엽서도 도착했다. 내가 한국에 머물고 있다고 하니 조만간 귀국하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얼마 뒤 그녀는 꼭 만나야 할 어려운 일이 생겼다며 연락을 해왔다. 만나서 얘길 들어보니, 외할아버지가 살아생전 거주하셨던 공군참모총장 관사의 소유권 분쟁이 발생했는데 나더러 나서서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사정을 듣고 법적으로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조언해 주었으나, 내가 깊이 개입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는 아니었다.

다시 얼마 시간이 흘렀는데 어느 날 대만에 왔다면서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래서 나가 봤더니 웬걸 발목을 다쳤다면서 한쪽 발에 기브스를 하고 있었다.

또 다시 1년쯤 시간이 흘렀다. 대략 1996년 9월 초, 새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집안에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급히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델타 항공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려 리무진버스를 탄 뒤 시청 앞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 광화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덕수궁 돌담길이 끝나갈 무렵 인도 옆 공중전화 박스에서 웬 여자가 갑자기 중국어로 “서 삼촌!”(徐叔叔) 하고 부르며 뛰쳐나오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판춘래였다. 우연치고는 어찌 이런 우연이 있을까? 우리는 정말 반가웠다. 반갑게 인사하고 인근 다방으로 들어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지갑에 있던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지난 해외여행 때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사진 뒤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徐相文叔叔留念 事事如意 學業上進 1996. 9. 4 在광화문英国大使館 潘春来 贈(서상문 삼촌께 기념으로 드립니다.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고 학업에 진전이 있기를 바랍니다. 1996년 9월 4일 광화문 영국대사관에서 판춘래 드림)

그런데 그 무렵부터 그녀는 노골적이지는 않았으나 조금씩 나를 이성으로 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를 대할 때 말하는 태도나 웃는 얼굴 그리고 어투를 보면 완전히 그 이전하고 다른 모습이었다. 예쁜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운 여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자주 전화를 해서 안부도 묻기도 하고 이런저런 도움도 요청했다. 그러면서 만날 때마다 만면의 희색이 돌고 웃음이 끊어지지 않았다. 모친이 오랜 병석에 있다고는 했으나 부모님 모두 살아계셨고, 공부도 할 만큼 했으니 교양 역시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을 더 이상 받아주지 못했다. 아니, 받아주지 않았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왜 그랬을까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는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한 마디로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해외여행을 원하는 대로 다니고 오랜 세월 누려온 생활 수준이 상당해 보였는데, 마음을 열고 사귄다 한들 내 능력으로 그녀의 경제적 수준을 맞춰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유학비가 부족해 스스로 벌어가며 겨우 굶지 않을 정도로 최악의 상황을 견디던 처지였다. 그 이상의 감정을 품는 것은 사치였다.

당시 그녀는 보석 감정을 공부하며 이탈리아 대리석과 올리브유를 수입하는 무역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후 한참이 지나 스페인을 여행 중이라는 편지가 다시 찾아왔다.

다시 얼마 지나 만나보았을 때, 그녀는 미국에서 스페인 출신의 박사과정 남성을 만났으며 앞으로 스페인과 무역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 뒤로는 소식이 끊겼고 지금까지 연락이 닿지 않는다. 아마 한국에 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해외 어디선가 살고 있다면 스페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세상일이란 참 알 수 없다. 내가 스페인을 여행하다 길거리에서 또 한 번 우연히 만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혹시 그때도 그녀는 나를 보고 뛸 듯이 반가워하며 “삼촌!” 하고 부를까?

인연이란 쉽게 맺어지기도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언젠가 언급했듯,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기억 속에 아름답게 남아 있다면 그 또한 인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춘래는 30대 후반 내 기억 한 자락에 아련하게 자리 잡은 아름다운 인연이었다. 잠시 스쳐간, 루 살로메 (Lou Andreas-Salomé, 1861~ 1937) 같았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여인. 그녀가 어디에 머물든, 그 이름처럼 언제나 봄날처럼 따뜻하고 평화롭게 잘 살아가기를 빌어본다.

2025. 6. 20. 17:05.
구파발 스타벅스에서
雲静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