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인물 및 리더십

조성태 전 국방부 장관 일행 중국방문시에 제공한 참고자료

雲靜, 仰天 2026. 7. 9. 08:39

1. 조성태 전 국방부장관 일행 중국 방문
2. 방문기간 : 2002년 6월 14일~18일
3. 방문일행 : 조성태, 김인종 대장(예) 전 2군 사령관, 권해조 장군(예), 황병무 국방대학 교수, 김진욱 21세기 군사연구소장, 백승주 국방연구원 연구원, 박계향 군사세계 편집장, 서상문
4. 방문목적 : 중국 우호연락회 초청을 받아 방중해서 츠하오톈 당시 중국 국방부장(장관), 중국 우호연락회 부회장, 중공 중앙정치국 서열 6위 정치협상위원회 부주석 조남기 상장, 환담
5. 서상문이 조성태 전 장관 등에게 당시 방문 예정돼 있던 중국 국방부장 등 주요 군사 지도자들에 관한 간단한 이력(아래) 자료를 제공

조성태 전 국방부 장관 일행 중국방문시에 제공한 참고자료


방문예정 인사들에 관한 주요 약력

출생년도, 출생지, 주요 경력, 한국전쟁참가여부 등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1. 遲浩田(上將, 국무원 제9대 국방부 부장,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1929년 7월생. 山東省 招遠
1944년 국민정부군 제8로군에 입대함으로써 군 생활 시작. ‘해방전쟁’(국공내전)중 萊蕪, 濟南, 淮海, 上海 전투 등 도합 100여 차례 참전. ★현 중국 측 인물소개자료엔 1945년 7에 군 입대한 것(参军)으로 돼 있음
1946년 10월 중국공산당 입당
1964년 中校 진급.
1970년 제27軍 제81師정치위원.
1974년 『解放軍報』社 부편집장 직책으로 정치부문 담당. 동년 北京군구 부정치위원.
1976년 10월 『人民日報』 제1부편집장.
1977년 10월 부총참모장 겸 총참모부 정치부주임으로 승격.
1983년부터 일정기간 신병 요양차 휴양.
1985년 6월 濟南군구 정치위원 겸 중공 당위원회 서기.
1987년 중공제13屆중앙위원, 제11대 총참모장(1987년 11월~1992년 11월),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1988년 上將 진급, 제7屆‘전인데’ 대표, 국가군사위원회 위원.
1990년 9월 중국 레슬링협회 명예주석.
1992년 10월 중공 제14屆중앙위원,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1993년 4월 제8屆‘전인데’ 대표, 국가군사위원회 위원, 제8대 국방부장(1993년 4월~1998년 4월), 동년 10월 ‘국방법’起草위원회 주임. 1995년 9월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보임, 12월 국가군사위원회 부주석.
1997년 국방부 부장,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연임.
1951년 인민지원군제27軍 제79師 제235團제3營 營敎導員, 團정치처 부주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
1958년 南京고급보병학교, 남경군사학원 입학, 1960년 졸업 少校 임관. ‘해방전쟁’의 각종 전투에 참가하여 다섯 차례 부상, 아홉 차례 훈장포상, ‘전투영웅’칭호를 획득. 한국전 참전시 일등훈장 수여.

遲浩田(上將)

2. 傅全有(上將,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총참모부 제14대 총참모장)

1930년 11월생. 山西省 原平.
1946년 중공 인민해방군 입대.
1947년 중공 입당.
1949년 제1군 連長, 營참모장.
1953년 중공 인민지원군 제1군 營長으로 한국전쟁 참전.
1960년 제1군 團참모장.
1968년 사단 참모장.
1978년 제1군 예하 사단장.
1981년 제1군 軍참모장.
1985년 成都군구 사령원, 중공 제12屆중앙위원 당선.
1987년 중공 제13屆중앙위원.
1990년 5월 蘭州군구 사령원.
1992년 10월 중공 제14屆중앙위원,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동년 11월 총후근부 부장.
1993년 제8屆 ‘전인대’ 대표, 4월 국가군사위원회 위원, 12월 전국녹화위원회 부주임.
1995년 9월 제13대 총참모장 취임, 10월 對臺灣군사지휘부 제1부지휘관.
1998년 4월 총참모장 연임(제14대)

3. 曹剛川(上將,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총장비부 부장)

1935년 12월생. 河南省 舞陽.
1954년 중공 인민해방군 입대. 동년 제3포병기술학교 입학.
1956년 중공 입당. 동년 大連解放軍러시아어專科학교 수학.
1957년 모스크바포병군사工程학원 수학. 1963년 모스크바로부터 귀국한 후 총후근부 軍械部, 장비부 助理員, 技術員, 工程師, 참모, 부처장, 처장 등의 보직을 맡았음.
1979년 對월남전전선지휘부 포병 부사령원.
1984년 국방대학 졸업.
1985년 총참모부 장비부 부부장.
1988년 少將 진급.
1990년 8월 총참모부 군무부 부장 겸 중앙군사위원회 軍品(군사물자)무역판공실 주임.
1992년 11월 부총참모장.
1993년 中將. 동년 8월 국무원 ‘退伍軍人和軍隊離退休幹部安置領導小組’(퇴역군인 및 예비역 간부의 취업 및 생활보장 알선처) 조장.
1995년 8월 총참모부 상무 부총참모장.
1998년 ?월 총장비부 부장 취임.
한국전쟁 참전 여부 미상.

★참고사항

遲浩田 부장은 국공내전 및 한국전쟁에 하급장교로 참전했지만 각종 공로를 세움으로써 이를 발판으로 훗날 고속승진을 일구어 냈다. 그는 ‘문혁’ 말기에 『解放軍報』 社 부편집장 직책으로 민감한 정치부문을 담당했었지만 운 좋게도 홍위병들로부터 타도대상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4인방’이 체포되었을 때 다시 군의 대표로 『人民日報』에 파견될 수 있었다. 뒤이어 그는 또 鄧小平에게 발탁되어 부총참모장으로 일취월장했다가 1987년 총참모장으로 기용되었다.

遲浩田은 군내 대표적인 ‘山東幇’—현재 23명의 上將 가운데 약 1/3 정도가 山東출신임—의 좌장으로 통한다. 그는 총참모장으로 영전하기 전에 濟南군구의 정치위원을 지냈는데, 현재 그 주위에 포진해 있는 군내 인맥은 대개 이 기간 동안 같이 근무했던 인물들이 주축을 이룬다. 예컨대 徐惠滋(上將, 前군사과학원 원장), 固輝, 宋淸渭, 周克玉, 李九龍, 曹芃生(上將, 前 蘭州군구 정치위원) 등이 그들이다.

한편 遲浩田은 6.4천안문사태 때 거취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중공 제14대에 들어와 정치국원으로 피임되지 않았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분석하는 관찰가도 있다. 게다가 그런 상태에서 형식적인 기구인 국방부 부장으로 보임된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국방부가 더욱 형해화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遲浩田은 국방부장으로 취임한 이래 의욕적으로 일해왔고, 특히 외국과의 적극적인 군사교류와 ‘중화인민공화국국방법’의 제정(1997년 3월 14일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5차 회의 통과, 국가주석령 제84호로 공포)을 추진해와서 江澤民으로부터 인정받은 바 있다. 따라서 향후 胡錦濤가 江澤民의 뒤를 잇게 되고 당 군사위원회 주석직까지 물려받는다 하더라도 江澤民이 당 외에서 원로로서 막후 영향력 행사를 포기하지 않는 한 현 ‘4總部’를 비롯한 군부의 실세들 거개가 강택민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 급작스럽게 지위변동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요컨대 현재의 지휘체제가 유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江澤民 및 張萬年(1928년 6월 山東省 龍口 출생), 遲浩田라인의 후속인사들이 그대로 승급, 가동되리라는 판단이다. 특히 중공 중앙이 평화적인 대만통일이 불가능할 경우 최종적으로 2010년에는 무력으로라도 ‘해방’시킨다는 계획을 마련해두고 있는 상태(사실 미확인)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이전보다 증대되면 증대되지 약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胡錦濤체제의 안정은 군부의 지지를 어떻게 이끌어 내는가 하는 점에 달려있지만 군부의 실세를 장악하고 통제하는데는 초기 당분간은 상당히 힘에 부치리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傅全有는 제1군 참모장에서 일약 전략요충지인 成都군구의 사령원으로 승진했을 정도로 중공 당내 군 계통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현대전 경험—국민당군 정예부대인 ‘馬家軍’과의 전역에 참여했으며 한국전쟁 및 중월변경에서 다년간의 실전경험을 쌓았다—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현대적 전략에도 밝으며 새로운 전략전술을 창안해낸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개인적 친분 및 공식적 교류의 폭을 그 밖의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인 于永波, 王克, 王瑞林으로도 넓혀 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올 가을 중공 제16대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예상대로 胡錦濤체제가 들어선다 해도 군 내부의 급격한 인사이동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있다면 江澤民의 재가 하에 지금까지 대 臺灣 전략통들을 군 지도부로 발탁해온 江澤民의 군 인사방침을 보충하고 강화하는 선에서 이루어질 것이므로 향후 군내의 인맥은 당분간 江澤民의 의중이 반영되는 체제로 짜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于永波(1931년 9월 遼寧省 複顯 출생, 滿洲族), 王瑞林(1929년 12월 山東省 招遠 출생), 王克(1931년 8월 江蘇省 蕭縣 출생)은 모두 江澤民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다. 단지 연령적으로 새로운 지도자 胡錦濤보다 ‘고령’이어서 유임될 확률은 불투명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鄧小平체제로부터 江澤民체제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江澤民의 체제강화에 군부 내의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는 바 퇴임 후에도 군부의 막후 실력자로 행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王克은 江澤民의 지시로 1994년 6월 인민해방군 8인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의 김일성을 방문하여 당시 중국지도부에 대한 김일성의 불만과 우려를 불식시켜준 역할을 수행한 사실이 있는데, 본 교류의 취지에서 볼 때 이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2002. 6. 13.
녹번동 寓居에서
雲靜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