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魯迅)의 유학과 일본인 인연들
소설가로서 혁명적 문학가로 이름 높은 현대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 1881~1936)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 문화혁명의 主將으로 위대한 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 혁명가”라고 평가한 인물이다. 그는 평생 동안 펜으로 불의한 것들에 분노하고 저항했다. 문학을 통해 중국의 부조리한 현실에 온몸으로 맞서 싸워 새로운 중국인상을 만들려고 노력한 인물이었다. 반면, 그의 동생도 이름 있는 문학가였지만 나중에 변절해서 친일파가 된다.

루쉰은 1936년 10월 19일 지병인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많은 작품, 특히 루쉰 문학의 정수랄 수 있는 잡문(산문)과 소설로 당시 무지몽매한 중국 민중의 인성과 삶의 방식을 개조하려고 노력했다. 대표작으로는 1918년 5월, 중국 공산당의 창당 인물이자 초대 당수였던 천뚜슈(陳獨秀)가 창간한, 당시로선 진보적 잡지였던『신청년(新靑年)』에 발표한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 등이 있는데, 이 작품은 중국 근대소설의 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루쉰이 문학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출발이었다. ‘루쉰’이라는 필명을 쓴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의 본명은 원래 쪼우슈런(周樹人)이었다.
그후 그의 대표작인 「아큐정전(阿Q正傳)」이 수록된 『외침』을 비롯하여 『방황』 『새로 엮은 옛이야기』 등 세 권의 소설집을 펴냈다. 『아침 꽃 저녁에 줍다』 『화개집』 『무덤』 등을 펴냈으며, 그 밖에 산문시집 『들풀』과 시평 등 방대한 양의 글을 썼다.
그런데 루쉰은 처음부터 소설가가 된 건 아니었다. 원래는 의사가 되려고 했었다. 루쉰이 처음에 문학이 아닌 의학을 전공으로 택해 유학을 떠난 데에는 그의 불우했던 유년 시절 경험과 당시 청나라 지식인들이 가졌던 개혁 사상이 깊게 얽혀 있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아버지의 병사와 중의학(한의학)에 대한 환멸을 들 수 있다. 루쉰이 10대 시절이던 때, 그의 아버지는 중병에 걸려 수년간 투병하다가 1896년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4남 1녀 중 남은 자식들은 살 길이 막막했다. 당시 루쉰의 집안은 아버지의 약값을 대느라 가산을 탕진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당시 중국의 전통 의사(중의)들이 처방한 약재라는 게 '가을 수확 이후의 사탕수수', '원앙새 한 쌍', '먼저 겨울을 난 대나무 고목의 뿌리' 따위의 지극히 미신적이고 황당한 것들이었다. 아마도 루쉰의 아버지는 '돌팔이 의사(蒙古大夫)'를 만났던 모양이다. 결국 그의 부친은 아무런 효험도 보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사망했다. 이 경험은 루쉰에게 전통 중의학에 대한 깊은 불신과 환멸을 심어주었다.
둘째, '서양 의학'을 배워 동포의 고통을 구제하겠다는 각오였다. 전통 의학에 실망한 루쉰은 난징(南京)의 신식 학교들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과학적인 서양 의학에 눈을 떴다. 일본 유학을 결심할 무렵, 그의 소박한 꿈은 신식 의학을 제대로 배워서 과거 자신의 아버지처럼 낡은 미신과 잘못된 치료 때문에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수많은 중국 민중을 직접 고쳐주겠다고 생각했었다.
셋째, '동아시아의 병자' 중국을 구하겠다는 의지 혹은 꿈이었는데 말하자면 “의학적 구국론”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서구 열강과 일본에게 침탈당하며 “동아시아의 병자(東亞病夫)”라고 조롱받고 있었다. 루쉰은 나라가 강해지려면 그 구성원인 국민의 육체부터 건강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유학지로 일본, 그중에서도 수도 토우꾜우(東京)가 아닌 북쪽 변방의 도시 센다이(仙臺)를 택한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 당시 일본은 메이지(明治) 유신을 통해 서양 의학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여 군대와 국민의 보건 체계를 근대화한 상태였다. 루쉰은 일본의 발전된 근대의학을 배워 조국으로 돌아가 중국의 신식 군대의 의사(군의관)가 되거나 의학 교육에 투신하여 육체적으로 병든 조국을 치료하겠다는 '의학적 구국론'을 품고 있었다.
요컨대, 개인적으로는 미신적인 치료 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고, 사회적으로는 병든 동포들을 구하고 조국을 건강한 근대 국가로 만들겠다는 청년 지식인의 순수한 애국심이 그를 의학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식 양의를 배우려면 미국이나 유럽이 좋았을 텐데 루쉰은 왜 하필 전쟁을 치른지 얼마 되지 않은 '적성국'이랄 수 있던 일본으로 갔을까? 루쉰이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구 열강 대신 일본 유학을 택한 배경에는 당시 청나라 말기 중국 지식인 사회의 현실적인 제약과 시대적 흐름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크게 세 가지 이유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청나라 정부의 정책적 유도와 '가성비', 즉 비용 문제였다. 당시 루쉰은 청조의 내각이나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부유한 유학생이 아니라 南洋公學堂(江南水師學堂의 후신) 등에서 선발되어 정부 지원금을 받는 국비 장학생이었다. 당시 재정난에 시달리던 청나라 정부는 한정된 예산으로 최대한 많은 인재를 해외로 보내 선진 문물을 배우게 하려 했다. 미국이나 유럽은 선박 운임과 현지 체재비, 학비가 터무니없이 비쌌던 반면,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은 비용이 훨씬 적게 들었다. 일본 유학은 서구 유학에 비해 적은 예산으로 몇 배나 많은 유학생을 파견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성비'의 선택이었다.
둘째 이유는 일본으로 가면 동문동종(同文同種)이어서 메이지 유신의 성공과 의학을 속성으로 배울 수 있는 '지름길 학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 중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서양을 배우려면, 서양을 먼저 배워 성공한 일본을 거치는 것이 가장 빠르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화와 근대화에 성공한 모델이었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은 '동문동종', 즉 같은 한자 문화권이자 같은 황인종이었다. 영어나 프랑스어를 바닥부터 배우는 것보다 이미 서양의 과학·의학·법률 용어를 한자어로 번역해 놓은 일본의 교과서와 시스템을 배우는 것이 청나라 지식인들에게는 훨씬 빠르고 효율적인 지름길로 여겨졌다.
셋째, 청일전쟁(1894년) 이후 청나라 내부의 대대적인 일본 유학 열풍도 영향을 받았다. 루쉰이 유학을 떠난 1902년 무렵은 웅장했던 청나라가 신흥 강국 일본에게 청일전쟁에서 참패한 지 채 10년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자신들이 조롱하던 섬나라 일본에 패한 중국 지식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역설적이게도 “지피지기(知彼知己)를 위해 일본의 강성함이 어디서 나왔는지 배워야 한다”는 대대적인 유학 열풍이 불었다. 당시 짱쯔뚱(張之洞) 같은 청나라의 실력파 관료들이 쓴『권학편(勸學篇)』 등에서도 일본 유학의 이점을 강력히 권고하면서, 청나라 청년들이 토우꾜우로 대거 몰려들던 사상적 전환기였다. 청나라 관비 유학생 파견제도가 시작되고 난 이후 매년 수백 명에서 많게는 만 명 이상이 유학을 떠났는데 그 중 대부분이 일본으로 갔다.
그런데 루쉰은 일본에 가선 중도에 의사의 꿈을 접고 문학가의 길을 걸었다. 그가 소설가가 된 사연은 잘 알려져 있다. 루쉰은 처음에 난징의 강남수사학당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이후 광산을 연구하는 광무학당(鑛務學堂)에서 서양의 신문물을 공부한 뒤 졸업 후 의사가 되기 위해 1902년 국비(청나라 관비) 장학생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02년 3월 제국의 심장부 수도 토우꾜우에 첫발을 디딘 루쉰은 1904년 9월까지 머물면서 외국 유학생들을 위한 예비 교육기관이자 어학학교였던 코우분학원(弘文学院)에 입학하여 약 2년간 일본어와 기초 과학을 이수했다. 1904년 9월, 코우분학원을 졸업한 뒤 그는 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토우꾜우를 떠나 미야기(宮城)현에 있는 센다이 의학전문학교(현 東北大学 医学部)로 입학하면서 거처를 옮겼다.
1904년 9월 입학한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중 그는 수업 시간에 환등기를 보게 됐다. 그때 환등기 화면 속에서 한 중국인이 러시아 군대를 위해 군사 정보를 빼돌린 '러시아 스파이' 혐의로 잡혀서 일본군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칼로 참살당하는 걸 보면서도 말없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저 구경만 하는 주변 중국인들을 보고선 크게 충격을 받았다. 때는 러일전쟁 시기였는데 러시아와 일본이 중국 땅인 만주를 무대로 전쟁을 벌이고 정작 그 땅의 주인인 중국인은 처참하게 죽어가는데도, 이를 남의 일 보듯 무덤덤하게 구경만 하는 동포들의 모습에 루쉰은 깊은 환멸과 충격을 받았다.
훗날 그는 이때 이렇게 회고했다. “생각없이 있다면 저렇게 다른 나라가 쳐들어 와서 자국인이 참수되는 것이나 보고 있는 신세가 된다. 즉, 정신을 바꾸고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위해선 글과 문학이 의학보다 정신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고.
이를 계기로 루쉰은 중국인의 민족 정신 개조를 위해서는 의학보다 문학이 더 시급하고 유용하다는 걸 깨닫고 의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토우꾜우로 돌아 갔다. 작은 의사는 사람의 몸을 고치지만 큰 의사는 사람의 마음을 고친다는 말과 상통하는 의식(人體是 一國之像, 下醫醫人, 上醫醫國)을 가지게 된 셈이다.
토우쿄우와 센다이 생활 기간을 다 합쳐 루쉰의 일본 생활은 약 7년. 그 사이 그는 일본에서 다양한 활동을 열정적으로 펼쳤다. 이 시기 루쉰은 혁명의식도 잠재돼 있었고 실제로 1904년 11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결성된 반청(反淸) 혁명 조직인 광복회에도
12월에 가입했고, 그에 부수된 활동도 했다. 이 단체를 주도적으로 조직하고 초대 회장을 맡은 인물은 훗날 뻬이징대학 총장이 되는 차이위안페이(蔡元培)와 혁명가 타오청짱(陶成章) 등이었다.
당시 청나라 말기 개혁 운동은 크게 황제를 유지하며 일본의 유신헌법을 본따서 흠정 헌법을 만들자는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 중심의 '입헌유신파'와 청나라 조정 자체를 무너뜨리고 새로 공화정을 세우자는 '개혁파와 혁명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광복회는 완고한 혁명파 단체였다. 그들의 슬로건은 “한족을 회복하고, 우리 산하를 되찾으며, 노예의 처지를 바꾼다(光復漢族, 還我山河)”였으며, 청나라 관료에 대한 암살과 무장 폭동을 주된 투쟁 수단으로 삼았다. 루쉰 역시 이 강경한 혁명 사상에 공감하여 동향인 샤오싱 출신의 혁명가 까오뿌잉(高步瀛) 등의 소개로 가입했다.
여기서 잠시 젊은 시절 루쉰의 성향을 이해할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하고 넘어가자. 당시 광복회는 가입 절차가 매우 엄격했는데, 비밀을 유지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해야 했다. 한번은 광복회 수뇌부에서 루쉰에게 청나라 고위 관료를 암살하는 '자살폭탄 테러' 임무를 맡기려 한 적이 있었다. 루쉰은 거절했다. 종교적, 이념적으로 거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죽고 나면 중국에 남겨진 늙은 어머니는 누가 돌보느냐”라며 현실적인 이유를 댔다. 이 때문에 그는 투쟁의 현장 행동대원보다는 주로 사상 고취와 연락 등의 후방 활동을 맡게 되었다.
훗날의 일이지만, 反淸 혁명성향의 그런 그가 왜 청조를 무너뜨린 국민당에게서 돌아섰을까? 이 부분은 국공 투쟁의 승패를 가늠하는데 유용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한편으로 루쉰은 지적 반경을 넓히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08년 7월부터 매주 일요일마다 허풍이 심했던 '무뎃뽀'의 혁명가 쑨원(孫文)이 만든 동맹회(同盟会)의 기관지 『民報』 사내(토우꾜우 '大成중학교'의 한 교실)에 들러 당대 중국의 석학 장타이옌(章太炎)의 문자학 강의도 들었다.
일본 유학 동안 다양한 활동을 통해 루쉰이 중국인은 물론 일본인들과 맺게 된 인연도 적지 않았다. 본고에선 그 가운데 루쉰의 삶에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 일본인들을 소개한다.
학창 시절의 스승 : 후지노 겐꾸로우(藤野厳九郎, 1874~1945)
루쉰이 센다이를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그의 마음을 가장 깊이 붙잡았던 이는 해부학 스승 후지노 겐꾸로우 교수였다. 당시 학내 유일한 중국 유학생으로 주변의 차별과 고립 속에서 외롭게 유학생활을 하던 루쉰에게 후지노 선생은 매주 노트를 거두어 의학 지식뿐만 아니라 올바른 학문의 태도를 정성껏 지도해 준 은사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후지노 선생은 루쉰의 필기록을 받아 전반적인 일본어 문법 교정은 물론, 인체의 뼈와 혈관을 그린 해부도까지 붉은 잉크로 일일이 수정해 주며 격려했다. 루쉰이 의학을 포기하고 토우꾜우로 떠나려 할 때, 후지노 선생은 자신의 사진 뒷면에 '석별(惜別)'이라고 적어 선물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루쉰은 평생 후지노 선생의 사진을 서재 벽에 걸어두고 정신적 지주로 삼았으며, 그의 따뜻한 가르침은 훗날 산문 소설「후지노先生」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토우꾜우 시절의 사상적 동반자 : 아오끼 마사루(青木正児, 1887~1964)
의학을 그만두고 토우꾜우로 간 루쉰은 본격적으로 문학과 번역 활동에 투신했다. 이때 맺은 일본 지식인들과의 교류는 루쉰의 문학이 중국의 국경을 넘는 계기가 되었다. 후일 일본의 대표적인 중국문학자이자 쿄우또(京都)대학 교수가 되는 아오끼 마사루는 토우꾜우 유학 시절부터 루쉰과 쪼우쭤런(周作人) 형제가 주도하던 문학 운동과 번역 사업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아오끼 마사루는 1920년 일본의 잡지 『시나가꾸(支那学)』에 루쉰의 「광인일기」를 소개하며 그를 '중국 신문학의 선구자'로 평가했다. 루쉰의 잡문과 소설들이 가진 혁명적 가치를 예리하게 짚어낸 아오끼 마사루의 평가는 루쉰이 중국 국내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서 주목받는 발판이 되었다.
애증의 인연 : 하따 노부꼬(羽太信子, 1888~1962) 가문
토우꾜우 시절 루쉰의 삶에 가장 깊숙이 들어온 일본인 인연은 제수씨가 된 하따 노부꼬다. 토우꾜우 출신으로 루쉰의 둘째 동생이자 작가인 쪼우쭤런의 아내였다. 그녀는 염색 장인 하따 이시노스께(羽太石之助)의 슬하에 5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
하따 노부꼬가 루쉰의 체제가 된 사연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루쉰과 쪼우쭤런의 형제 관계에 대해 조금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두 형제는 다른 형제들 보다 어릴 때부터 함께 서당에서 공부하고, 함께 놀고, 함께 살아서 서로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작가로서 쪼우쭤런은 장남 루쉰의 영향을 길게, 깊게 받았다. 공부 면에서나, 작가로서나 루쉰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쪼우쭤런은 한 걸음씩 뒤따라 갔다고 할 수 있다. 루쉰이 책을 읽고, 책을 베끼고, 책을 수집하면, 동생도 형을 따라 책을 읽고, 책을 베끼고, 책을 수집했다. 한마디로 쪼우쭤런은 문학 작가로서는 루쉰의 영향 속에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02년, 루쉰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을 때도 4년 후, 쪼우쭤런은 뒤따라 일본으로 갔고, 두 사람은 함께 토우꾜우에서 살았다. 1908년 4월, 루쉰과 쪼우쭤런 등 5명이 루쉰이 문학적 영향을 받은 나쯔메 소우세키(夏目漱石)가 이전에 살던 집을 빌려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그 시기는 나쯔메 소우세끼가 1907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は猫である), “풀베개”(草枕) 등등의 소설들을 발표하면서 일본 문단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을 때였고, 루쉰도 이미 센다이를 떠나 다시 토우꾜우로 와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 시기 그는「人之历史」, 「摩罗诗力说」, 「科学史教篇」, 「文化偏至论」등의 논문을 썼다.) 그는 나쯔메 소우세끼의 작품을 읽고, 외국인의 관점에서 일본을 관찰하고 일본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면서 나쯔메의 작품에 심취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나쯔메가 살던 집을 루쉰이 입주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지만 훗날 각기 일본과 중국을 대표하는 두 문호의 인연을 쫓는 사람들에겐 좋은 테마가 됐다. 즉 일종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루쉰이 이 집에서 살게 된 연유가 흥미롭다. 루쉰이 이곳으로 이사하기 약 7개월 전인 1907년 9월 나쯔메 소우세끼가 토우꾜우대학 인근 니시까따마찌(西片町) 10번지의 로지(吕字) 7번지로 이사했다. 그런데 세들어 살던 중 나쯔메 소우세끼의 명성이 높아지자 집주인이 집값을 올려 나쯔메가 불쾌해서 이사해버렸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한 기회로 루쉰의 고향 친구이자 토우꾜우에서 유학 중이던 쉬쇼우상(許壽裳)이 이곳을 찾아와 이 집에 세 들려고 했다. 하지만 집값이 너무 높아서 그 혼자선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루쉰 형제와 함께 다른 두 명의 친구를 찾아 다섯 명이 함께 임대했다. 그 두 친한 친구는 쩌장(浙江)성 항현(杭縣) 출신인 첸쥔푸(錢均夫, 중국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는 저명한 과학자 첸쉐썬錢學森의 아버지)이고, 또 다른 친구도 같은 고향 사람인 쭈모쉬앤(朱謀宣)이었다.
(첸쉐썬에 관해선 다음 졸고가 참고될 것임 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1041)
그들은 이 집을 다섯 사람이 함께 산다고 해서 '오사(伍舍)'라 칭하였다. 쪼우쭤런의 말에 따르면, 이 주택은 매우 화려하고 넓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섯 사람은 그 집에서 오래 살지 못했다. 그해 연말, 첸쥔푸와 주모쉬앤이 이사하면서 나머지 세 명도 임대가 불가능해졌고, 그래서 그들은 근처의 조금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루쉰이 나쯔메 소우세끼의 옛 집에서 산 기간은 반년 조금 넘었다. 그러나 이 집에서 사는 동안 훗날 루쉰의 삶에 아주 중대한 골치거리가 되는 일이 일어났다. 하따 노부꼬라는 여성이 이 집의 살림을 살아주는 고용인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노부꼬는 집이 가난해서 어려서부터 호텔의 하녀로 일했다고 하고, 조금 커서는 유학생 아파트에서 일하며 학생들에게 침대 시트를 깔아주는 일을 맡았다는 게 유력한 설이다.
아무튼 그 뒤 하따 노부꼬는 나이가 비슷한 쪼우쭤런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고, 두 사람은 1909년에 결혼했다.
같은 해에 루쉰은 쪼달리는 경제사정으로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는 항쪼우(杭州), 샤오싱(紹興), 난징, 뻬이징, 샤먼(厦門), 꽝쪼우(廣州), 상하이(上海)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고, 1911년 신해혁명 직후에는 중국 정부의 교육부 관리로 일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두 형제의 감정은 상당히 깊었다. 거의 3~5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았을 정도로 우애가 있었다.
한편, 형이 귀국하고 2년 뒤인 1911년, 쪼우쭤런도 하따 노부꼬를 동반하고 귀국해서 샤오싱의 집에서 살았다. 그 이듬해 하따 노부꼬는 첫 아들 쪼우펑이(周豊一)를 임신하자 일본에 있던 자신의 남동생 시게히사(重久)와 여동생 요시꼬(芳子)를 살림을 돕게 한다는 명목으로 샤오싱으로 불러들였다. 1912년, 상하이 생활을 접은 루쉰이 뻬이징에 도착했는데, 5년 후, 쪼우쭤런도 뻬이징에 와서 형제가 함께 살게 됐다. 두 형제는 뻬이징에 정착한 후에도 같이 글을 다듬으며, 심지어 글이 발표될 때 이름까지 교환하곤 했을 정도였다.
그 후 하따 노부꼬의 남동생 시게히사는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1914년 요시꼬는 쪼우쭤런의 동생인 쪼우졘런(周建人)과 결혼하였다. 루쉰 집안과 하타 집안이 이중으로 혼인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쪼우젠런은 둘째 형과 달리 생물학자이자 정치가로 활동했으며, 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 체제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1919년 루쉰이 뻬이징(北京) 빠따오완(八道灣)의 큰 집을 구입하면서, 장모 루루이(魯瑞)와 쪼우쭤런 일가, 막내 동생 쪼우젠런 일가가 모두 모여 대가족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기묘한 동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23년 7월, 하따 노부꼬는 루쉰과 심각한 불화를 겪었고, 결국 루쉰은 빠따오완의 주택을 나와 따로 살게 되었다. 이 불화의 원인에 대해서는 경제적 갈등부터 문화적 차이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문제는 거의 하따 노부꼬에게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녀는 뻬이징에서 대가족 생활을 하는 가운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치스러워지고 교만하기 시작한 게 갈등의 원인이었다. 예컨대 새로 산 물건을 얼마 쓰지 않고 버리고 새로 사려고 했다거나 음식이 조금이라도 입에 맞지 않으면 주방에 다시 만들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하인을 고용하여 자신을 돌보게 했다.
그 시절 루쉰과 쪼우쭤런이 고소득층이었지만 살림을 사는 하따 노부꼬의 사치스런 생활이 분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로 같은 시기 마오쩌둥이 뻬이징대학 도서관 사서 보조원으로 한 달에 겨우 大洋(당시 중국의 화폐 단위) 8위앤을 받고 생활했을 때 루쉰 한 사람만 한 달 수입이 大洋 350위앤이었으니 동생의 수입까지 더하면 루쉰 집안은 상당히 고소득 가정이었던 셈이다.
결국 제수씨의 사치와 거만으로 인해 루쉰은 매우 난처하게 되었고, 지출도 빠듯해졌으며, 심지어 돈을 빌려 생활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하따 노부꼬의 씀씀이가 절제되지 않아 루쉰 집안의 생활비가 수입 대비 적자행진을 계속하자 대가족 생활비의 주요 부담자인 맏형인 루쉰이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돈 쓰는 것도 절제해야 하고 미래도 생각해야 한다”고.
이 말에 매우 화를 낸 노부꼬는 루쉰을 쫓아내려고 궁리한 끝에 몇 가지 오해와 형제들 간의 의견 불일치로 결국 루쉰이 아내(朱安)를 데리고 분가했다. 그 뒤 하따 노부꼬는 1962년 뻬이징대학 병원에서 병사했다.
상하이 시절의 피난처 : 우찌야마 칸조우(内山完造, 1885~1959)
루쉰의 생애 마지막 10년을 지탱해 준 가장 극적인 일본인 인연은 상하이의 우찌야마 간조우이다. 그가 상하이 홍커우(虹口) 지역에서 운영하던 '우찌야마 서점'은 루쉰의 단골 산책로이자 사상적 피난처였으며, 당시 상하이 지식인들과 좌파 문인들의 사랑방이기도 했었다.
1927년 루쉰이 상하이로 이주한 후 루쉰과 우찌야마 칸조우 두 사람은 국경을 초월한 깊은 우정을 나눴다. 장졔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가 사상적으로 공산당에 기울어진 이른바 좌익 문인들을 탄압하고 루쉰을 체포하려 했을 때, 우찌야마는 기꺼이 자신의 서점 뒷방과 아지트를 제공해 루쉰을 피신시켰다. 1930년대 루쉰은 중국 좌익작가연맹(좌련)을 이끄는 등 국민당 장졔스 정권에 가장 눈엣가시 같은 비판자였다. 이 때문에 국민당 정부는 루쉰에게 수시로 체포령을 내렸고, 실제로 루쉰의 절친한 동료 문인들이 체포되어 비밀리에 처형당하기도 했다. 이때 루쉰이 급히 도망쳐 숨은 곳이 바로 상하이 조계지(외국인 관할 구역) 안에 있던 우찌야마 서점이었다. 서점 주인 우찌야마 간조우는 일본인이라는 신분과 조계지의 특권을 이용해, 남의사(藍衣社) 등의 국민당 비밀특무조직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서점 뒷방이나 자신이 따로 계약한 비밀 아지트에 루쉰과 그의 가족들을 수차례 숨겨주었다.
루쉰이 국민당의 감시를 피해 다른 집으로 이사해야 할 때, 우찌야마 간조는 자신의 이름(일본인 명의)을 빌려주어 비밀 거처를 계약해 주었다. 게다가 루쉰의 저작물이 판매 금지를 당해 경제적으로 고립되었을 때는 원고료를 융통해 주거나 도피 자금까지 대주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는 루쉰의 이름으로 발송하기 어려운 편지나 원고를 대신 전달해 주는 우체부 역할까지 도맡았다. 당시 루쉰이 직접 편지를 보내거나 원고를 투고하면 감시망에 걸려 체포될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우찌야마 간조우는 루쉰의 편지와 원고를 받아 자신의 이름이나 일본 우편 시스템을 통해 안전하게 발송해 주는 대리인 역할을 자처했다. 루쉰의 목줄을 쥐고 있던 외부와의 소통 창구를 일본인 친구가 온몸으로 지켜낸 것이다.
국적과 정치적 이념을 뛰어넘어 맺어진 두 사람의 두터운 신뢰는 루쉰이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꺾지 않고 저항의 작가로 살 수 있었던 작지 않은 버팀목이었다. 이 사실을 접하면 일본인은 편협하다는 이미지가 그로 인해 사라지는 듯하다.

루쉰의 임종을 돌본 주치의 : 스도우 이오조우(須藤五百三, 1876~1959)
루쉰은 상하이 시절 지병인 폐결핵과 천식이 악화되어 밤낮없이 고통받았다. 이때 우찌야마 간조우의 소개로 만난 상하이 거주 일본인 의사가 바로 스도우 이오조우였다. 일본 육군 군의관 출신인 스도우는 상하이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중국인 환자들도 격의 없이 돌보던 의사였다.

루쉰은 스도우 의사를 매우 신뢰하여, 주변 사람들이 중국인 명의나 서양인 전문의를 추천해도 “스도우 선생이 내 체질을 가장 잘 안다”라며 그의 처방을 끝까지 따랐다. 스도우는 1936년 10월 19일 55세로 루쉰이 숨을 거둘 때 그의 임종을 지킨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루쉰 사후 중국 문단 일각에서는 일본인 의사인 스도우의 오진이나 태만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 측의 진료 기록과 현대 의학적 분석에 따르면 당시 루쉰의 폐 상태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절망적인 수준이었으며, 스도우는 의사로서 마지막까지 매일 왕진을 오며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루쉰의 아들 쪼우하이잉(周海嬰) 역시 후일 회고록에서 스도우의 헌신을 인정했다.

루쉰은 평생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 그리고 그 근성과 군국주의에 대해선 매섭게 비판했다. 그러나 일본 유학 시절 자신을 편견 없이 대했던 스승 후지노 겐꾸로우 선생에서부터, 말년의 박해 받던 자신을 지켜준 우찌야마 간조우와 주치의 스도우 이오조우에 이르기까지, 자신과 깊은 우정을 나눈 일본인들의 따뜻한 인류애와 신의는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 이 입체적인 인연들이야말로 대문호 루쉰의 사상과 문학을 지탱시킨 또 다른 숨은 주역들이 아니었을까?
일본인들 중에는 간혹 루쉰이 만난 사람들처럼 체제와 이념, 민족과 국경을 초월해 겉과 속이 다르지 않는 진정한 휴매니티를 보이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글을 맺으면서 사족 한 마디! 나도 지금까지 이미 20대 때부터 적지 않은 외국인들과 교류한 바 있지만 국적을 초월해 신뢰할 수 있고 깊은 우정을 나눈 외국인 친구들은 몇이나 될까? 나는 그들에게 신뢰하고 믿음이 가는 든든한 한국인 친구로 지내려고 노력했지만, 202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중국 각지의 그 많은 친구들은 대부분 공산당의 눈치를 보고 나와의 오랜 인연을 끊다시피 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유일하게 대학에서 나의 강의를 들은 적지 않은 유학생들 중에 딱 한 사람만 나와 아직까지는 연락을 하고 있다. 그가 무사하기를 빌 뿐이다.
2026. 5. 24. 09:44.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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