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인물 및 리더십

노기 마레스께의 순사 : 충절인가, 죽음에 의한 책임의 종결인가?

雲靜, 仰天 2026. 6. 7. 07:31

노기 마레스께의 순사 : 충절인가, 죽음에 의한 책임의 종결인가?


          서상문(역사학자, 시인, 수필가)

1912년 9월 13일 오후 8시, 메이지천황(明治天皇, 1852~1912)의 영구를 모신 장례 행렬이 궁성을 떠났다. 그 출발을 알리는 포성이 토우꾜우(東京)의 밤하늘에 울려 퍼지던 바로 그때,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께(乃木希典, 1849~1912)는 부인 노기 시즈꼬(乃木静子, 1859~1912)와 함께 자택에서 자결하여 63세의 생을 마감했다. 부인은 53세였다.

노기는 메이지 천황의 초상화 아래에 정좌한 채 할복한 뒤 스스로 목을 찔렀고, 부인은 단도로 가슴을 찔렀다. 그러므로 흔히 말하는 ‘노기 부부의 동반 할복’보다는 ‘노기 부부의 동반 자결’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다.

자진 전의 노기 부부

두 사람의 죽음은 메이지천황을 따라 죽은 순사(殉死)였다. 실제로 이날은 메이지천황의 대장례(大喪)가 거행된 날이었다. 노기는 자신을 총애한 천황이 세상을 떠나자 마치 주군을 잃은 옛 무사처럼 그 뒤를 따라 죽은, 근대국가의 육군대장이 근대 이전 무사사회의 순사라는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근대 일본인의 초상(近代日本人の肖像)」도 노기가 메이지천황이 사망하자 부인과 함께 순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노기의 죽음은 당시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많은 일본인들은 그를 주군에게 마지막까지 충성을 바친 무사의 전형으로 떠받들었다. 노기는 청일전쟁(日清戦争, 1894~1895)과 러일전쟁(日露戦争, 1904~1905)을 거치면서 일본의 전쟁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가 죽자 그의 충성심과 검소한 생활, 두 아들을 전쟁에서 잃고도 슬픔을 내색하지 않았다는 일화들이 널리 퍼졌다. 개인 노기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군신(軍神) 노기로 다시 태어났다.

그런데 그의 자결을 단순히 메이지천황에 대한 충성 하나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잃어버린 군기와 35년의 수치

노기 마레스께의 죽음에는 메이지천황에 대한 순사 이외에도 오랫동안 쌓여온 수치와 속죄의식이 겹쳐 있었다.

1876년, 메이지 신정부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사족(士族)들의 반란인 ‘아끼즈끼의 난(秋月の乱)’이 일어나자 노기는 휘하의 제14연대를 이끌고 이를 진압하는 등 이미 공을 많이 세우고 있었다. 문제는 그 이듬해였다. 1877년 세이난전쟁(西南戦争) 당시 노기는 보병 제14연대장 대리로 싸웠다. 세이난전쟁은 메이지정부의 중앙집권화와 폐번치현(廃藩置県), 징병제, 질록처분(秩禄処分) 등으로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잃은 옛 사족들의 불만이 폭발한 일본 근대 최대의 내전이었다.

그 중심에는 사이고우 타까모리(西郷隆盛, 1828~1877)가 있었다. 사이고우는 정한론(征韓論)을 둘러싸고 오오꾸보 토시미찌(大久保利通, 1830~1878) 등 정부 지도자들과 대립하다가 1873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카고시마(鹿児島)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사학교(私学校)를 세웠는데, 정부의 화약고 이전과 밀정 파견에 격분한 사학교계 사족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키자 이들의 추대를 받아 정부에 대한 문죄(問罪)를 내걸고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사이고우가 이끈 군대는 옛 사쯔마번(薩摩藩) 출신 사족이 주축이었기 때문에 흔히 사쯔마군(薩摩軍) 또는 사이고우군(西郷軍)이라 불렸다. 1877년 2월 15일 카고시마를 출발한 이들은 쿠마모또성(熊本城)을 향해 북상했고, 메이지정부는 징병제로 조직한 정부군을 보내 진압에 나섰다.

그해 2월 22일 노기가 이끌던 보병 제14연대는 쿠마모또현(熊本県) 우에끼(植木) 부근에서 사쯔마군과 교전했다. 이 과정에서 제14연대의 군기수 카와라바야시 유우따(河原林雄太, 생몰연대 미상) 소위가 전사하고, 메이지천황이 하사한 연대기(聯隊旗)가 사쯔마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근대 일본군에서 군기는 단순한 깃발이 아니었다. 천황이 직접 하사한 연대의 혼이자 명예의 상징이었다. 군기를 적에게 빼앗긴 것은 지휘관에게 씻기 어려운 치욕이었다. 노기는 처벌을 자청하고 자결하려고까지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군기 상실은 이후에도 그의 의식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노기는 자결을 앞두고 남긴 유서에서 세이난전쟁 당시 연대기를 반란군에게 빼앗긴 뒤 죽을 때를 기다려왔다는 취지로 밝혔다. 군기를 빼앗긴 것을 속죄하기 위한 죽음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메이지천황의 죽음은 전혀 새로운 자살 동기를 만들어낸 사건이 아니라, 35년 동안 가슴속에 묻어둔 속죄의 죽음을 실행하는 최종적인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 합리적인 역사해석이다.

노기의 삶은 군기를 빼앗긴 그 순간부터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의 집행을 유예받은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전쟁터에서 명예를 회복하려 했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죽음으로 그 수치의 기억을 씻어내려 했다.

뤼순의 승리와 수많은 죽음

노기의 이름을 일본 국민에게 각인시킨 것은 러일전쟁의 뤼순공방전(旅順攻囲戦)이었다. 뤼순(旅順)은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따롄(大連)시에 속한 항구도시다. 도마 안중근 의사가 갇혀 있었던 감옥이어서 우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도시다. 나도 오래전 1990년대 후반에 그곳을 답사한 적이 있다. 당시 러시아어로는 포르트 아르투르(Порт-Артур), 영어로는 Port Arthur라고 불렸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직전 유수 근위사단장으로 복직한 노기는 5월 뤼순요새 공략을 목적으로 편성된 제3군(第三軍) 사령관으로서 세계적인 요새로 평가받던 뤼순요새를 공격했다. 러시아가 대량의 콘크리트를 사용해 근대적 요새로 보수한 뤼순 요새는 기관총, 철조망, 참호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노기의 명령에 따라 세 차례 감행된 총공격 모두 막대한 사상자만 내고 실패했다. 여러 차례 정면공격을 감행한 일본군이었지만 러시아군의 기관총과 대포, 철조망과 견고한 진지 앞에서 막대한 희생을 냈을 뿐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만주군 총사령관으로서 육군 원정을 총지휘한 인물은 오오야마 이와오(大山巌, 1842~1916)였다. 이 인물은 사이고우 타까모리의 사촌 동생이고 정말 소설 같은 극적인 내용이 아주 많아서 나중에 별도로 소개할 것이다.

아무튼 전황을 낙관하고 있던 육군 내부에서는 요새 공략에 고전하면서 그의 지휘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무모한 돌격을 감행하다 희생되고 있어 노기를 경질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러나 어전회의 석상에서 메이지 천황이 이에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일본 국민들의 그에 대한 비판 여론도 나날이 거세졌다.

그런데 악전고투 끝에 노기는 마침내 뤼순을 점령했다. 일본 국민에게 그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함락한 영웅이었다. 전투 중인 6월에 대장으로 진급한 그는 이 승리로 9월에는 백작으로 승작되었다. 그러나 그 승리와 영광 뒤에는 수많은 장병의 시신이 쌓여 있었다.

제3군 소속의 장남 노기 카쯔노리(乃木勝典, 1879~1904) 육군 소위는 랴오뚱(辽东) 반도의 난산(南山)전투에서, 제2군 소속 차남 노기 야스노리(乃木保典, 1881~1904) 육군 소위는 11월의 제3차 총공격의 뤼순공방전 중 전사했다.

시즈꼬는 전쟁에서 두 아들을 모두 잃은 어머니였고, 노기는 수많은 부하와 두 아들을 전장에서 잃은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노기에 대한 비난 여론은 노기 장군이 고전한 뤼순 요새가 난공불락의 근대 요새라는 사실과 더불어 두 아들의 전사 사실이 전해지면서 동정 여론으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오히려 노기는 일본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개선장군으로서 귀국했다.

노기는 개선한 뒤 메이지천황에게 전황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많은 장병을 죽게 한 책임을 언급하며 울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뤼순 요새 공략전에서 수많은 장병을 죽음으로 내몬 책임을 통감하고 속죄 차원에서 자결을 결심했다. 그는 메이지 천황에게 스스로 죽어 책임을 지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천황은 어려운 심경은 이해하지만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며,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어선 안 되고 꼭 죽고 싶다면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렇게 하라는 취지로 만류했다는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일화가 어느 정도 후대의 신화화 과정을 거쳤는지는 별도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다만 노기가 뤼순전투에서 발생한 엄청난 희생을 마음의 짐으로 안고 살았던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군기 상실의 수치 위에 수많은 사상자와 두 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덧붙여졌다.

그에게 메이지천황의 죽음은 충성을 바칠 주군의 죽음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붙잡아두었던 금지 명령이 풀린 순간이기도 했다.

노기의 죽음은 어떤 유형인가?

노기의 자결은 일본인의 죽음 의식 가운데 어느 유형에 속할까?

첫째, 주군의 죽음을 뒤따르는 순사적 죽음이다. 순사는 주군과 신하의 관계를 죽음 이후까지 이어가려는 전근대 무사사회의 충성 방식이었다. 에도막부(江戸幕府)도 이미 순사를 금지했고, 메이지시대에는 법과 제도상 사라진 관습이었다. 그런데 근대 군대의 최고위 장성이 죽음을 통해 봉건적 주종관계를 되살렸다.

둘째, 과거 자신의 과오를 생명으로 갚으려는 속죄적 죽음이다. 군기 상실의 치욕과 뤼순전투의 막대한 희생을 자신의 죽음으로 갚으려 한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쌓은 공적과 전공으로도 씻어지지 않는 수치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청산하려 했다.

셋째, 무사다운 방식으로 삶을 마감하려는 명예의 죽음이다. 노기는 늙고 병들어 자연스럽게 죽기보다 자신이 선택한 시간과 형식 속에서 생을 끝냈다. 그는 천황의 장례일을 택했고, 장례 행렬이 출발하는 때에 맞추어 전통적인 무사의 방식으로 죽었다. 그의 자결은 우발적인 충동이 아니라 시기와 형식이 치밀하게 선택된 상징적 의식이었다.

이 점에서 노기의 죽음에는 일종의 죽음의 미학도 들어 있다. 그러나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 1925~1970)의 죽음과는 성격이 다르다.

미시마가 젊은 육체, 천황, 할복을 결합해 자신의 정치사상과 유미주의를 공개적인 정치극으로 연출했다면, 노기는 충성·수치·속죄·명예를 죽음으로 결산하려 했다. 미시마의 자결이 미학적·정치극적 자기완성이라면, 노기의 자결은 순사적·속죄적 자기완결이었다.

충절인가, 봉건적 누습인가?

당시 메이지 천황을 따라 순사(신하가 죽은 임금을 따라 죽음)한 그의 소식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신문 호외를 통해 그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된 국민들은 슬퍼하며 길에서 통곡하기도 했다. 노기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그를 따랐던 히로히또도 눈물을 흘리며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1908년 4월 히로히또가 황세자로 학습원에 입학하자 노기는 근면과 검소를 주안에 둔 교육을 행했다. 히로히또도 그를 ‘원장 각하’라고 부르며 자신의 인격 형성에 가장 영향을 준 사람으로 노기를 꼽을 정도로 그를 잘 따랐다. 토우꾜우의 황궁에서 학습원까지 차로 통학하던 히로히또를 지도해 그 어떠한 궂은 날씨에도 걸어 다니도록 만든 것도 노기였다.

일본인 모두가 노기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찬양한 것은 아니었다. 노기의 순사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비판의 목소리는 압도적인 추모와 찬양의 분위기 속에 묻히면서 쉽게 용납되지도 않았다.

중견 언론인 기류우 유우유우(桐生悠々, 1873~1941)는 『시나노마이니찌신문(信濃毎日新聞)』 주필로 재직하던 중 「누습타파론―노기 장군의 순사(陋習打破論―乃木将軍の殉死)」라는 논설을 발표했다. 이 글은 1912년 9월 19일부터 21일까지 신문에 실렸다.

기류우는 순사와 자살을 봉건사회의 유습이자 야만의 유풍이라고 규정하면서 그러한 누습은 한시라도 빨리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기가 메이지천황에게 충성하기 위해 죽었다면 새로 즉위한 다이쇼우천황(大正天皇, 1879~1926)에게는 오히려 불충한 결과가 되지 않느냐는 날카로운 반문도 제기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비판이다. 그러나 노기의 순사를 충절과 무사도의 극치로 받아들이던 당시 일본 사회는 이를 쉽게 용납하지 않았다.

기류우의 논설이 실리자 『시나노마이니찌신문』에는 독자들의 강한 비난과 항의가 쏟아졌다. 노기를 모욕했다거나 일본인의 충성과 도덕을 훼손했다는 취지의 반발이었다. 비판의 대상은 그의 논리가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었다. ‘군신’으로 떠받들어진 노기를 감히 비판했다는 행위 자체가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사태가 커지자 신문사 사장 코사까 쥰조우(小坂順造, 1881~1960)는 이튿날 직접 「노기 대장의 죽음을 논함(乃木大将の死を論ず)」이라는 글을 게재하여 “나는 그 논지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기류우 개인의 견해와 신문사의 공식 입장을 분리하고, 격앙된 독자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사회의 성향과 민도, 특히 비판적 이견을 받아들이는 시민의식의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일본은 이미 근대적 의회와 신문, 학교와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천황과 군신을 둘러싼 문제에서는 합리적 비판보다 충성의 감정과 집단적 숭배가 앞섰다.

한 인간의 죽음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자는 주장조차 국가적 영웅과 천황제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여졌다. 근대적 제도는 빠르게 정착했지만, 이견과 비판을 포용하는 시민적 정신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서구의 제도와 기술은 받아들였지만, 권위와 집단의 감정으로부터 독립하여 판단하는 근대적 개인의식은 충분히 자라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일본인 전체를 미성숙했다고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기류우의 견해에 공감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그가 그러한 논설을 신문에 발표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일정한 언론 공간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독자들의 강한 비난과 사장의 공개 반박은 천황제적 충성과 군인숭배가 비판적 이성을 압도할 만큼 강력했음을 말해준다. 이는 개인의 판단보다 집단의 분위기와 권위에 대한 복종을 중시하는 당시 일본 사회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기류우는 이 논설 때문에 즉시 신문사에서 쫓겨나지는 않았다. 그는 1914년까지 『시나노마이니찌신문』에 남아 있었다. 퇴사의 직접적인 배경에는 시멘스사건(シーメンス事件)을 둘러싼 정우회(政友会) 비판과 정우회 소속이던 코사까 사장과의 갈등이 있었다.

다만 노기 순사 비판으로 촉발된 독자들의 공격은 기류우와 보수적인 독자층, 신문사 경영진 사이에 존재하던 긴장을 일찍부터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었다.

기류우의 비판은 핵심을 찔렀다. 노기가 오직 메이지천황에게만 충성했다면, 새로 즉위한 천황과 국가, 그리고 자신이 가르쳐야 할 후세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되는가? 살아남아 전쟁의 경험을 전하고 희생의 원인을 성찰하며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 오히려 더 무거운 책임은 아니었을까?

죽음은 책임의 가장 엄숙한 표현처럼 보인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더 이상 현실의 책임을 질 수 없다. 살아서 비판을 받고 실패를 인정하며, 과오를 고치고 자신이 남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죽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무거운 책임일 수 있다.

노기 마레스께의 자결을 자신의 책임을 외면한 비겁한 도피였다고 일언지하에 단정할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자신이 믿는 충성과 책임을 완결하려 했다. 다만 그 책임의식이 철저히 천황과 국가, 무사의 명예라는 틀 안에 갇혀 있었다는 한계가 있은 자결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노기가 수많은 일본군 장병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꼈다면, 일본군에 의해 목숨과 재산을 잃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고통도 같은 무게로 느꼈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2017년에 칼럼「노기 마레스케와 안중근」에서 지적했듯이 그가 강조한 인간의 도리는 일본인과 천황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편협한 국수주의자의 이중성이었다.  https://m.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324030002&search=1

[기고] 노기 마레스케와 안중근/서상문 고려대 한국전쟁 아카이브 연구교수

노기 마레스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전쟁 영웅. 러일전쟁에서 육군 중위인 두 아들을 잃고도 비통함을 내색하지 않은 외강내강형. 국가 중대사에는 늘 “노기 장군을 부르

m.seoul.co.kr

노기의 윤리는 강렬하고 단호했지만 보편적이지 않았으며, 그의 충성은 철저했지만 인류 전체를 향하지는 않았다. 세계의 지성들로부터 일본이 세계성과 보편 사상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 중의 하나다.

한 시대가 노기와 함께 죽다

노기 부부의 죽음은 일본 문학계에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근대 일본문학의 거목 나쯔메 소우세끼(夏目漱石, 1867~1916)의 소설 『마음(こころ)』에서 ‘선생’은 노기의 죽음을 계기로 자신도 ‘메이지의 정신(明治の精神)’에 순사하겠다는 생각을 품는다.

작품 속 선생은 노기가 군기를 잃은 뒤 35년 동안 죽을 때를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자신 역시 오랫동안 짊어진 죄책감을 죽음으로 끝내려 한다. 노기의 순사는 한 군인의 자결을 넘어 메이지라는 시대의 종말과 죄의식, 고독을 상징하는 문학적 사건이 되었다.

이름난 소설가이자 번역가였던 모리 오우가이(森鷗外, 1862~1922)도 노기 부부의 순사 소식을 접한 뒤 순사를 주제로 한 「오끼쯔 야고에몬의 유서(興津弥五右衛門の遺書)」에서 노기 마레스케의 할복 자살을 충절과 무사도 정신의 극치라고 하면서 경건하고도 찬미적인 어조로 서술했다.

지식인, 문학인들이 모두 긍정 일변도는 아니었다. 노기의 죽음을 시대착오적이고 전근대적인 행위라고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다수 존재했다. 소설가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1883~1971), 다이쇼 시대 중심적 작가였던 아꾸따가와 류우노스께(芥川竜之介,  1892~1927) 등이 그들이었다.

훗날 일본인들로부터 국사로 존숭을 받은 소설가 시바 료우따로우(司馬遼太郞, 1923~1996)도 여순 요새 공략전에서의 지휘 문제와 함께 그의 죽음을 다루며 그를 무능하고 ‘어리석은 장수’라고 혹평했다.

노기의 죽음은 근대 일본의 문인들에게 ‘인간은 무엇을 위해 죽는가?’, ‘충성은 어디까지 정당한가?’, ‘죽음으로 책임을 완성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노기는 메이지시대(明治時代, 1868~1912)와 함께 죽었다. 그의 죽음에는 한 시대를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의지가 들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그의 죽음은 일본이 근대로 나아가면서도 끝내 떨쳐내지 못한 봉건적 정신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역사의 명암은 한 순간에 생기고 어느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노기의 순사로 인한 봉건적 정신의 그림자는 일부 일본 국민들 마음 속에도 드리워졌다. 러일전쟁의 영웅으로 생전부터 해군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던 도우고우 헤이하찌로우(東鄉平八郎, 1847~1934)와 함께 육군의 군신으로 추앙받던 노기가 죽자 그를 위한 신사가 자택이 있던 토우꾜우를 비롯해 쿄우또, 야마구찌(山口)현, 도찌기(栃木)현, 홋까이도우(北海道) 등 그와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던 각지에 세워졌다.

노기는 근대 일본군의 장군이었지만 전근대 무사처럼 죽었다. 근대 국민국가의 교육자(그는 황족과 화족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학습원 원장에 임명되어 메이지 천황의 아들 히로히또를 교육했음)였지만 주군을 따라 죽는 순사를 택했다. 자신의 과오에 누구보다 엄격했지만, 그 책임을 살아서 감당하기보다 죽음으로 종결했다. 그 모순 속에 노기 마레스께라는 인간과 메이지 일본의 본질이 함께 들어 있다.

노기의 죽음을 무조건 숭고한 충절로 찬양해서도 안 되고, 한낱 광신적 자살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그는 수치와 책임을 평생 마음에 품었던 엄격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방식은 책임을 죽음으로 완결할 수 있다고 믿은 무사적 세계관의 산물이었다.

인간의 진정한 용기는 장렬하게 죽는 데만 있지 않다. 때로는 치욕과 비판을 견디면서 살아남아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는 것이 죽음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다.

노기의 죽음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도 바로 이것이다. 죽음으로 책임을 끝낼 것인가, 살아서 끝까지 책임을 감당할 것인가?

2026. 6. 7. 07:29.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