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만리장성 등정
1998년 8월 초 세 번째 만리장성 등정! 친구와 찾은 중국 여행시 순전히 중국도 처음이고 북경도 초행길인 친구를 위해 다시 올라갔던 것이다. 가는 김에 북경에 거주하던 또 다른 친구의 아들도 데리고 갔다.
동쪽 하북성 산해관에서 서쪽 끝 가욕관에 이르는 6,352㎞의 만리장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세계 최대, 최장의 성이다. 아침 일찍부터 북경을 출발해 올라가니 북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땀이 식고 일망무제로 천하를 다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만리장성의 길이와 시발점을 슬그머니 늘이는 둥 역사왜곡을 자행해왔다. 원래 이 장성의 동쪽 끝, 즉 동쪽의 시발점은 산해관이었다. 하지만 최근 수년 전부터 중국 역사학계에서 압록강 어귀의 단둥이 시발점이었다면서 한반도에까지 엿가락 늘리듯 늘여놨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한반도 유사시 한반도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하기 위한 동북공정의 일환임은 물론이다.
중국인들은 이 만리장성이 달에서 지구를 보면 육안으로도 보이는 유일한 세계 최대의 축조물이라고 자랑하고 있는데, "쌩구라"다. 달에서 아무리 봐도 만리장성은커녕, 이 보다 더 길고 훨씬 더 높은 에베레스트 산맥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기껏해야 해발 수 백m의 산 능선에 평균 높이 10m 정도의 벽돌 및 암석을 쌓아 놓은 것이 보일리 만무하다.
하옇튼 좋게 보면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축지법이나 장풍이 사실인듯이 부풀려서 구라 치는 것은 알아줘야 할 중국인들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장성이 우리 역사와 관계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이 길지도 않았을뿐만 아니라 성벽도 없었으며 그저 중간중간에 돌무지, 모래 무지를 쌓아서 경계가 됐을 뿐인 고대는 별반 말할 게 없고, 임진왜란 때의 상황은 관련이 깊다. 조선 조정의 구원요청을 받은 명 황제가 산해관 바깥 만주 지역의 여진족 침입을 막기 위해 이쪽 산해관 지역에 배치해놓은 명나라군 정예부대를 한반도로 보내는 바람에 결국 여진족 팔기군에게 방어선이 무너져 명이 멸망하게 되는 역사의 현장인데, 명나라만 망하고 그치지 않았다.
명군은 조선땅에 들어갔지만 왜군을 물리치지는 못했다. 오히려 명군은 왜군과 화약을 맺어 조선을 재물로 삼으려는 동향까지 보였다. 오늘날 우리가 대국들끼리의 이면합의 따위를 경계해야 할 사례가 된다. 조선도 왜군의 침략에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되어서 이에 대해 반성한 답시고 실학이 일어났다. 일본도 바깥에 나와보니 세상이 넓다는 걸 깨닫고 쇄국의 빗장을 걸었다. 즉 동아시아 전역이 중대한 변혁을 맞이하게 됐던 것이다.
그런 과거의 역사를 의식하면서 멀리 발해만 방향의 동쪽 하늘을 바라보니 당시 군사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만리장성은 이곳 산해관 쪽이 아니라 여타 지역으로도 올라가 볼 필요성을 느낀다.
2014. 5. 13. 11. 47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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