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오늘의 역사 : 신라의 불교 공인, 인천상륙작전, 프랑스의 한국문화재 반환
9월 15일 오늘은 음력으론 8월 중추절 직전이지만 양력으로는 역사상 몇 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다.
내가 주목하는 첫째가 527년(신라 법흥왕14년) 9월 15일 오늘, 법흥왕이 이차돈의 순교(이차돈 23세)로 불교를 공인한 사실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처음 들어온 게 고구려 시대 소수림왕 372년이었다고 하지만 이 보다 조금 더 이른 360년대(지순도림 관련 설)였다. 암튼 불교는 382년에 백제에도 전해졌는데, 신라에는 약 150년 가까이 늦게 전해졌다. 불교가 신라에는 왜 이렇게 늦었는지 그에 대한 배경과 원인은 차후에 자세하게 논할 기회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여기선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와서(특히 신라에서) 고등종교로 기능하면서 사회의 전반적인 지적 수준이 높아졌고, 문화도 세련되기 시작하면서 귀족화되고 정치 세력화 되는 장단점이 있었지만, 전반적인 백성의 지력이 높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점은 불교가 백제에서 일본으로 들어가서 고대 미개상태의 일본사회를 고등화된 수준으로 발전, 개선시킨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둘째로 주목되는 건 오늘이 인천상륙작전 기념일이라는 점이다. 1950년 오늘 맥아더 원수가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강하게 반대해온 미 합참 지도부의 우려 속에 해군 함정 261척, 병력 7만 5000여 명을 투입해서 결행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황을 일거에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시켰다. “크로마이트작전”이라 명명된 이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국군과 미군은 인천과 서울을 수복해서 수많은 시민들을 북한군 치하의 학정에서 구했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이북의 북한군을 포위하고 퇴로를 차단해 공세이전의 발판을 마련함으로써 그간 북진을 반대해왔던 트루먼 대통령 등 워싱턴의 미국 수뇌부가 미군의 북진을 승락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런데 모택동은 6월 말 맥아더가 한강방어선을 시찰하고 상륙작전을 머리속에 구상하던 시기인 7월 초에 이미 인천상륙작전을 예상하고 북경에 북한 특사로 급파된 이상조를 통해 김일성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미군의 인천 상륙작전에 대비하라고 했지만 김일성은 모택동의 말을 듣지 않고 낙동강 방어선 허물기에 올인하다 결국 일패도지 하게 됐다. 그런데 여담이지만, 중국에선 나의 논문이 중국학계에 발표되기 전인 2000년 전까지는 인천상륙작전을 최초로 예견한 이는 모택동이 아니라 주은래의 군사 참모인 雷英夫였다는 것이 정설처럼 돼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나의 논문이 발표되고 난 후에 뇌영부는 새로 회고록을 내면서 나중에 알고 보니 모택동이 먼저 발견했었다라고 수정했다. 공을 가로채려고 하다가 나의 논문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https://suhbeing.tistory.com/m/1752
세 번째로 눈길이 가지는 것은 1993년 오늘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프랑스가 병인양요 때 약탈해가서 프랑스도서관에 소장했던「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를 영구임대 형식으로 돌려받았는데 프랑스가 우리의 이 문화재를 돌려주면서 내세운 명분이 가관이라는 점이다. 한국정부가 고속전철 차종을 프랑스의 떼제베(TVG)로 결정해준 데 대한 보답이라나! 사실, 19~20세기 제국주의시대 서구 열강들이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지에서 식민지 쟁탈 경쟁을 벌일 때 가장 가장 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나라가 영국이었지만 식민지 민족들에게 가장 악랄하게 착취하고 못된 짓을 많이 한 것은 프랑스인이었다. 자기들이 조선의 문화재를 도둑질해 가 놓고 우리 정부가 반환 요청을 해도 오랫동안 돌려주지 않다가 떼제베를 선택하도록 하는 조건의 하나로 활용했다는 건 참으로 몰염치한 짓이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국가, 국민이라고? 예술을 사랑한다고 자부하는 프랑스인들이 전부는 그런 건 아니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못된 짓을 많이 한 나라다.
이 참에 또 한 가지 더 언급하겠는데, 우리나라 역사교육도 국민들이 역사를 전체적이고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도록 이루어져야 된다. 작은 예에 불과하지만, 우리에게 널리 각인된 “영국신사”라는 말은 영국 상류층 사람들이 교양 있는 행동을 보이니까 그것이 신사로 보여서 그렇게 명명했겠지만 그 사람들은 결코 신사들이 아니었다. 영국이 해외 식민지 약소국에 한 짓거리를 보면 상류층 사람들이 그 정부의 식민지 침략정책에 참여했거나 아니면 의회의 식민지 정책을 지지한 사람들이었을 것임에도 영국신사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아마도 20세기 초반부터 20년대까지 한동안 영국과 동맹관계까지 맺어 꽤 우호적이었던 일본인들이 영국인들에 대해서 신사라는 호칭을 불러줬던 것이 일제 때 한반도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영국인을 영국 신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중국정부가 일관되게 교육한 결과였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2024. 9. 15. 08:09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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