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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오늘의 역사 : 마더 테레사 수녀의 삶과 선종

雲靜, 仰天 2024. 9. 5. 06:49

9월 5일 오늘의 역사 : 마더 테레사 수녀의 삶과 선종


9월 5일 오늘은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 수녀가 선종한 날이다. 1997년 그의 나이 87세 때였다.

87년 간 이타행의 범위로선 끝이 없는 광대무변한 그의 삶을 너댓 챕터의 글로는 묘파할 수 없다. 자료도 제한적이다. 그래서 이 공간에선 그야말로 모기의 눈꼽만큼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 평가는 뒤로 미룰 일이다.

1910년 8월 26일, 테레사가 부모로부터 알바니아계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곳은 오스만 제국 시기의 코소보주 스코페(오늘날의 북마케도니아 스코페인데, 노벨 평화상 웹사이트에 따르면, 지금의 아그네스 곤셰 보작시우 Agnes Gonxhe Bojaxhiu)였지만 선종한 곳은 그가 헐벗고 굶주리고 병약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인도 동부 벵갈주의 콜까따(영국식 영어로는 캘커타 Calcutta)였다.

테레사는 청소년기에 종교 생활의 소명(Calling)을 처음 느끼고 18세 때인 1928년 9월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의 라스판햄(Rathfarnham)으로 이주해서 로레토(Loreto)수녀회에 들어갔다.

감수성이 발달하게 되는 소녀 시절 느꼈다는 종교적 소명의식은 훗날 테레사 수녀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생명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고 말하면서 “쓰러진 사람들 앞에 엎드려 길가에서 죽도록 내버려둔 사람들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 주신 존엄성을 보았습니다”라고 한 말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소급 적용이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로레토 수녀회에 들어간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녀가 되면서 본명이 알바니아어로 아네저 곤제 보야지우 Anjezë Gonxhe Bojaxhiu)이었던 이름을 테레사로 개명했다. 얼마 뒤 같은 해 테레사 수녀는 선교 활동과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당시 대영 제국의 식민지이던 인도로 이주해가서 로마 가톨릭 교회 소속으로 주로 인도 동부의 최대 도시인 콜까따에서 활동했다. 2019년 내가 직접 인도 꼴까따를 체험한 바로, 그곳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인구 천 만 명이 넘는 거대한 도시 전체가 극심한 빈부격차로 빈곤, 기아, 질병, 환경오염들이 상층부의 소수 기득권자들의 무관심으로 방치돼 있는, 지옥을 방불케 하는 곳이었다. 그곳 도시 구석구석을 며칠 간 돌아다녀보니 수도 뉴델리나 뭄바이 등등 인도의 그 어떤 곳도 이 도시와 다를 게 없지만 테레사 수녀가 특히 꼴까따를 빈곤과 질병 퇴치를 위한 자선 및 헌신할 지역으로 정한 이유를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28년부터 꼴까따에서 수녀생활을 시작한 테레사 수녀는 1947년, 인도 자치령이 독립하고 1950년에 인도 공화국으로 국호를 결정하자 인도로 귀화해 인도 국적을 취득했다. 그해는 그가 꼴까따에 사랑의 선교회라는 기념비적인 천주교 수녀회를 세운 해였다.

1952년 8월 22일, 테레사 수녀는 꼴까따 시청에서 제공한, 그곳 칼리 신전 뒤 순례자들의 숙소로 쓰이던 건물에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Home for Sick and Dying Destitutes) 혹은 “순결한 마음의 장소”(Place of Pure Heart, 벵갈어 Nirmal Hriday의 번역)이라는 이름의, 말 그대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지금도 변함 없지만 당시 인도사회의 최상위 금수저로 군림하던 힌두교도들이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선교활동을 위해 시 소유 건물을 쓸 것을 의심해서 시위를 벌였지만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이 종교를 초월한 자선적 복지 활동을 펴는 것을 보고는 시위를 철회하고 동의한 사실은 테레사의 인간에 대한 헌신과 봉사의 역정에 작은 일화로 남아 있다.

1955년 9월 23일, 테레사 수녀는 이번엔 “때의 집”(시슈 브하반)이라는 어린이보호시설을 개설하였고, 3년 뒤인 1958년에는 여기에 90명의 어린이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자 경찰과 공무원들이 고아와 버려진 어린이들을 이곳으로 보냈는데 어린이 집에서 이들을 먹이고 병도 고쳐주었다. 이곳에서 보살핌을 받은 어린이들은 교육도 받고 일부는 해외로 입양되기도 했다. 1968년에는 한센병 환자들의 커뮤니티인 평화의 마을(Shanti Nagar)을 개설하고, 1975년에는 회복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선물”(Prem Dan)이란 이름의 장기 요양소도 설립했다.


테레사 수녀의 사랑과 헌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 계열의 선교 단체인 사랑의 선교회가 계속 발전하면서 그의 자비로운 봉사도 더 확장됐다. 타계 2년 전인 1995년에는 미국 워싱턴에 입양센터 마더 테레사의 집을 세우기도 했다. 199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빈민, 고아들은 물론이고 나병, 결핵, 에이즈 환자들을 구제하고 돕기 위한 요양원과 거처지, 무료 급식소, 상담소, 고아원, 학교 등을 포함해 세계 123개국에 610개의 자선 및 선교 단체를 설립해서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구하는데 헌신했다. 아마도 자선단체로는 세계 최다로 이 기록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테레사 수녀는 사랑의 선교회를 모체로 해서 선종 직전까지 45년간 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세계 각지의 많은 나라에서 헌신했다. 그가 받은 아래의 상들은 그의 헌신, 인간애와 사랑의 실천에 공헌한 노력을 인정한 것들이지만 그를 기리는 것으론 이러한 상들로도 부족하지 않나 싶다.

기적의 연꽃상
착한 사마리아인상
존 F. 케네디상
국제평화와 이해촉진을 위한 네루상
세계에서 신앙을 증진하기 위한 탬플턴상
제1회 알버트 슈바이처상
발찬상
요한 23세 평화상
막사이사이상
노벨 평화상(1979년 9월 5일)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 1980년)
1983년 영국 명예 메리트 훈장(honorary OM) 등이 그가 수상한 주요 상훈들이다. 참고로 바라트 라트나는 인도 정부가 수여하는 가장 격이 높은 시민 훈장이다.

원래 상이 많은 나라일수록 저급한 사회, 후진국이고 엉터리 상이 많다. 제대로 된 심사도 없이 공적도 없는데 돈으로 사고팔고 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 열거된 상들은 그런 저급한 하류의 상들이 아니다. 최소한 공적에 대한 공정한 심사를 거친 것들이다. 그런데 위 상들은 테레사 수녀의 헌신과 공적이 공정하고 객관성이 담보된 것으로 세계가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통받는 인류에게 도움을 준 공로로”(“for her work for bringing help to suffering humanity”)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혈통으로는 알바니아인입니다. 시민권으로는 인도인입니다. 신앙으로는 가톨릭 수녀입니다. 소명으로는 세상에 속합니다. 마음으로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마음에 속해 있습니다.”(“By blood, I am Albanian. By citizenship, an Indian. By faith, I am a Catholic nun. As to my calling, I belong to the world. As to my heart, I belong entirely to the Heart of Jesus.”)

“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벌거벗고 집이 없으며 신체에 장애가 있고 눈이 멀고 병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 받지 못하며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들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인도 꼴까따에서 87세의 나이로 선종한 때는 1997년 9월 5일이었다. 사거 후 9월 13일 인도 정부가 엄수한 국장으로 테레사 수녀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위대한 성인을 떠나보내면서 세계인들이 울었다.

선종 후 그는 2003년 10월 19일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諡福, Beatificatio) 됨에 따라 복녀의 반열에 오르면서 “캘커타의 복녀 테레사”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 뒤 2016년 9월 4일에는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성(諡聖, 라틴어로는 canonizatio) 돼 성녀의 반열에 올랐다. 참고로 시복이란 가톨릭에서 어떤 사람을 '복자(il beato/the Blessed)'로 인정하는 행위를 가리키고, 시성이란 기독교에서 순교자를 성인으로 선언하는 행위를 말한다. 테레사 수녀가 시성 선언에 따라 성인 목록에 등재됨과 동시에 성인으로 인정받아 전 세계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공경 받을 수가 있게 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성 미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테레사 수녀는 삶의 모든 측면에서 인간의 생명, 태어나지 않은 생명, 버려진 생명에 대한 환영과 방어를 통해 모든 사람이 자신을 이용할 수 있도록 관대한 신의 자비를 베풀었습니다.”(Mother Teresa, in all aspects of her life, was a generous dispenser of divine mercy, making herself available for everyone through her welcome and defense of human life, those unborn and those abandoned and discarded," said Pope Francis during her canonization Mass.) 종교적 관점에서가 아닌 역사학적 관점에서 보면 테레사 수녀의 삶에 대한 평가였다.

2016년 9월 4일, 마더 테레사 시성식에 운집한 관중

나의 개인적 견해로는 정치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채 세속 권력적으로 움직이는 바티칸의 교황 보다 더 나은 진정하고 순수한 성자로 추앙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선보다 악이 더 활개치고, 온갖 거짓과 위선이 범람하고, 무지와 아만이 지성과 순수를 뒤덮고 있는 이 시대에 그가 남긴 말 중에 이런 말이 마음에 다가 온다.

“얼마나 많이 주었느냐가 아니고 주는 행위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담겨있는 지가 중요하다.”

2016년 9월 4일, 마더 테레사 시성식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그가 시종일관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과 봉사는 어디에서 나온 것이었을까? 무엇이 그것을 끝까지 지탱시켜줬을까? 신의 긍휼과 자비였을까? 사랑이라는 신앙의 힘이었을까? 아니면 거대한 인류애였을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한 인간이 걸어온 위대한 인류애, 인간애를 실천한 흔적과 그 역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신이 있다면, 마더 테레사는 신의 자비의 대역자였다.

2024. 9. 5. 07. 36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