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8일 오늘의 역사 : 일본 國歌 기미가요와 무용가 최승희의 삶
8월 8일 오늘도 지난 역사에서 무수히 많은 사건 사고들이 일어났던 날이다. 그 중에서 나의 주목을 끌지만 상호 관련이 없는 두 가지를 개략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 國歌 기미가요(君が代)와 지난 세기 무용가 겸 안무가이자 배우 등의 멀티플 예능가로서 남북한 무용계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던 최승희(1911~1969)의 삶이 주제다.
먼저, 1916년 8월 8일 오늘 64세의 일기로 경성부에서 죽은 뒤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혀 있는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Franz von Eckert, 1856~1916)가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편곡한 사실을 밝히고 기미가요의 뜻 그리고 그가 대한제국 애국가를 지은 사실을 소개할 것이다.
국내 인터넷엔 프란츠 에케르트가 기미가요를 작곡한 것으로 소개돼 있지만 사실은 작곡한 게 아니라 편곡한 것이다. 작곡과 편곡은 엄연히 다르다.
기미가요의 출처는 다이고 천황(醍醐天皇, 885~930)의 칙명에 따라 서기 905년에 천황에게 상주된 '고금와가집'(古今和歌集)에 있던 축하가(祝賀歌)였는데 이미 축하가로 1000년 동안이나 불려오고 있었다.
이 축하가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일본의 정식 국가가 되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직후인 1869년(메이지 2년) 상기 고금 와가집의 단가에서 가사가 선택되었고, 1880년(메이지 13년)에 궁내성 아악과(宮内省 雅楽課)에서 선율을 다시 붙여 사용하다가 그 후 당시 일본에서 일본 해군 군악대 교사로 있던 독일인 작곡가 프란츠 에케르트가 편곡하였고, 이것이 13년 후인 1893년(메이지 26년)에 “문부성 告示“로 국가로서 정착했다.
당시 에케르트는 그의 나이 27세 때인 1879년 일본에서 음악교사로 봉직하기 위해 일본에 와 있었다. 에케르트가 기미가요를 작곡한 게 아니라 편곡했다고 하는 건 그가 1880년 오꾸 요시이사(奥好義, 1857~1933)와 하야시 히로모리(林廣守, 1831~1896)가 작곡하고 하야시가 찬정(撰定)한 기미가요에 반주와 화성(和聲)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 뒤 일제가 해외로 침략의 마수를 뻗쳐나갔을 시기엔 기미가요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이자 천황제 국체와 동일시됐지만,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 이후부터는 맥아더 사령부(GHQ)의 관여로 國歌의 지위에서 떨어졌다. 그러다가 세기가 바뀐 1999년(헤이세이 平成 11년)에 이르러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国旗及び国家に関する法律)로 정식 일본의 국가로서 법제화, 공식화되었다. 요컨대 일본이 완전히 시대역행적으로 역사를 거꾸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기미가요는 무슨 뜻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긴요하다. 오늘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가사 내용을 좀 살펴보면 이 노래의 성격을 바로 알 수 있다.
기미가요에서 '그대'를 뜻하는 기미, 즉 君은 군주, 고귀한 사람을 가리킨다. 또한 君은 일본의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에 등장하는 신을 말하는데, 일본인들은 인간세 최초로 성별을 가지고 태어난 신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기미가요의 기(キ)와 미(ミ)는 각기 남신인 이자나키노미코토(イザナキノミコト)와 여신인 이자나미노미코토(イザナミノミコト)를 뜻한다. 이 두 남녀 신을 합치면 '너'이자 '남과 여'라는 뜻이다. 이 두 신은 불완전한 존재여서, 아이를 가져서 완전한 어른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그 결과 태어난 것이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君が代 중 が는 '~의 '뜻을 지닌 일본어 の에 해당되기 때문에 “군주의 요(代)”가 된다. 그럼 요(代)는 무슨 뜻일까? 요(代)는 “시대를 넘어서”라는 뜻이 있다. “치요에 야찌요로”(千代に八千代に), 즉 서로 사랑하고 맺어져 서로 존경하는 시대가 앞으로 천년, 8천년,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일본인들은 이 제목에 부연 설명을 붙여놓고 있다. 즉 “잔돌의 바위가 되어”(さざれ石の巌となりて) 작고 많은 돌들이 뭉쳐 하나의 바위가 된다. 남녀가 맺어져 태어난 아이, 부모나 친척이 되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단결 협력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또 “이끼의 무스까지”(苔のむすまで)라고 설명하는데 이 가운데 '이끼'는 자손의 번영을 나타내고, '무스'는 세 기둥의 신들 중 두 기둥인 타카미무스비와 카미무스비의 무스를 지칭하는데, 남녀가 서로 협력해서 유대와 신뢰 아래 오랜 세월에 걸쳐 육성하자는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한다. '이끼의 むす까지'를 한자로 쓰면 '이끼의 生 때까지'가 되어 아이를 키우고 기른다는 뜻이 된다. 일본어의 아들과 딸을 뜻하는 무스꼬(むすこ)와 무스메(むすめ)는 바로 이 창조의 신으로부터 왔다고 한다.
곡명에 관한 지금까지의 일본 측 설명에 따르면, 일본 국가 기미가요는 기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인간의 사랑과 번영과 단결을 노래한 '축하의 노래'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성격과 군국주의 대외침략의 상징이었다는 기능적 의미를 탈색시켜 순수하게 음악적 측면에서만 들어보면 기미가요는 굉장히 장중하여 듣는 이들의 심금을 올리는 음악성이 뛰어난 곡이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해외 각국의 국가나 애국가들 중에 가장 장중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는 에티오피아 국가가 단연 압권이었는데 기미가요도 이에 손색이 없다.
그러나 어떠한 사물이든 그 자체로서는 가치 중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것이 여러 가지 부정적 역사가 관련돼 있다거나 정치적, 문화적 의미가 부여되면 전혀 다른 성격의 사물이나 의미체가 되고 만다. 과거 중국인 스스로 중국을 나타냈던 “支那”라는 단어가 일본인들이 그 말에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의미를 덧씌움으로써 결국 “지나”라는 말이 중국인을 모욕하고 무시하는 단어로 전락한 것처럼, 또 중국집 주인을 뜻하는 “짱꿰이(掌櫃)”(민간에선 “짱께”로 축약돼 사용되고 있음)나 게따(下駄, 즉 일본식 나막신)를 신은 쪽진 발의 모양을 가리키는 “쪽발이”와 기미가요도 그와 유사한 성격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런데 지금도 일본의 극우세력은 해외 파병을 통한 군국주의를 부활하고자 평화헌법 제9조의 “비핵 3원칙”을 개악하기 위해 수십년에 걸쳐 힘을 쏟아붓고 있다. 만약 그들이 지금이라도 독일처럼 깨끗하게 과거 침략의 역사를 인정하고, 진정한 사과와 함께 군국주의와 대외 확장 정책을 완전히 포기한다면 이 기미가요 역시 가치중립적으로 다시 건전하게 사용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역대 일본 극우 정권이 걸어온 궤적을 보면 그렇게 되기는 연목구어인 만큼 어렵고 요원한 일로 보인다. 살해된 아베 전 수상이 2015년 발표한 종전 70주년 담화에서 한일관계를 겨냥해 “다시는 사과하지 않겠다”는 선언적 다짐을 한 바 있다. 그 뒤 후임 지도자들이 모두 한국에 대해선 사과와 양보를 거부하고 있다. 아니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알고 행동한다. 일본이 과거 보다 훨씬 더 퇴행적이고 노골적인 뻔뻔함을 보이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상호 협력을 하면서도 긴장을 놓지 않아야 되고 그 행보를 예의 주시해야 됨은 물론, 기미가요의 국가화를 경계해야 할 소이연이 있는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향후 미중 관계가 어떻게 정리, 귀결되고 중공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반 세기 안으로 일본이 또 다시 미국세력을 등에 없고 아시아 인근 나라들에 대한 호가호위를 하다가 지난 과거처럼 미국과 갈등을 빚거나 미국에 도전하는 침략의 역사가 재연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고 본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에케르트가 어떻게 해서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했을까? 에케르트는 기미가요 탄생에 일조한 뒤 일본을 떠날 때까지 여러 곳의 음악 관련 일을 맡았다. 참고 삼아 예를 들면 해군성 요꼬스까 진수부(横須賀 鎮守府) 소속 군악대(1879. 3~1889. 3, 1897. 4~1899. 3), 온가꾸또리시라베가까리(音樂取調掛, 즉 1879년부터 1887년까지 존재한 문부성 소속의 음악교육기관)에서 관현악, 악전, 화성(1883. 2~1886. 3), 궁내성 식부직(宮内省 式部職)으로 있으면서 취주악, 관현악(1887. 4~1899. 3) , 육군 토야마(戶山)학교(1890. 4~1894. 3), 근위군악대(1891. 8~1892. 7)를 비롯해 일제 양악 교육기관의 거의 모든 곳에서 근무했다.
이 뿐만 아니라 에케르트는 1897년 1월 메이지 천황의 황비인 에이쇼우(英照, 1835~1897) 황태후의 大喪 의례 시에 사용한 “애의 극”(『哀の極』かなしみのきわみ)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 뒤 에케르트는 1899년 4월 19일 배로 요코하마를 떠나 함부르크를 통해 귀국해 1900년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왕국 육군 군악대장으로 취임했지만 아시아지역에서 활동하고자 사직하고 1901년 2월 19일 대한제국으로 건너왔다. 현재 입수 가능한 관련 자료들에는 그가 왜 하필이면 조선으로 와서 일을 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동기나 이유는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암튼, 그는 조선왕조의 궁중 음악교사가 되어 대한제국 군악대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는 또한 서양음악 학습 희망자를 훈련시켜 반년여 만에 악대를 키워냈고, 동년 9월 9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생일을 축하하는 군악대의 첫 연주회에서 두 곡을 연주했다. 한일강제 병합 후 그가 이끌던 군악대가 장례원음악대(掌禮院音樂隊)로 개칭되고 예산이 축소되었지만 1910년 에케르트는 조선 왕실과 추가 계약을 체결하여 민간원조도 받아서 악대 활동을 계속하였다. 1914년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적성 외국인으로서 활동이 제한되기도 했었다. 1916년 초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해 있던 중 그해 8월 6일 경성의 회현동 자택에서 위암으로 객사했다.
에케르트가 1901년 취주악 형식의 대한제국 애국가(가사는 민비의 조카로 훗날 국치일에 자결한 민영환이 붙임)를 작곡하게 됐는지에 대해선 자세하게 설명한 자료는 없다. 그는 일본에서는 행진곡, 취주곡, 아악, 민요, 가요 등을 망라해서 총 23곡을 편곡 및 작곡한 것에 비해 조선에서는 애국가 외에 '한국식 퍼레이드 행진곡'(Koreanischer Präsentiermarsch, 1901년 이전 작곡)과 1902년에 작곡한 '조선어 찬미가'(朝鮮語讃美歌) 등 단 세 곡 밖에 없다. 그래도 그는 생전에 음악적 기여를 인정 받아 1902년 12월 대한제국이 수여한 제3등 태극훈장(太極勲章)을 받았다.
다음 둘째 주제로 들어가보자. 1969년 8월 8일 오늘은 지난 세기 남북한 무용계의 전설적인 인물인 최승희가 향년 58세라는 이른 나이에 작고한 날인데, 그가 왜 월북했는지 그 전후 시기에 평이하지 않은 삶을 산 그에 대해 몇 가지 개념 별로 소개하고자 한다.
황해도 해주에서 대대로 내려온 명문가 출신으로 과거에도 급제해 양반의 관록을 먹은 부친 최준헌의 2남 2년 중 막내 딸로 태어난 최승희는 일제 시기 경성의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 이 학교 졸업 후 교사들이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최승희에게 일본 토우쿄우(東京)의 음악학교에 진학하라고 권했지만 연령 미달로 입학 허가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최승희는 교사로 취직하기 위해 경성사범학교 입학시험을 봤다. 100명 모집에 860명이 응시한 이 시험에서 그는 7등으로 합격하였지만, 이번에도 나이가 입학 연령에 미달된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최승희는 하루 종일 울었을 정도로 낙심이 컸다고 하지만, 결국 큰오빠 최승일의 권유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대 무용가 이시이 바꾸(石井漠, 1886~1962)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데 이시이 바꾸의 문하생 시절 독선적인 데다 이기적이고 오만한 최승희의 성격의 일단이 드러난 일화가 있다. 이시이가 병이 났을 때 그가 자신이 운영하던 무용단을 떠나지 말아 달라는 당부를 했지만 최승희는 스승의 이 당부를 뿌리치고 떠나버린 일이다. 그 뒤 최승희는 1931년 혼인한 남편 안막(1910~?)이 일제 경찰에 구속된 데다 아이 출산 후의 후유증으로 급성 늑막염까지 앓으면서 죽을 고비와 함께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다시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스승 이시이 바꾸를 찾아 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승희는 일본에서 활동할 기반을 쌓은 후 다시 스승 이시이 바꾸로부터 독립하였고, 1932년 일본에서 첫 단독 공연을 가진 후 남편 안막이 나서서 주선한 결과 '최승희 후원회'가 만들어지고 신망이 두텁던 조선의 정객 여운형, 아동문학가 마해송, 일본의 촉망 받던 소설가 카와바따 야스나리 등 유명 인사들의 경제적 후원을 받았다.
최승희의 전승기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는 1930년대 후반부터 그는 미국, 유럽, 남미 등지로 세계 순회 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그 시절에 교통편이 발달한 요즘도 가기 어려운 남미에까지 공연을 다녔으니 그의 인기와 성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해외 순회 공연 중 그는 세계적인 명사들, 이를테면 문학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장 콕토, 배우 게리 쿠퍼, 찰리 채플린, 로버트 테일러, 화가 파블로 피카소 같은 당대의 저명 인사들이 그의 공연을 관람하는 영광을 맛 봤다. 로버트 테일러는 최승희와 굉장히 친했고,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최승희를 소개해 주며 최승희의 헐리우드 영화 출연을 알선하기도 했는데,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는 통에 헐리우드 진출이 무산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 같은 지명도와 유명세에 힘 입어 최승희는 치솟는 인기 덕분에 당대의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모던 걸, 패션 스타로서도 조선과 일본의 유행을 주도하였고, 심지어는 생애 음반도 여러 장 냈으며, 나중엔 최승희의 연기가 정말 눈뜨고 봐주기 힘든 정도였다는 혹평을 받은 '반도의 무희'를 포함하여 여러 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이러한 인기와 성가는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최승희는 지방의 춤꾼들을 따라다니며 전통춤을 배웠으며, 권번의 기생들까지 찾아 다니면서 전통춤을 배울 정도의 열정에다 리듬 감각이 매우 예민하고 뛰어났던 음악 능력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예컨대 그는 춤 추는 도중에 가야금을 연주하던 연주자가 실수를 하면 추던 춤을 멈추고 그 연주자에게 어떤 부분에서 틀렸다고 지적을 할 수준이었다고 한다.
천부적 재능에다 피나는 노력이 배가된 결과였겠지만 최승희는 조선 말기의 명고수 한성준(1874~1942)에게서 배운 승무(나중에 조지훈의 시 '승무'를 응용하기도 함)를 비롯한 전통춤을 바탕으로 서양춤과 한국춤을 결합한 이른바 “신무용”을 만들어냈고, 전통 무용과 현대 무용을 용합한 신무용의 창시자로서 당시 한국무용계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사실상 한국의 본격적인 현대 무용은 최승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남북한은 물론 중국 무용계에까지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평가되고 있다.
최승희에 대한 평가는 이미 월북 전에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렌의 애가'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여류 시인”(이 용어는 여류 화가와 함께 여성 비하의 의미가 내재된 말이지만 과거 시대상황이 반영된 듯 널리 통용되었음) 모윤숙(1910~1990)이 극찬한 게 있다.
“여성 4000년에 이처럼 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무희가 있었던가? 최승희는 한국의 봉건사회에서 여성탄압과 일본인의 감시속에 살고있는 여성들을 대표해서 이들에 대한 반항자로서의 존재가 되었다.”
모윤숙의 이 평가는 최승희의 무용 자체에 대한 호평에다 신여성의 존재감을 부각시킨 평가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여권을 의식하고 산 당시 모윤숙의 문제의식이 스며든 것임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승희의 무용 자체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일본인 예술가들이 남긴 평이 더 리얼리티가 살아 있다. 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일본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소설가 카와바따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872)와 동시대 탐미주의 문학을 추구하다 천황주의의 부활과 군국주의의 찬미를 외치면서 할복 자살한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 본명 平岡公威, 1925~1970)가 내린 평들이 더 적실성이 있어 보인다.
카와바따는 최승희가 일제 강점기인 1927년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해 왕성하게 활동했을 시기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모에다 당시로선 팔등신(1910년대 생 식민지 조선 여성의 평균 신장이 150cm, 남성 평균 신장이 160cm대 초반이었던 것과 비교하면)에 준한다고 할 수 있는 165cm의 키에 55kg라는 늘씬한 최승희의 몸에서 발산하는 ‘영산춤’, ‘칼춤’, ‘보살춤’, ‘고구려 무희’, ‘승무’ 등의 춤사위를 예술적 감수성으로 눈여겨 봤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는 디테일하게 이렇게 평한 바 있다.
“최승희의 조선춤은 옛 춤 그대로가 아니라 옛 것을 새롭게, 약한 것을 강하게, 없어진 것을 살려서, 자기 스스로 창작한 것에 그 생명이 있다.”
최승희가 1944년 1월 27일~2월 15일까지 토우쿄우의 제국 극장에서 20일 동안 23회나 행한 공연을 본 미시마 유끼오는 조금 긴 소감을 남겼다.
“그 때 나는 佛像的인 아름다움에 완전히 끌려 들어갔다. 최승희 최후의 리사이틀이 제국 극장에 있었을 때에 최승희의 브로마이드를 사가지고 와서 보니까 반나체 불상춤(미시마는 보살춤을 불상춤이라고 했다) 사진이 있었다. 몸에 보석이 장식된 반나체 사진을 보고 어쩐지 에로틱하게 생각되었다. 그때에는 스트립쇼와 같은 것이 없었으므로 최승희의 이러한 반나체춤은 전쟁 중에 허가된 최후의 반 스트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승희의 반나체 불상춤은 지금의 전 나체의 스트리퍼보다 훨씬 더 에로틱한 자태를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러한 최승희의 몸에서 무엇인가 환상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그 불상춤의 환상은 그 얼굴이 불상과 비슷해서 어디엔가 불상적인 것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더 요염한 맛을 낸 것이 아닌가 본다.”-- 미시마 유키오, わが思春期, 1973年에서.
소설가이자 극작가이기도 했던 미시마 유끼오의 눈과 마음이 어째서 최승희가 춘 불상춤에 꼽혔을까? 일제 강점기 최승희가 선보인 춤들 중에서 가장 대표작이랄 수 있는 보살춤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게 모두 공수래 공수거라는 인생 역정 등의 여러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줄거리로 보이지만, 큰 틀은 보현보살의 행원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최승희의 동서로서 수제자였지만 최승희가 자기 딸 안성희의 경쟁 상대가 될까봐 견제한 것에 대해 실망해서 월남한 김백봉이 나중에 공개한 보살춤 프로그램에는 “조선시대의 명화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무용화하였으며, 동양의 불교 예술에 표현된 조형적인 여성의 미를 그린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한 자리에 선 채로 손발과 몸을 움직여 추는 것이 특징인 보살춤은 불상의 자태와 여기서 나오는 정서적 영감 그리고 감성적 환영을 춤으로 승화시킨 이른바 정중동(靜中動)의 춤이다. 조명도 행위자의 뒤에서 비추어 후광처럼 처리해 보살의 환영적인 효과를 더해주고 있으며, 역광을 통해 실루엣으로 처리된 신체의 선은 더욱 더 그 신비스러움을 배가시킨다는 것이다.
상기 카와바따와 미시마의 두 평을 종합해보면 일본인 무용가에게 사사한 최승희였지만 아마도 완전히 일본풍을 넘어서고, 조선의 전통춤까지도 뛰어넘어 한국무용사상 처음으로 고전 무용의 현대화를 이끌면서 벌써 서구적인 에로틱하고도 어쩌면 동시대 문학과 미술계에서 유행하던 모더니즘적 몸동작을 보여준 게 아닐까 싶다. 불상을 춤으로 표현하는데 반나체로 췄다는 것 자체가 불교와 에로틱이라는 전혀 이질적인 요소로 구성된 전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였지 않았겠나 싶다.
후술하겠지만, 위세가 대단한 문화 권력자가 돼 제자들에게도 갑질하던 위치에 있던 최승희는 문학평론가인 남편 안막의 수 차례에 걸친 설득과 종용에 따라 월북해서 김일성의 환영을 받고 평양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세워 북한 무용계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공훈배우·인민배우 칭호와 함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까지 지내게 된다.
이렇듯 월북해서 초기 몇 년간은 각광을 받으면서 예술적 역량을 펼쳤고 최승희는 월북 후 한 동안은 대우를 받고 순조로웠다. 그가 남한에서 호화롭게 사치를 누렸던 삶의 습성도 고쳐지지 않고 계속 되었다. 최승희는 무용가로 성공한 후 구두쇠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매우 인색해졌으며, 심지어 형제들 사이에서도 돈 문제로 의가 상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사치를 심하게 부렸다. 그래서 남편 안막이나 주변 사람들이 최승희에게 사치스런 생활을 자제하라고 수차례나 충고하였지만 그 습성은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와 몸은 천수를 누릴 수 없없다. 무용가로서 북한에서 누린 최승희의 영화는 남편 안막이 숙청당한 1958년 때까지 뿐이었다. 월북 후 10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모든 게 박탈 당하고 행방불명 상태로 또 10년 정도 지나서 최승희 역시 안막처럼 급전직하의 운명적 최후를 맞게 된다. 자신의 운명이 그렇게 단명할 줄은 몰랐겠지만 그는 왜, 무엇 때문에 월북을 감행했을까? 남한에서 온갖 호사와 유명세를 한껏 누렸고 그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적지 않은 수입이 있었는데 왜 최승희는 38선을 넘었을까? 최승희는 일제시대 한 때 무용강습소 운용으로 번 돈으로 일제에 거액의 국방헌금을 내고 일본군 위문 공연에도 출연하는 등 친일파로 부역한 전력이 있어 북한에선 환영 받지 못하겠다는 판단이 섰을텐데 말이다. 이유가 될만한 논의를 추려보면 몇 가지 범위로 좁혀진다.
먼저, 월북 이유의 한 가지로 추론해볼 수 있는 것은 최승희도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유행처럼 추구했던 사회주의사상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최승희는 숙명여학교를 다니면서 월반해서 동급생보다 2년이나 빨리 졸업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사회주의사상을 접했다면 빨리 이해했을 수 있다. 그러나 앞뒤 정황을 봤을 때 이념적 이유는 최승희의 월북 원인이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애초에 최승희는 공산주의사상에 투철하지도 않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한 삶을 살고자 하는 쪽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보다는 최승희가 남한사회에서 곤경에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던 차에 남편의 끈질긴 월북 종용을 받으면서 남한 보다 더 좋은 대우와 여건을 제공해주겠다는 북한의 제의가 솔깃해져서 월북을 결심했을 것으로 추론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이러했다.
그 전에 우선 광복 직후 최승희에 대한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았던 사실이 신경질적인 그가 코너로 몰렸을 때 취하는 반응이나 대응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최승희는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었던지 토우꾜우의 제국 극장에서 마지막 공연을 마친 시점인 1944년 2월 중순 이미 일제가 패망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일본에서 경성으로 돌아가지 않고 북경으로 도피했다가 중국 국민정부에 억류돼 있다 풀려나 1946년 5월 29일 혼자 귀국했다. 그때는 남편 안막이 광복 직후 월북한 상태여서 서울에 없었다. 이 사실을 안 어떤 신문 기자가 최승희를 보고 “당신 남편은 평양으로 갔는데, 당신은 이 곳에 왜 온 것인가?”라고 면전에서 대놓고 빈정댔다. 한 성깔 하던 최승희가 가만히 있지 않고 그 기자에게 험한 말로 쏘아 붙였는데, 현장에 있던 기자들이 이런 최승희의 태도에 친일에 대한 반성의 기색이 전혀 없다고 더욱 신랄하게 비판하는 바람에 최승희의 이미지는 더욱 추락하게 됐다.
최승희에 대한 여론은 갈수록 더욱 악화돼서 그를 당장 반민특위에 넘겨야 한다는 주장이 들끓었으며, 이로 인해 최승희는 더욱 겁을 먹게 됐다. 최승희가 남한에 남았다 해도 월북한 남편 안막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입지가 곤란해질 수도 있어 그 시점에선 최승희는 이미 사면초가에 갇힌 상황이라 이 처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다 월북한 남편이 자주 비밀리에 서울에 잠입해서 최승희에게 월북을 종용했지만, 아내가 월북할 생각이 없자 다시 “여기 있으면 당신이 갈 곳은 감옥 밖에 없다. 나랑 같이 북으로 가면 여왕처럼 대접 받을 것”이라며 최승희를 협박하고 달래기까지 했다고 한다. 안막이 최승희가 월북하기 전까지 뻔질나게 남과 북을 왔다 갔다 한 게 사실임을 볼 때, 최승희는 남편을 통해 월북 후 자신이 북한에서 받을 조건이나 누릴 대우에 관한 교섭을 김일성과 주고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 시기 최승희가 월북하기 직전에 그가 월북할 거란 소문이 있었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말렸다고 한다. 당시 이승만 박사도 최승희에게 남한에 남아서 일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심지어 최승희는 자기가 월북을 하는 게 나은지 점쟁이를 찾아가서 물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점쟁이가 최승희에게 말년엔 비참해질 것이니 서울에 남아 있는 게 좋고 북한엔 가선 안 된다고 말해줬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최승희는 남편의 계속되는 설득과 종용에 결국 마음을 바꿔 1946년 7월 20일 오빠 최승일과 함께 월북하고 만다. 최승희의 월북은 자신이 친일파로 단죄 받을 것을 두려워 한 상황에서 계속된 남편의 월북 종용에 설득되면서 남한보다 더 좋은 조건에서 활동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는 게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요컨대 친일파로 몰려 반민특위에 체포될 것을 우려한 최승희가 자신의 처지를 탈피하고자 한 도피성에다 김일성이 그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것을 믿고 결행한 월북이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 판단이다. 어쩌면 김일성이 최승희에게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최승희의 마음이 흔들렸다고 보는 게 좀 더 정확한 해석일 수도 있겠다.
막내 딸이었던 최승희가 월북하고 난 뒤 언니인 최영희를 빼고 작은 오빠 최승오도 훗날 월북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고, 그의 가친 최준현도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다. 최준현은 아들딸 세 명이 월북한 통에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 결국 사위 안막의 양아버지인 안창선의 집 문간채에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6.25전쟁 통에 숨을 거뒀다고 한다. 최승희와 그 형제들에겐 부모의 안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활로만 생각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일본 와세다(早稲田) 대학 노어노문학과 출신의 인텔리겐차로서 김일성 정권에서 1950년대 중반 한 때 내각 문화선전성 부상까지 지냈고 카프동맹 중앙위원과 조선로동당 당무위원도 지낸 남편 안막이 1958년에 숙청되자 그뒤부터 최승희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게 됐다.
최승희의 사망일은 정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평양 애국열사릉에 이장된 그의 무덤 묘비엔 1969년 8월 8일에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고 한다. 그가 사후에 복권된 것은 1980년대부터 김일성이 “그래도 최승희의 무용이 최고였지”라고 긍정한 발언 그리고 김일성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좋게 말한 최승희에 대한 호평이 복권의 결정적인 근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2003년 2월 9일 최승희의 시신이 애국렬사릉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사후 34년 만에 복권된 셈이다. 그 뒤 북한 정권은 2011년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행사까지 성대하게 열어줬다고 한다.
김일성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남긴 평가는 최승희를 숙청시킨 북한이 그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렸는지 바로 알 수 있는 대표적인 기록이다. 이를 보면 최승희에 대한 북한 정권의 전반적인 입장을 알 수 있는데,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사실 왜곡과 미화가 뒤범벅이 된 회고록이지만 최승희에 대한 아래의 평가는 그런대로 수긍할 만한 부분이 적지 않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외세의 외풍의 탐류 속에서 시들어가는 민족성을 고취하고 민족적인 것을 발전시키려는 강렬한 보대감이 여러 분야에서 분수처럼 솟구쳐 오를 때였다. 바로 이 시대에 최승희는 조선의 민족무용을 현대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민간 무용, 승무, 무당춤, 궁중무용, 기생춤 등의 무용들을 깊이 파고들어 거기에서 민족적 정서가 강하고 우아한 춤가락 등을 하나하나 찾아 내며 현대 조선 민족무용 발전의 기초를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의 민족 무용은 무대화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극장 무대에 성악 작품, 기악 작품, 학술 작품이 오르는 예는 있어도 무용 작품이 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최승희가 춤가락을 완성하고 그에 기초하여 현대인들의 감정에 맞는 무용 작품들을 창작해 내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무용도 다른 자매 예술과 함께 무대에 당당하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최승희의 무용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문명을 자랑하는 프랑스, 독일 등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끝으로, 북한 정권에서 또 한 사람의 최고 수준급의 무용가인 인민배우로 활동한 최승희의 딸 안성희(1932~?)에 대해 조금 언급하겠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에게서 무용을 배운 최승희의 딸 안성희 역시 부전여전의 춤꾼이자 안무가였다. 그가 1953년 소련 모스크바의 볼쇼이 발레학교로 발레 유학을 가서 1956년 모스크바 국제 무용 콩쿠르에서 '집시춤'으로 1등상을 수상한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도 남는다. 안성희는 4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온 후 열린 귀국 공연에서 발군의 실력을 선보였고, 이 공연을 직접 관람한 김일성이 그녀에게 꽃다발을 안겨 주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뒤 안성희도 인민배우가 되었지만 상황이 바뀌어 아버지가 숙청되고 어머니 마저 연일 노동당의 비판 공세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입지가 위태위태했다.
그런 처지에서 안성희는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지만, 결국 어머니 최승희가 숙청된 후 안성희의 행적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고, 딸도 자기 모친처럼 정확히 언제 사망하였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설엔 1987년 이전에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비극적 최후를 마친 최승희 모녀의 인생 역정을 통해 우리는 공산주의 처제 하에선 예술 및 예술인은 늘 이념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고 버려진다는 사실을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2024. 8. 8. 16:47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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