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두란이라는 인물을 아는가?
퉁두란(1331~1402)은 여말선초에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 건국에 일등공신(좌명개국공신)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퉁두란은 발해가 멸망한 뒤 고려 초기부터 고려인들과 뒤섞여 여진인들의 거주지가 된 동북의 함경도 지방 일대에 걸쳐 거주한 동여진 출신이었는데, 여진족 시절의 성은 퉁(佟)이었고, 이름이 쿠룬투란티무르(古倫豆蘭帖木兒)였지만 보통 '퉁두란'으로 불렸다. 그 뒤 그는 조선에 귀화한 후 '두란'으로 개명했고 이름은 그대로 두고 태조와 의형제가 된 뒤 성씨를 받아 이씨 성을 붙여서 '李豆蘭', '李之蘭'으로도 불렸다. 그의 인물됨과 삶의 역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이두란은 인연을 소중히 했을 뿐만 아니라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는 신사도를 갖춘 인물이었다. 1371년 휘하의 100호를 거느리고 고려 조정에 귀순하여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간 이두란은 이성계를 처음 만났을 때 사냥한 사슴을 가지고 다투다가 서로에게 활을 쏘는 대결을 벌이게 됐다. 그런데 이성계가 이두란의 화살을 모두 피하는 신기를 보이자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이성계의 의형제이자 심복이 될 것을 자처하였다.
둘째, 이두란은 나라 경영에 갖춰야 할 전문성의 일부에서 뛰어난 인물이었다. 당시 전통시대에 전문성이란 문인적 소양과 유학 지식 그리고 무인으로선 무술과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군사적 수완이었다. 이두란은 후자에세 출중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고려 우왕 6년(1380)에 의형 이성계를 따라 왜구 토벌에 나서 지리산 근교의 운봉(雲峯)에서 왜적장인 아지발도(阿只拔都)군을 제거해 전승을 올렸다. 활 솜씨는 이성계 못지않았다. 그가 이 황산대첩에서 고려군을 괴롭힌 왜구 대장 아기발도의 숨통을 끊은 사실이 증명한다.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투구 끈을 맞춰서 아지발도의 투구를 벗기자 곧바로 화살을 쏴서 아지발도의 얼굴에 명중시켰다.
실제로 이성계의 의형제답게 무력이 강대한 용장으로 이성계가 이두란을 가리켜 "이두란의 말 달리고 사냥하는 재주야 그만한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만 싸움에 임해 적군을 무찌르는 데는 이두란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평가했다. 또 1383년 7월, 중국 만주 지역 요심(遼瀋)의 초적 40여 기가 단주(端州)로 쳐들어와서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 있었을 때도 당시 북청의 천호였던 이두란은 단주의 만호(萬戶) 육려(陸麗), 청주의 만호 황희석 등과 함께 그들에 맞서 싸워서 서주위(西州衛), 해양 등지에서 여섯 우두머리의 목을 베면서 승리한 바 있다.
셋째, 우국충정과 주군에 대한 의리를 생명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실제로 그것을 실천했다. 1383년 8월, 호바투(胡拔都)가 단주로 거듭 침략해 들어왔는데, 부만호(副萬戶) 김토부카(金同不花)가 내응하는 바람에 고려군이 패했을 때 당시 이두란은 모친이 사망하여 고향 북청에서 상을 치르고 있었는데, 이성계가 부르자 상복을 벗고 종군하였다. 또한 황산대첩에서는 이성계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왜군을 미처 보지 못하자 이두란이 2번이나 위험하다고 소리치면서 활을 쏘아 왜군을 거꾸려뜨렸다. 1385년 함흥 토아동(兎兒洞)에 쳐들어온 왜구를 이성계와 함께 나아가 격퇴하여 공로를 인정받아 선력좌명공신(宣力佐命功臣)의 칭호를 받고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된 것에서도 그의 우국충정과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 인정받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두란은 이성계와 함께 전장을 누비다가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공을 인정받아서 상의동지밀직사사(商議同知密直司事) 회의도감사(會議都監事)가 되었고, 창왕 때에는 지밀직사사를 맡았다. 이성계를 따라 전쟁터에 종군하면서 전공을 세워 공양왕 시절 '지문하부사 판도평의사사'의 벼슬도 받았지만 단 한 번도 이성계를 떠난 적이 없었다.
넷째, 이두란은 사려 깊고 지혜로운 인물이었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품이 드러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우왕이 서쪽으로 사냥을 나왔을 때 이성계가 나서서 활을 쏘아 한 발에 과녁을 맞추자 우왕이 기뻐하였다. 그러나 이를 본 이두란은 이성계에게 "재주의 아름다움을 어찌하여 남에게 많이 보이십니까?"라며 넌지시 꼬집었다.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속으로 반성하면서 이두란의 지혜를 높이 평가했다. 이인임을 비롯해 중앙 정계의 경계를 받았던 이성계였던 만큼 굳이 재주를 과시해 꼬투리를 잡힐 일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뜻이었다.
다섯째, 이두란이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의 일등공신이 된 후에도 자만하지 않고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후 이성계의 의형제이자 심복이었던 만큼 개국공신들 중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하사받았을 정도로 최고의 공을 세운 전쟁영웅이기도 했다. 그는 1등 개국 공신에 책록되고 청해군(青海君)에 봉해졌지만 그에 안주하지 않았고, 그 후에는 경상절도사가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이어서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고향인 북청을 돌보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그의 건의를 받아 들여 적극적으로 조선인과 여진족의 결혼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여섯째,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 일편단심이어서 국정이나 통치에 누가 되지 않았다. 이두란은 이방원과도 친했는데 태종이 이두란의 이름을 팔아먹는 바람에 이성계가 말년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이를 집안의 형들과 이두란에게 알렸는데 당시 이성계는 딱히 정몽주를 죽일 생각은 없었고 이두란 역시 "어르신(이성계)께서 반대하시는 일을 할 수는 없다"면서 이방원이 끈질기게 설득했어도 끝내 일에 참여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성계가 자신의 심복이라고 부를만 했다. 그후 그는 이성계가 양위하고 함흥으로 갈 때에도 함께 함경도로 갔다.
일곱째, 조선조 후대 왕들도 그의 우국충정과 일편단심을 인정한 진실된 충신이었다. 이두란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 이성계를 많이 도와준 공을 인정 받아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음은 물론, 조선 후기까지도 왕들이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이긍익의 역저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말년에 이두란은 살생을 많이 한 것을 참회하는 의미로 불교에 귀의하고 승려가 되어 은둔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역성혁명을 성공시킨 후 꼭 10년이 지난 1402년에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 그는 자신의 시신을 여진족의 풍습에 따라 화장해서 고향인 북청에 묻어달라고 유언함에 따라 사망 후 북청부에 묻혔다.
고금 동서를 막론하고 이런 정도의 충신은 많지 않았다. 조선조 500여년의 역사에서 스물일곱 명의 왕들 중에 세종대왕(물론 관점에 따라선 비판받을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을 제외하면 모두 고만고만하고 용속한 인물들이었지만, 그 많았던 신하들도 류성룡, 박지원, 정약용 등등 소수를 제외하면 그렇고 그런 인물들이었다. 요즘 같은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는 정말 이두란 같은 인물이 절실할 때다.
2023. 11. 30. 11:49
포항행 서울행 KTX열차 안에서
雲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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