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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봉용 교수님, 그립습니다!

雲靜, 仰天 2022. 2. 1. 16:22

홍봉용 교수님, 그립습니다!


홍봉용 교수님이 그립다. 가끔씩 모교 근방을 지나가거나 혹은 일본어 관련 일이 있을 때면 자주 인자하신 선생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대학교 3학년 때인 1985년 가을학기 일본어학과의 일본어작문 과목을 수강했을 때 한 학기 동안 일본어 작문을 지도해주신 교수님이셨다.

홍봉용 선생님은 성성한 백발에다 주름진 이마와 작지 않으신 중키 이상에 누가 봐도 지적인 노신사 분위기를 풍기신 분이셨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겠지만 혹시 현재 살아계시면 100세가 훨씬 넘는다. 올해로 107세가 되셨을 것이다.

선생님은 일본학과의 전공 학생들보다 타학과에서 수강하러 온 나를 굉장히 이뻐해 주셨다. 나는 군대 갔다와서 다니던 지방 국립대학은 포기하고 다시 시험을 쳐서 서울로 대학을 옮긴 관계로 나이가 조금 많았다. 그래서 같은 학년의 동급 여학생들한테는 "아저씨"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선생님께서 예비역 학생인 나를 조금 믿음직스럽게 보셔서 그러셨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끔씩 수업 후 차를 마시자면서 나를 불러 인생살이에 교훈이 될 만한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시곤 하셨다.

그때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들 중엔 지금도 생각나는 게 많다. 당시 홍 교수님은 연세가 일흔이라고 하셨다. 고향은 이북이라고 하셨고. 영문학을 전공하셨는데, 16~17세기 영어와 셰익스피어를 연구했다고 하셨다. 일제 때 태어나셔서 일본교육을 받으신 데다 일본서적을 너무 많이 읽으셨기 때문에 일본어는 일본인 이상으로 잘 구사하신다고 하셨고, 그 연세에도 에스페란토와 중국어까지 공부하셔서 조금씩 안다고 하셨다.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계시다가 대학교수 수입으로는 독일에 유학을 보낸 아드님의 유학비를 충분히 보낼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당시 독일로 유학을 보내셨다는 아드님도 아마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지금은 대략 일흔 전후쯤이 되셨을 것이다.

그런 사정이 있어서 선생님께선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여행정보를 소개하는 신문 편집 사업을 하셨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서울의 주요 호텔에 들어간 그 신문은 앞면에는 영어로 Today's Seoul로 돼 있었고, 그 뒷면에는 今週のソウル, 즉 '금주의 서울'이라는 제하에 영자와 일본어로 된 여러 가지 소식들과 정보들이 같이 소개돼 있는 외국어 신문이었다. 선생님은 영어와 일본어로 된 신문 기사 원고를 직접 쓰셨다. 그러면서 남는 시간을 활용해 사무실과 지척에 있던 동국대학교 일문학과에 시간강사로 나오셨던 것이다. 어느 날 한번은 선생님 사무실로 따라 가봤는데 사무실은 동국대 중문 아래쪽에 있는 제과점 태극당 안쪽 골목에 있었다. 그 제과점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내가 정말 일본어다운 일본어를 배우게 된 것은 전적으로 홍봉용 교수님 덕분이다. 나는 일본어를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통일교 신자로서 한국인 남성에게 시집 온 두 분의 일본인 여성에게서 배웠다. 이 두 여선생님들에 대해선 언젠가 수필 주제로 삼아 쓰고 싶다. 아무튼 그때 같이 배웠던 사람들은 총 네 명이었다. 일본어과를 다니던 내 고등학교 친구, 일본어학과를 나온 후 일본어 통역 자격시험을 준비하던 회사원 여성, 일본어과 4학년 여학생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든 한 가지 일을 하면 굉장히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공부를 해도, 여행을 가도 집중을 한다. 심지어 술을 마셔도 집중해서 마신다. 당시 일본어는 일주일에 월, 수, 금 3일을 공부했는데, 토요일 놀러 포항 내려갔다가 월요일 일본어 수업만 빠지면 화요일까지 더 놀 수 있었지만 오직 일본어 수업을 위해서 서울로 다시 올라오곤 했다. 그래서 한 번도 수업을 빼먹지 않았다.

자랑 같아서 면구스럽지만 당시 나는 일본어 철자(히라가나와 가타가나)도 모른 상태에서 무작정 그들 속에 섞여서 일어공부를 시작했다. 나 빼고 나머지 세 명은 다 일본어 기초가 돼 있고 독해는 물론 회화도 곧잘 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에 비해 나는 일어에 대한 언어적 개념이 전혀 없었으니 처음부터 많이 헤맸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따라가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단어나 구문을 새로 배우면 실제로 그것을 문장으로 만들어서 여러번 되풀이해서 말을 했다. 또 화장실에 앉아 있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오가든 그 어디서든 눈에 띄는 글귀가 보이면 그걸 머릿속에서 일본어로 작문도 해보고 말하기 연습도 했다.

그러다보니 6개월 정도 지나고 나서부터는 회화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는 칭찬을 듣기 시작했다. 일본어를 1년도 하지 않고서 그 정도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는 소리도 들었다. 일본어 학습 열풍이 불기 전이었다. 그래서 서점에 일본어 참고서도 딱 두 종류 밖에 나와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뒤 나는 4학년이 되어 일본어과에 개설된 일본문학 강독 과목을 들었을 때도 다른 전공 학생들을 제치고 A+를 받았는데, 이 역시 모두 홍봉용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이다. 일본문학 강독 과목을 가르치신 분은 일본 동경대에서 비교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김태준 선생님이셨다. 이 분도 나를 엄청 이뻐해 주셨는데, 이에 관해서도 나중에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또 내가 졸업과 동시에 서울에 있는 일본대사관 부설 일본문화원에 개설된 일본어 강좌에 중도에 시험을 치고 합격해서 들어간 것도 그때 선생님 밑에서 공부한 게 밑바탕이 됐다. 지금도 있는지 몰라도 당시 이 일본어 강좌는 초급부터 고급까지 총 2년 6개월이 걸리던 코스였다. 강사는 모두 일본인으로서 일본 문부성에서 최고의 실력자들을 엄선해서 보낸 내로다 하는 일본어 교사들이었다. 이 코스를 다 마치면 일본에 대학을 가거나 일본계 회사에 취직할 때 그 기관에서 발급해 주는 수료증만 내밀면 어학실력은 인정 돼 바로 패스되던 것이었다. 수업료도 한 학기에 당시 돈으로 단지 2만5000원 밖에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코스를 이수하려는 희망자들이 많이 모여들다 보니 입학시험도 경쟁률이 높았다. 그중엔 일본에서 태어나 살다 온 이도 있었고, 이미 일본어 실력이 상당한 실력자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코스인 최고급 회화반을 시험 쳐서 들어가서 6개월로 2년 반 과정을 전부 다 마친, 월반의 행운을 안았다. 그때가 대학을 조기 졸업한 직후인 1986년 12월 말이었다.

홍봉용 선생님께서는 우리 수강생들에게 매주 일간지 신문의 칼럼 한 편씩을 일본어로 번역해서 제출하게 하시고 내용을 일일이 세세하게 고쳐주시면서 설명까지 곁들여 주셨다. 예컨대 어떤 것은 한국식 일본어 표현이라고 지적해 주시면서, 일본어다운 일본어는 표현을 어떻게 한다든가 라는 식으로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셨다.

나의 일본어 작문 실력은 정말 이때 많이 늘었다. 말 그대로 일취월장했다. 나는 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밤이 늦은 시각이라도 실례임을 알고도 전화를 해서 반드시 물어보곤 했다. 선생님 덕에 일본어의 언어적 개념과 유사 단어들 간의 뉘앙스 차이도 많이 익혔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일본의 역사와 문화도 많이 공부하게 된 기회가 됐다.

아무튼 나는 인생에서, 나의 학문 여정에서 홍봉용 선생님에게서, 또 일본문화원에서 일본어다운 일본어를 배웠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본어를 정통으로 배운 셈이다. 이것이 훗날 대만 유학생활 중에 내가 일본어 학원에서 일본인 이름(関口鑑三)으로 대만인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칠 수 있었던 자격이 됐다. 그런데 왜 멀쩡한 한국 이름 놔두고 일본인 행세를 했느냐고요? 그것에 관해 말을 하자면 참 눈물 나는 이야기다. 그에 얽힌 사연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참 세월이 많이 흘렀다. 올해로 어느덧 37년이 지난 아득한 옛날 일이다. 대학시절, 당시 내가 과제로 작성한 일본어작문을 홍봉용 선생님께서 매주 손수 고쳐주신 게 남아 있어 여기에 올린다.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일본어 작문들이 예전엔 많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 다시 찾아보니 거의 다 없어지고 겨우 한 건만 남아 있다. 수필 형식의 작문이다. 내용을 보니 20대 중반의 여물지 않은 치기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생각과 마음은 변함없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짧은 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홍봉용 선생님을 그리면서 졸문을 정리해봤다.

선생님, 어디에 계시든 편안히 잘 계시겠죠? 아드님도 무사히 유학을 마치고 잘 지내시겠죠? 이렇게 늦게 인사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편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生きている声


その寒い冬に、襟巻きさえもなしに......頭にはアルミニュームのたらいをのせて、そばを売りながら通っていたあるおばあさんのしわかれた声を聞いた瞬間,僕は涙が出るほどあわれに思った。

正月の短い日が傾きかげんに、西の方へ移りつつある夕方、松風の音、 風鈴の音しか聞こえない閑寂な山寺で老僧、そして若い男女二人だけの結婚式を見て、僕は憐憫の情よりもむしろ美しいと思った。また僕は韓国に嫁いで来たある外国女性が土曜日の午後, することもなく、寂しそうに道を一人で歩いている姿を見て可愛いそうな気がした。


時々生きることが面倒になってしまう僕だが、時に他人の事に思いを巡らしたり、行動に関心を寄せている自分自身を見ると、まだ人生の意味をすっかり失ってはいないのだろう。

僕は瞬間的にふと悲しみを感じる時がある。そうした時にはいつも人生の凡てが虛無の上に立てられた欲望ではないだろうかと思ったりする。もしかしたら、死の世界にだけ真実が有り、だから何も現実の世界に僕の観念の全てのことを実現しなくてもよいではないか、又そうする理由もないのではないか。死の世界においてはあらゆるものが無色天なのかもしれないのだ。死、それを考えると度ごとにそれは新しい重みを持って胸に迫ってくる。それではどうしてこんなに生きているのかと尋ねられれば、僕はまだ今のところは、生に対して責任を感じているからだと答えるしかない。

人間が持っている不完全なことの一つに、自分の生に対して責任を取っていない点があるということができる。自分の生とは、自己の考えと行動以外にそれがもたらす所のあらゆる反響を含むことではないだろうか。我々が本当に知っているのは、そして本当に持っているのは何だろうか。もう一度「生」ということに対して考えて見たい。

살아 있는 소리

그 추운 겨울에 목도리도 하지 않고...... 머리에는 알루미늄 함지박을 이고 메밀을 팔면서 다니는 어떤 아주머니의 쉰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불쌍하게 생각했다.

정월의 짧은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서쪽으로 지고 있는 저녁 무렵, 솔바람 소리, 풍경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한적한 산사에서 노승과 젊은 남녀 두 사람만의 결혼식을 보고 나는 연민의 정보다도 오히려 아름답다고 생각되었다. 또 나는 한국에 시집 온 어떤 외국여성이 토요일 오후 할 일도 없이 외로운 듯 혼자서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가련한 기분이 들었다.

때로 살아 있는 것이 귀찮게 느끼는 나지만 가끔씩 타인의 일에 대해 생각하거나 행동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내 자신을 보면 아직 인생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리진 않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순간적으로 문득 슬픔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때엔 늘 인생의 모든 것이 허무 위에 세워진 욕망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쩌면 죽음의 세계에만 진실이 있고, 그래서 아무 것도 현실세계에 나의 관념상 모든 것을 실현하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또 그렇게 할 이유도 없는 게 아닐까? 죽음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無色天인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죽음,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것은 새로운 무게를 가지고 가슴으로 다가온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살아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직 지금 상태로선 생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안전한 것 중의 하나로, 자신의 생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 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생이란 자기의 생각과 행동 이외에 그것이 가져오는 모든 반향을 포함하는 게 아닐까? 우리들이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은, 그리고 정말로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1985. 10 어느 날

묵정동 하숙집에서
草堂
(당시 나의 佛名이 초당이었다. 인환 큰 스님께서 지어주신 것이다.)

당시 홍봉용 교수님은 이렇게 정성스럽게 붉은 글씨로 매 과제물 마다 한 자, 한 자 정성을 쏟아서 수정을 해주시고 설명도 해주셨다. 그 영향을 받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도 훗날 대학 강단에 섰을 때 학생들의 과제물을 일일이 꼼꼼히 체크해주고 설명해줬다.
일본대사관 일본 문화원에서 발급한 수료증. 회화3반 수료는 일본어 과정 중 기초편, 중급, 고급, 회화반 1반과 2반을 거쳐 최종 단계인 일본어 화화 3반을 수료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