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삶/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雲庭 김종필의 묘비명

雲靜, 仰天 2021. 7. 16. 20:45

雲庭 김종필의 묘비명


「思無邪」를 人生의 道理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無恒産而無恒心」을 治國의 根本으로 삼아 國利民福과 國泰民安을 具現하기 위하여 獻身盡力하였거늘 晩年에 이르러「年九十而知八十九非」라고 嘆하며 數多한 물음에는「笑而不答」하던 者-內助의 德을 베풀어준 永世伴侶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김종필(1926~2018) 전 국무총리의 묘비명이다. 사무사는 생각이 바르므로 사악함이 없다는 뜻이다. 思는 ‘생각’을 말하고, 無邪는 ‘사악함이 없음’을 뜻한다 했다. 공자가 시경에 나와 있는 300편을 모두 읽은 후《시경》을 한마디로 간추려 ‘사무사’라 한 것에서 유래한다. 요컨대 사악함이 없는 생각을 의미하는 것으로, 마음이 올바르며 조금도 삿된 생각이 없음을 뜻한다.

'무항산이무항심'은 맹자가 한 말로 사는 것이 궁핍하면, 즉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항상심(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이를 국가경제건설에 적용한 셈이다.

김종필은 생전에 이미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온 것으로 보인다.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는 데도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고 한 말에서 느낄 수 있다. 그때가 부인 박영옥 여사가 유명을 달리한 2015년이었다고 한다. 당시 雲庭(김종필의 아호)이 써둔 묘비명은 총 121자였다. “한 점도 삿됨 없는 생각(思無邪)을 평생 인생의 도리로 삼았으며, 無恒産而無恒心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아 利民福과 國泰民安을 具現하기 위하여 獻身盡力하였다”고 적었다.

그런데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 보니 제대로 이룬 것 없음에 절로 한숨 짓는다”라며 “숱한 질문에 그저 웃음으로 대답하던 사람, 한평생 반려자인 고마운 아내와 이곳에 누웠노라”고 마무리했다. 그가 마음 편히 누울 곳은 아내 곁이라는 소리였다.

92세까지 살았다면 대단한 장수는 아니어도 장수한 것은 맞다. 92개 성상 동안 운정은 권력도 누렸고, 명예도 누렸다. 부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 두 가지만으로도 그의 생은 남 부럽지 않은 인생이었다. 운정은 그림에도 타고난 재주를 가지고 젊은 시절 한때 그림을 그렸는데 그가 남긴 작품들 중에는 굵은 주먹을 움켜쥔 것도 있다. 아마도 국가운영에 힘이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겠지만 힘과 권력을 추종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삿된 곳에 권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90에 이르고 보니 89세까지도 잘못 살았다고 고백한 것이다.

“한 점 허물없는 생각을 평생 삶의 지표로 삼았으며, 나라 다스림 그 마음의 뿌리를 ‘무항산이며 무항심’에 박고 몸 바쳤거늘, 나이 90에 이르러 되돌아 보니 제대로 이룬 것 없음에 절로 한숨 짓는데, 숱한 질문에 그저 웃음으로 대답하던 사람, 한 평생 반려자인 고마운 아내와 이곳에 누웠노라.”

영광스러운 국립묘지를 마다하고 영세 반려 아내 곁에 묻히고 싶다는 문구에서 정치 거목이기 전에 한 순정한 남편으로서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나의 조부와도 인연이 있었던 雲庭은 생전의 언행을 되돌아 보면 풍운아, 로맨티스트의 성품이 엿보인다. 자신이 처해있는 시대적 상황의 한계 때문에 그랬을 수 있어도 결과적으론 국가운영에 상당 부분 誤引이 있었다고 판단하지만 동시대의 여타 정치지도자처럼 재물에는 탐닉하지 않은 삶이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이젠 이 정도의 그릇이 있는 정치인도 만나기 힘들 것이다. 한국정치 발전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한 번 두 분의 명복을 빈다.

2021. 7. 16. 20:45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김종필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에 가담해서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초기엔 그의 총애도 받았지만 나중엔 자기에게 도전하지 않을까 하는 박정희의 의심도 받았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이른바 "3김시대"를 열기도 했다. 앞으로 3김과 그 시대에 대한 공과가 정확하게 밝혀지고 평가되길 바란다.
박정희의 소개로 결혼한 처 박영옥 여사와의 한 때. 이로써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사위가 됐다.
부인이 먼저 가자 김종필은 크게 슬퍼했다. 영욕을 다 맛본 풍운아였지만 아내의 타계 만큼 슬퍼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