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기행② : 장사상륙작전을 아는가?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원수가 총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이 결행되기 이틀 전, 그러니까 9월 13일 동해안에서 있었던 상륙작전을 아는가? 미군과의 의견조율 하에 급조된 소규모의 한국군 병력과 학도병들이 주가 된 "장사상륙작전"이다. 사람들은 인천상륙작전은 알아도 이 작전의 일환으로 동해안에도 상륙작전이 있었는지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영덕에 간 김에 장사해안과 그 해변에 마련돼 있는 상륙작전 기념지 및 Landing Ship Tank, 즉 LST-125 함선인 문산호(모형)를 답사했다. 1943년에 건조된 문산호는 7월 27일 PC-701함과 여수 철수작전에 투입돼 작전을 수행한 함정인데 아주 오래 전에 퇴역했다. 지금 장사 해변에 기념관용으로 전시돼 있는 문산호는 실물이 아니고 모형이다.
장사상륙작전의 배경은 1950년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방어선에서 결행한 아군의 총반격작전이다. 맥아더 원수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된 데는 유엔군과 한국군이 인천으로 들어가 서울 탈환작전을 전개함과 동시에 낙동강전선에서도 아군이 북한인민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해서 상륙부대와 반격부대가 망치와 모루의 역할로 낙동강 대안에서 서울 지역에 이르는 적을 포위해서 소탕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당시 상륙전 경험이 풍부했던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1759년 프랑스군과 영국군 간에 치러진 퀘벡전투(일명 '아브라함 평야 전투')에서 힌트를 얻었다.
장사상륙작전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상륙지에 대한 북한군 지휘부의 판단을 흐리게 함과 동시에 적의 관심과 병력을 동해안에 묶어두려는 양동작전(feint operation)으로서 적을 교란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포항지역의 북한인민군의 공세를 차단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독립 제1유격대대를 장사해안으로 상륙시켜 내륙의 동쪽과 동해안 지역으로 진격해온 북한인민군 제2군단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작전 의도를 북한군 제2군단의 후방 교란, 한국군 제3사단의 진격을 위한 것으로 가장했다.
장사상륙작전에 투입된 한국군 참전 전력은 2366톤 급의 LST ‘문산호’와 4개 중대로 편성된 한국 육군 독립 제1유격대대(일명 “명부대”, 또는 “772부대”, 대대장 이명흠)이며, 병력은 유격대원 772명과 LST 승조원 44명, 지원요원 56명이었다. 이 유격대원들은 대부분 16~19세의 청소년 학생들이 주축이 된 학도병들이었고, LST승조원들은 해군에 동원된 대한해운공사 소속의 일반 선원들이었다.
이 학도병들은 1950년 8월 전투가 치열했던 대구, 밀양 지역에서 자원입대한 학생들로서 8월 말에서 9월 초에 걸쳐 밀양과 부산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중 9월 10일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74호에 근거한 명령에 따라 9월 13일 부산항에서 문산호에 승선을 완료했다.
9월 13일 이날 15시 경에 미 해군 구축함 엔디코트(Endicott)호의 호위를 받으며 부산항을 출발한 문산호는 그 이튿날 9월 14일 장사해안에 도착했다고 돼 있다. 이곳 전시내용 중에는 문산호의 출발과 도착 날짜 및 시간이 상이한 것이 적지 않는데, 출발은 9월 13일 16:00과 9월 14일이었다는 두 기록이 있고 도착시간도 이곳 전시내용, 여타 6.25전쟁 연구서나 기관에 따라 제각각이다. 즉 9월 14일 02:30분경이었다는 주장(문산호 선실 안 전시실의 전시내용, 다른 곳에는 9월 15일 새벽이라고도 기록돼 있음)이 있는가 하면, 장사 해변의 ‘장사상륙작전’ 비석에는 9월 14일 같은 날 04:30분경으로 새겨져 있고, 이곳에서 배포하고 있는 팜플랫에는 같은 날 05시 경으로 소개돼 있다. 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편찬한『6.25전쟁사』연구서(제6권, 573쪽, 578쪽)에는 9월 15일 05시경이었다고 기술돼 있다.
문산호는 장사해안의 상륙예정 지점을 약 4km 정도 남겨 둔 장사 앞바다의 해역에 도착했다. 이어서 문산호는 미 해군의 지시를 받고 짙은 해무로 시계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장사해안에 접안하기 위해 선수와 선미의 닻을 내리는 投錨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해안에서 태풍 케지아(Kezia)의 여파로 파고 3~4m의 큰 풍랑 때문에 해변의 모래사장에 닿지 못했다. 선상의 유격대원들은 이런 상태에서 해안으로 상륙을 개시했다.
한편, 여명이 밝아오면서 어둠이 걷히기 시작함과 동시에 전방 부흥동의 200고지에서 이 상황을 보게 된 북한인민군이 아군의 상륙을 저지하려고 3개 방향에서 문산호에 대해 집중적으로 포사격과 함께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문산호는 적의 화력권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백사장에 댈 수도 없는 진퇴양난 상황에 처했다. 포탄과 총탄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상황에서도 아군은 로프를 이용해서 결사적으로 상륙을 시도했다. 그 결과 수 명의 전사자가 나타났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부 병력이 상륙에 성공했다.
한편, 문산호는 풍랑이 점차 심해지고 북한군의 포화가 집중되어 05:30분경에 선미에 투묘한 닻이 절단됨으로써 선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06시에는 완전히 해안에 가로놓인 상태로 좌초되고 말았다. 문산호의 선수 앞문을 열었지만 문 옆 5~6명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높은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빨려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군은 상륙을 중단하지 않고 적의 총격 속에서도 대략 09시 경에는 상륙을 완료하였다.
함선이 좌초되어 가고 적의 포격과 사격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상륙시도는 아군의 사상자가 더 늘어나게 된 원인이었다. 유격대원 772명과 LST문산호 승조원 44명(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제6권 577쪽에는 42명, 해군헌병 5명, 미군 고문 1명) 도합 816명 중 황재중 문산호 선장 등 선원 11명과 유격대원 128명이 전사했다.
생존자 가운데 학도병들이 가까스로 장사 해변에 상륙해서 상륙을 저지하려는 적군의 포화가 빗발치는 가운데 교전에 들어갔다. 맨 먼저 상륙한 제28연대 병력들은 문산호를 향해 사격을 가하던 적의 토치카를 공격해 3개의 토치카를 파괴하고 점령했다. 그리고 이튿날 9월 15일엔 약 300m 전방 남쪽의 200고지까지 점령했다.
당시 장사 지역에는 북한인민군 제5사단, 제2군단 후방 치안부대인 제101보안연대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9월 16일부터는 후퇴했던 북한인민군이 포항지역의 2개 연대와 전차 4대로 반격을 해왔다.
이 반격에 아군은 상당히 고전을 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아군의 제1유격대대에게 주어진 작전기간은 3일이었다. 3일 안에 임무를 완수하고 부산항으로 철수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육군본부에서 아무런 차후 작전의 지시가 없었고, 연락조차 없었다. 현지 학도병들은 굶어서 허기진 상태에서 총탄도 떨어졌다. 이 상황에서도 학도병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했다.
총 6일 간의 전투로 학도병들은 전사 139명, 부상자 92명이라는 손실을 입었지만, 거둔 전과도 적지 않았다. 즉 적을 270명이나 사살했을 뿐만 아니라 신흥동에 주둔한 북한인민군 보안연대를 공격해 그 이전에 적에게 붙잡혀서 처형되기 직전의 애국청년 10여 명을 구출한 전과도 올렸다.
그런데 문산호가 상륙작전에 성공했는지, 또 병사들이 상륙을 해서 어떤 성과를 올렸는지에 대해선 서로 다른 설이 있다. 한 마디로 작전이 성공했다는 설명과 실패했다는 평가 두 가지가 존재한다. 과연 어느 주장이 사실에 부합하는 진실일까?
국방부에서 간행한 상기 연구서에는 장사상륙작전이 규모는 작았지만 북한 군단의 동해안 전선이 예기치 않게 큰 타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랬을까? 북한인민군이 큰 타격을 받았다면 타격 받은 예를 실증적으로 제시해야 주장이나 평가의 정당성을 득하게 되지만 증거가 제시돼 있지 않다.
같은 책의 앞 쪽에서 한국군이 “북한인민군의 주보급로인 포항, 영천 방면으로 가는 국도를 완전 차단하여 북한인민군의 후방 활동을 마비시켰다”고 기술돼 있는데 이 책에서 말하는 전과라는 어쩌면 이를 두고 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재고해봐야 할 주장이다. 왜냐하면 북한인민군 제5사단의 주력이 이미 영덕을 오래 전에 지났고 다시 흥해와 달전을 지나 포항 입구인 나루끝 가까이까지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장사상륙작전이 “북한인민군의 후방 활동을 마비시켰다”고 한 것은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 않는다. 포항은 거리가 장사에서 약 3~40km나 떨어져 있는데, 이 상황에서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될 수 있을 지는 다시금 엄밀하게 고증해봐야 한다.
또 같은 책에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연구자는 “당시 평양방송에서 한국군 2개 연대가 동해안에 상륙했다는 보도가 있었다”고 하면서 이를 근거로 장사상륙작전이 “북한인민군의 주위를 분산시키는데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 제1군단의 총반격 작전과 인천상륙작전을 유리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견제적인 조공의 역할도 하였다”고 평가했다. (『6.25전쟁사』, 제6권, 582쪽).
과연 평양방송에서 한국군 2개 연대가 동해안에 상륙했다는 보도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이 작전이 ‘한국군 제1군단의 총반격 작전과 인천상륙작전을 유리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견제적인 조공의 역할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6.25전쟁 전문연구자의 한 사람인 내가 보기에 좀 더 분명한 사실규명이 있고난 뒤에 평가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 혹은 평가 역시 연구자가 인과관계를 치밀하게 따져본 후에 내린 것이 아니라 비논리적으로 추론한 극히 주관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장사상륙작전의 전과가 전무하다는 뜻이 아니다. 예컨대 앞서 1차 언급을 한 바 있지만 북한인민군 제2군단 사령부가 포항, 경주 방면으로 진출시키려던 북한인민군 2개 연대와 전차 4대를 영덕 방면으로 재배치함으로써 북한인민군의 작전준비를 교란시키는 데는 부분적으로 성공했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9월 18일, 철수명령을 받은 학도병들은 좌초돼 구조가 불가능하게 된 문산함 대신 구조함으로 급파돼온 같은 LST665함인 조치원함에 승선해 06:00부터 철수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1개 조 39명은 승선하지 못하고 현지에 남겨진 상태에서 적에게 포로가 됐다.
200고지 및 인근 지역 등등 확인이 필요한 다른 현장에 대한 답사 및 위치 확인 실측, 전쟁 당시 라주바예프 소련군사 고문이 남긴 당시 북한인민군의 작전일지와의 대조 등등의 작업은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미완성인 채로 긴 글을 마무리한다.
영덕군에서 상당히 많은 준비를 하고 수고를 했지만, 장사해변의 기념물과 문산함 내 전시 내용들 중에는 서로 맞지 않는 사실들이 여러 번 중복돼 있기도 하고, 약간의 사실 오류도 눈에 띈다. 사실 오류는 중공군의 한국전쟁 참전 날짜를 1950년 10월 25일로 소개해놓은 것인데, 최초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은 것은 10월 19일이었고, 10월 25일은 중공군이 한국군 제1사단과 처음으로 싸운 첫 전투가 벌어진 날이다.
역사 사실 오류의 바루기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다. 장사상륙작전에서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고 기리는 것으로만 끝낼 게 아니다.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이 말한 대로 포로가 된 아군의 신원은 끝까지 추적해서 밝혀야 할 뿐만 아니라 유골도 찾아와야 한다. 잊어선 안 될 우리의 과제다.
2021. 6. 23. 23:45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2021. 7. 4
사진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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