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인물 및 리더십

영욕의 두 삶, 이범진과 박병두 添言

雲靜, 仰天 2021. 1. 26. 18:41

영욕의 두 삶, 이범진과 박병두 添言


서상문(한국역사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이범진(李範晉, 1852~1911)과 박병두(朴炳斗, 일본명 靑山三藏, 1895~19??), 지난 주 학술교류의 일환으로 논문 발표차 러시아국방부 군사학술연구소를 방문한 우리 일행이 러시아에서 만난 善과 惡, 美와 醜가 교차한 두 한국인 역사인물이다. 이범진은 초대 러시아 주재 대한제국 공사였고, 박병두는 일본군 소장계급으로 관동군 보급부대장을 지낸 군인이다. 두 사람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삶을 살았다.

1911년 1월 26일(제정 러시아 그레고리력 1월 13일) 12시 제정 러시아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내 뻬스쩰가 5번지의 한 저택에서 3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범진이 자신의 거실에서 천장 전등에 밧줄을 매단 채 목을 맨 뒤 권총으로 자결한 것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일본 무관들이 암살했다는 설도 있음)

구한말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시킨 아관파천을 주도한 이범진은 미국 특명 전권공사를 거쳐 1901년 주 러시아 상주 공사로 부임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당할 때까지 외교 전권대표로 일했다.

이범진과 이위종(李瑋鍾) 부자. 이범진 공사는 대한민국 최초의 직업 외교관이었음과 동시에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했던 이위종의 부친이기도 했다. 이위종은 이범진 공사와 풍양 조씨 부인과의 사이에 난 2남 1녀 중 차남이었다. 자살하기 약 반년 전인 1910년 8월 4일 촬영된 것이다.

그 후 일제의 압력을 받은 조선 조정이 소환을 명령했지만 이범진은 불응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남아 공사 업무를 계속했다. 그러나 1910년 8월 대한제국의 매국 내각의 주도로 “일한합방안”이 발표되자 그는 삶의 희망을 잃고 일본의 국권 찬탈에 울분을 토하면서 지내다가 그 이듬해 1월 자결의 길을 선택했다. 59세라는 초로의 나이에 조국의 국권상실과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는 유서를 고종 황제 앞으로 남기고 이국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전문 외교관으로서 국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이범진의 울분과 무력감 그리고 그로 인한 절망감은 그가 고종에게 보낸 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탄된 후 고종 앞으로 보낸 이범진 선생의 유서에서―

전형적인 동양고전 교육을 받은 선비형 지사 이범진 공사가 자결을 택한 것은 일본의 국권 찬탈에 대한 항거의 표시였음은 물론이다. 자신의 재산까지 국권회복과 항일운동을 지원하는 데 썼던 그는 조국을 위해 자신과 가족을 희생한 행동하는 애국자였다.

1895년 박병두는 평안북도 안주 출생으로 순천 공립보통학교 교사생활을 하다 24세가 되던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중국으로 건너가 사천성 성도의 중국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국민당군의 사천군 예하 제9사단 독립연대의 중위로 임관했다. 그 뒤 그는 전공을 세워 1924년 소좌로 진급하고 사천성 독판공서의 부관으로 임명됐고, 1925년 6월 다시 중좌로 진급하여 사천군 제16혼성여단의 보병 제3대대장(營長)에 보임됐다.

박병두는 처음부터 친일파는 아니었다. 그도 한 때는 독립운동에 가담한 바 있다. 1925년 8월 그가 국민당군의 郭松齡부대에 소속돼 만주 군벌 張作霖 타도운동이 실패한 뒤 남만주 일대의 항일운동을 해오던 正義府에 적을 두고 항일운동에도 가담했다. 또 그는 1927년 3월 하얼빈에서 지석호와 최선주 등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한국혁명단을 조직하고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이다가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 소속 외무성경찰에 체포돼 1927년 9월 경성의 복심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 받고 수감된 적도 있다.

그러나 박병두는 얼마 안 있어 변절했다. 1932년 3월 일제가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세우자 그가 만주군에 자원입대해 보병 중좌로 임관한 사실로 보아서 그 전후가 변절의 전환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변절한 것은 아마도 5년 형을 사는 중에 일제 외무성 경찰에게 매수 혹은 회유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934년 5월, 그가 일본 관동군의 천진 특무기관 촉탁에 임명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촉탁이란 당시 일제 외무성이 고용한 스파이, 즉 밀정의 다른 이름이다.

박병두가 친일로 돌아선 이유는 아마도 당시 중국이 쩔쩔 매던 강한 일본에 붙는 것이 출세와 일신상의 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병두는 일제 관동군의 특무기관 촉탁에 임명된 뒤 국민당군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거나 포섭공작을 벌여 친일적 중국인들을 다수 만주국에 가담하도록 한 공을 세웠다.

1937년 7월의 중일전쟁 전후엔 박병두는 이번에는 북경 근방의 通州 소재 일제의 특무기관 촉탁에 임명돼 중국 국민당군에 대한 정탐 및 선문활동에도 참여했다. 또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의 밀명을 받고 일본군 동향파악과 후방 파괴공작을 목적으로 천진으로 들어가 일본군의 동향파악과 후방 파괴공작을 해오던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경근을 일제에 가담케 하는 회유공작도 펼쳤다.

그 후 박병두는 북만주 방면으로 파견돼 소련군의 통신 및 산업시설 마비, 교란공작에도 참여했고, 그 공을 인정 받은 대가로 해방직전까지 일본 관동군 보급부대장을 지내다가 광복 후 평양에서 소련군에게 붙잡혔다. 1946년 1월이었다. 그는 동년 6월 전범으로 소련 군사재판에 회부돼 “조선국민의 이익을 배반”한 죄목 등으로 25년 형을 선고 받고 10여 년 간 소련 하바로프스크의 포로수용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950년 2월부로 박병두는 소련군 제16포로수용소에 이감돼 지내다가 6년 뒤인 1956년 일본정부가 그를 일본으로 보내 달라고 소련정부에 보낸 탄원서에 따라 일본으로 송환됐다. 그 뒤부터는 그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이범진과 박병두! 두 사람은 각기 자신이 살아온 삶의 과보로서 상반된 역사의 평가를 받으며, 명암이 엇갈리는 상태에 있다. 같은 러시아의 하늘 아래에 있지만, 이범진은 양지(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 ‘북방묘지’에 안장)에서 역사의 빛(그의 순국 100주년을 맞아 한국정부의 대통령 국무총리 방문 헌화)을 받고 있다. 반면, 박병두는 1년 내내 햇빛을 받지 못하는 러시아 군사역사문서보관서 서고의 한쪽 음지에 갇혀 있었다.

우리 일행이 찾아간 상트 페테르부르크 외곽 북방묘지의 이범진 묘소와 사진에서 보이는 그의 인상은 평온하고 초연했다. 이범진은 살아서 형극의 길을 걸었지만 죽어 역사의 영생을 얻었다.

반면, 러시아 측 문서고에 보관돼 있는 박병두의 사진은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몰골이었다. 박병두는 친일로 살아 부귀와 명예를 얻었을지는 몰라도 그 후의 삶은 불안과 초조 속에 살았을 지도 모른다. 민족사라는 준엄한 역사평가 앞에서 형극의 길에 놓여 있는 박병두는 설령 역사의 광장으로 걸어 나오게 된다고 하더라도 역사가 단죄한 친일파라는 주홍글씨를 안고 영원히 형벌을 되풀이 하는 시지프스처럼 살아야 한다. 그로선 차라리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게 좋을 지도 모른다.

이범진도 타의든 자의든 생을 마감할 상황에 즈음해 형언 불가의 인간적 고뇌와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박병두도 한 때 항일운동가에서 친일분자로 변절할 때 적지 않은 번뇌를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결정은 서로 달랐다. 한 사람은 식민지 백성의 치욕스런 삶을 포기함으로써 역사의 영생을 얻은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일본으로 소환돼 가면서까지 자결하지 못하고 구차한 삶을 연명함으로써 민족사에 친일반역자라는 해가 뜨지 않는 영원한 음지에 갇혔다.

잿빛 하늘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방문 기간 동안 강력하게 대비되는 두 사람의 삶과 죽음이 나의 뇌리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국가가 무엇인지, 역사가 무엇인지, 또 공부하는 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역사적 삶이란 무엇인지 새삼 반추됐다.

두 사람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평소 곧은 신념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야 함은 물론, 결정의 연속인 삶에서 매 순간 국가와 민족과 역사 앞에 떳떳한 선택을 해야 하고, 늘 자신을 경책하고 방만한 삶을 살아선 안 된다는 점일 것이다.

공자가『春秋』를 남기고 사마천이『史記』를 남긴 것은 크게는 군왕이 앞선 시대를 본보기로 삼게 하고, 작게는 개인에게 자신을 경책하고 올곧게 살라는 훈계의 의미가 있다. 19세기 중반 조선의 선비 臨淵堂 李亮淵은 이런 말을 남겼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오늘 내가 가는 발자국은 뒤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臨淵堂別集』, 『大東詩選』)

박병두의 변절 동기와 민족사에 대한 외면은 개인의 영달에 목매지 말고 공명심을 버려야 함을 일깨워 준다. 그것은 초야에 묻힌 逸士라도 자족할 줄 아는 초연한 자세를 갖게 하는 반면교사다. 동시에 이범진 공사의 애국혼과 비굴하지 않은 삶은 신친일파가 저렇게도 날 뛰고 있는 오늘 이 나라의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스스로 나를 내리치게 하는 죽비다.

2011. 11. 27
모스크바에서 초고
2021. 1. 26. 16:31
북한산 清勝齋에서 이범진 공사의 순국 제110주년을 맞아 부분 가필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