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6.25전쟁 참전 4

중국의 6․25전쟁 참전 전과정 개요

중국의 6․25전쟁 참전 전과정 개요 1950년 10월 19일부터 시작된 중국의 6․25전쟁 참전은 당시 중국공산당 주석이자 중국국가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이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전쟁발발 전에 이미 남침전쟁 도발을 동의한 바 있다. 전쟁도발 약 40일 전인 5월 15일,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의 지시로 극비리에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남침전쟁을 동의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회담에서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이미 김일성에게 남침전쟁을 동의해준 사실을 확인한 뒤 남침전쟁 도발은 시기상조라고 한 기존의 유보적 입장을 바꿔 자신도 동의했던 것이다. 그는 스탈린이 동의한 이상 준비 중이던 타이완 ‘해방’을 뒤로 미루고 한반도 적화통일이 먼저라고 하면서, 그것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서상문(중앙대학교 강사) 1950년 10월 19일부터 시작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전쟁발발 전 남침전쟁 도발을 동의한 바 있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유엔군과 한국군의 북진으로 패망일보 직전의 상황에서 김일성과 스탈린의 파병요청을 받고 취한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전쟁도발 약 40일 전인 5월 15일, 스탈린의 지시로 극비리에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남침전쟁을 동의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회담에서 마오쩌둥은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이 이미 김일성에게 남침전쟁을 동의해준 사실을 확인한 뒤 남침전쟁도발은 시기상조라고 한 기존의 유보적 입장을 바꿔 비로소 자신도 동의했다. 그는 스탈린이 동의한 이상 준비중에 있던 타이완(臺灣)‘해방’을..

6⋅25전쟁 초기 중국의 군사적 대응−군대이동과 배치를 중심으로−

6⋅25전쟁 초기 중국의 군사적 대응 −군대이동과 배치를 중심으로− 서 상 문(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 머리말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중국정부는 이와 무관한 듯이 침묵을 지켰다. 중국정부가 6⋅25전쟁에 대한 자국의 공식적인 입장을 처음으로 표명하게 된 것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정무원 총리이자 외교부장인 周恩來(1898~1976)의 논평이었다. 그는 한반도 파병과 미 제7함대의 대만해협 진주를 명령한 미국의 트루먼(Harry S. Truman, 1884~1972) 대통령과 그 정부를 겨냥해 6⋅25전쟁은 미국이 “이승만 괴뢰정부”를 교사해 일으킨 전쟁이자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음모라고 단정했다. 周恩來의 논평은 같은 날 소집된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으로 약함) 중앙위..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 상의 절해의 고도 웨이크 섬. 오전 7시 36분부터 시작된 회담에서 중국이나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묻는 트루먼 대통령의 질문에 맥아더 원수는 주저 없이 첫 마디에 “아주 적다”(Very little)고 잘라 말했다. 또 만일 중공군이 평양으로 밀고 내려올 경우 “전례 없는 대학살이 그들을 기다릴 것”이라고 역설했다. 중국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자신 있게 부정하고, 미국을 움직이는 정치, 군사, 외교의 실력자들이 모두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을 때 한반도에서는 10월 11일 밤부터 도강을 개시한 중공군 선발대가 맥아더의 호언장담을 비웃듯 압록강 건너 북한의 집결지에서 위장을 끝내고 있었다. 선발대에 이어 19일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