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문학 3

茶山의 유배시 '獨坐'에 답하다

茶山의 유배시 '獨坐'에 답하다 獨坐 旅館蕭寥獨坐時 竹陰不動日遲遲 鄕愁欲起須仍壓 詩句將圓可遂推 乍去復來鶯有信 方言忽噤燕何思 只饒一事堪追悔 枉學東坡不學棋 裊娜煙絲寂歷中 春眠起後野濛濛 山雲遠出强如月 林葉自搖非有風 眼向綠陰芳草注 心將槁木死灰同 縱然放我還家去 只作如斯一老翁 홀로 앉아서 쓸쓸한 빈 여관에 홀로 앉아 있는데 대나무 그늘은 꼼짝 않고 해는 더디네 향수가 도지려는 걸 억지로 눌러놓고 지어놓은 싯구들을 다듬는다. 잠시 갔다 다시 오니 꾀꼬리는 소식이 있는데 제비는 무슨 생각인지 입을 다물어버리는구나 두고 두고 후회가 되는 한 가지는 소동파를 배우느라 바둑을 못 배운 거라네. 늘어진 버들가지는 적막 속에 있는데 봄잠에서 깨고보니 들빛이 어둑 어둑하고 먼 산에 구름이 걷혀서 달이 뜬 듯 환하구나 나뭇잎이 절..

茶山의 유배시 獨笑

茶山의 유배시 獨笑 茶山 정약용(1762~1836)은 조선조 500년을 통털어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자 지성인이었다. 재주가 출중했던 만큼 鴻志도 작지 않았고, 가슴에 품은 한 또한 많았다. 다산이 만약 조선의 여느 사대부처럼 벼슬길이 평탄했다면 절대 최상급의 수많은 역저들을 내면서 최고 지성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선비를 선비답게 만들었고, 문인으로서 시적 재능이 한껏 만개될 수 있었으며, 지식이 지성으로 승화된 까닭은 환난고초의 기나긴 유배 때문이었다. 유배가 없었다면 그는 결코 조선 지성사에서 선연히 빛나는 큰 별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서양과는 다른, 사마천이 그랬던 것처럼 동양 고금의 지성사에서 보이는 찬술의 반전, 역설의 전형이다. 1801년부터 시작된 다산의 유배는 18년 쯤 지속돼 181..

남해 유배문학관에서 만난 자암과 서포

남해 유배문학관에서 만난 자암과 서포 남해도를 일주하는 마지막 코스로 남해읍 내에 위치해 있는 유배문학관을 찾았다. 일몰이 가까워지는 시각에 가까스로 도착하는 바람에 문을 닫기 직전 20분 정도의 짧은 시간뿐이었다. 그래서 여유를 갖고 전시물들을 온전히 볼 순 없었다. 수박겉핥기 식의 주마간산 격이었지만 유배문학관 내 전시장을 한 번 돌아 봤다. 유배문학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들이 잘 정리돼 있었다. 전시물 중엔 항양(桁楊, 죄인의 발목이나 목에 채우는 차꼬 등의 형구들을 일컫는 용어임)과 천극(荐棘, 귀양살이 하는 사람이 거주하는 거처의 담이나 울타리를 가시나무로 둘러치는 일로서 加棘이라고도 함) 등등 유배와 관련된 거주지의 모형과 도구들도 다양하게 전시돼 있었다. 유배문학관의 열쇠말은 '유배문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