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용어 남용의 시대
서상문(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지난번 청와대에서 공개한 개헌안엔 4·19의거가 “4·19혁명”으로 돼 있다. 현 헌법전문을 이어받은 것이다. 박근혜는 대통령 후보시절 ‘5·16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심지어 작년 촛불시위까지도 ‘촛불혁명’이라고 칭하는 이들이 많다. 작년 7월 G20정상회의시 캐나다 총리와 가진 정상회담에서 “촛불혁명”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한 문재인 대통령도 그 중 한 분이다.
혁명의 개념정의가 개인의 찬반, 호오 차원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로서 실로 ‘혁명’용어 범람의 시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용어가 일반화 된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성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바르게 적용된 용어인지는 숙고해봐야 한다.
역사용어 오남용은 언어상의 사회적 약속을 저버리는 행위이기에 지속되면 혼란이 빈발해 질서가 서지 않게 된다. 사과를 배라고 부른다거나, 악행을 선행이라고 우길 경우 일상생활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보라.
특히 역사인물을 포함해 과거사를 지칭하는 역사용어엔 해당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찬반, 선악, 正否, 호오 등의 가치평가가 내포돼 있는데, 반민주적 쿠데타를 혁명으로 부른다든지 혹은 독재자를 민주주의자라고 기록하면 평소 언어소통, 교육, 재판, 국가기록 등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5·16쿠데타’에 대한 평가가 정권이 바뀜에 따라 오락가락하고 그로 인한 정쟁으로 여태까지도 불필요한 국민적 에너지를 허비하지 않았는가?
‘혁명’을 무개념적으로 오남용하는 이유는 일반인은 물론, 학계에서도 이 용어의 개념정의가 엄밀하지 않고 애매한 데서 연유한다. 쿠데타, 복고반동, 유신, 폭동과 달리 상대적으로 긍정적 가치평가가 내포된 혁명을 어떻게 정의해야 객관성이 확보될까? ‘혁명’의 한글어원이 된 한자의 革命과 영어의 Revolution이 함의하는 바를 보면 공통분모를 추출해낼 수 있다. 먼저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다.
중국에서 革命이라는 말은 주역에서 처음 나오는데, 천자가 ‘天命’(mandate of Heaven)을 부여받아 국가를 개창했어도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하늘의 뜻으로 보고 그 왕조(命)를 革(제거)하는 것을 의미했다.
Revolution은 원래 중세 서양에서 별이 궤도를 한 바퀴 돌고난 뒤 처음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회귀”와 “순환”을 가리킨 천문학용어였다. Revolution의 정의가 대체로 근대적 진보개념으로 수렴돼 합의가 도출된 것은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부터였다. 즉 혁명이란 대략 정치권력의 급격하고 폭력적인 변화이고, 통치절차와 주권, 정통성의 공적 기반 및 사회질서 개념에서 근본적 변화를 가져다줘 새 시대를 알리는 사건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됐다. 그 뒤 러시아혁명을 거치면서 혁명은 폭력을 수단으로 삼은 새 계급의 국가권력 획득, 기존정체의 전복, 사회생활변화 수반의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의미가 됐다.
위 정의들에서 공통점을 추려내면, 혁명이란 피지배 사회구성원 다수의 지지를 받는 계층이 귀족제, 과두제, 군주제, 민주공화제,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기존 국체와 정체를 다른 국체와 정체로 바꾸고자 하는 분명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국가권력을 전복하고자 사용한 수단이 폭력적이든, 평화적이든 비합법적이어야 하며, 국가권력의 찬탈이 비교적 짧은 시간안에 이뤄져야 한다는 4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단순히 통치자의 제거나 독재정권의 혁파만 있고 체제변화를 지향한 동기와 목적성이 내재돼 있지 않는 사건에 대해선 혁명이라고 불러선 안 된다.
이 점에서 4·19, 5·16, 5·18, 촛불시위는 모두 혁명으로 볼 수 없다. 4·19, 5·16, 촛불시위로 권력주체는 바뀌었지만 공화제, 자유민주주의라는 체제까지 바뀐 건 아니기 때문이다. 5·18도 독재정권에 저항했지만 권력주체가 바뀌지 않은 민주항쟁이다. 단 독재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선 평가가 달라질 순 있다. 학계나 시민사회의 심층적 연구와 논의를 거쳐 객관성이 확보된 혁명용어의 정의를 도출해 소모적인 정쟁을 종식시켜야 한다.
위 글은 2018년 3월 26일자『서울신문』의 칼럼 '열린 세상'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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