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사도세자 : 영화 '사도' 감상평
論語 爲政篇에 "學而不思則妄, 思而不學則殆(학문을 하고도 깊이 사색하지 못하면 혼매하여 사리에 밝지 못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매사가 위태롭다)"는 어구가 있습니다. 배우면서 사색하고, 사색하면서 배우기를 반복할 것을 강조한 공자의 말씀입니다. 배우기만 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죽은 학문이 되며, 반대로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이론 및 확실성과 구체성이 결여돼 생각은 쓸데없는 망상 혹은 공상이 되고 만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많이 배워 알고 있지만 사색하거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 행하면 오히려 배우지 않는 것 보다 더 못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음을 알게 해주는 예를 지난 연휴 때 본 영화 '사도'에서 접했습니다. '사도'는 조선조 제21대 왕 영조가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만든 과정을 밀도 있게 그린 영화입니다. 각기 영조와 사도세자 역을 맡은 송강호와 유아인의 연기 그리고 여타 영화적 요소와 미학적 언어에 대해선 언급을 생략하겠습니다.
영조는 조선중기의 전성기를 구가한 왕답게 조정의 그 어떤 신하들보다도 박학다식하고 博覽强記형의 임금이었지만, 그가 지녔던 지식은 교육학적, 교육심리학적 측면에선 생각이 짧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 마디로 조기교육, 개성을 무시한 과잉교육에다 교육주체자의 성격적 결함마저 더해져 피교육자에 대한 교육적 효과는커녕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어 종국엔 파멸시킬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준 영화였습니다.
영조는 권력의 비정함과 잔혹함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왕인 숙종대왕과 궁궐내 침방의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 사이에 태어난 서장자(차남)라는 사실로 인해 내면적으론 작지 않은 컴플렉스를 안고 살았습니다. 숙빈 최씨는 숙종의 성은을 입고 아들 영조를 낳음으로써 빈으로 승급했지만 원래는 정상적으로 뽑힌 궁녀가 아니라 근본을 알 수 없는 미천한 무수리였습니다.
그런데다 숙빈 최씨가 경종의 후사가 왕이 되는 걸 극구 막으려고 한 노론의 후원을 받고 있어 영조는 숙종의 자식이 아니라 노론의 어떤 세도가가 아버지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을 정도로 영조는 출생에 관한 컴플렉스가 컸습니다. 게다가 그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성격장애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복 형인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급서(영조가 몰래 탄 독을 먹고 죽었다는 설도 있음)하는 통에 노론계통 권신들의 도움을 받아 왕세제 신분에서 왕위를 계승하긴 했지만 52년 간 재위한 동안 늘 권신들의 견제를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영조가 권신들과 척신들에 둘러싸인 자신은 물론, 42세에 낳은 세자와 왕가를 지키려는 절박함에서 유아 때부터 유달리 명민함을 보였던 사도세자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제왕학의 조기교육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영조가 처한 이런저런 상황을 보면 그러한 조급함과 고충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영조가 깊이 생각하지 못한 본질적인 패착이 있었습니다. 즉 아무리 동일한 염색체의 DNA를 주고받은 부모자식 간일지라도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이며, 각기 다른 개체라는 사실 그리고 조기교육과 압축적 교육의 비효율성을 조금이라도 알고 사도세자의 개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식으로 세자에게 교육을 합리적으로 베풀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조선조 교육철학상의 한계를 뛰어 넘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제왕학 수업이 좀 더 분별력 있게 이뤄졌더라면, 또 하늘에 태양이 둘이 있을 수 없듯이 아무리 제왕수업의 한 과정이라 할지라도 대리청정을 시키면서 권력운용 면에서 세자의 정치적 권한을 인정해주지 않거나 때로 세자가 결정한 것까지를 뒤집어 그를 허수아비로 만드는 식의 무시나 모욕 행위가 없었더라면 조선조 500년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부왕이 자식인 세자를 직접 죽이는 비극적인 사태로까지는 악화되지 않았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반대로 사도세자도 여러 차례 부왕의 기대에 어긋난 행동으로 인해 영조로부터 받은 모멸감과 무시가 인내하기 어려웠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세자로 책봉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참고 견뎠더라면 종국엔 왕권을 손에 넣고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습니다.
덧붙여 동서고금의 적지 않은 역사적 사례가 증명하듯이 최고권력의 제2인자는 제1인자가 확실히 되기 전까지는 은인자중하면서 살얼음판을 걷는 거와 같은 진중함과 솔로몬의 지혜로움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실증적으로 보여준 역사의 한 사례입니다.
2015. 9. 30 오후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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