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자작시

명동촌에 서니

雲靜, 仰天 2026. 7. 22. 12:05

명동촌에 서니



마당의 흙은 그의 시요
폐우물의 거미줄은
끊긴 말의 굳은 자국이다.

구리 거울 닦던 손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분단의 강 앞에 서게 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빌던 숨이
어째서 반쪽의 나라로
돌아와야 했단 말인가?

한쪽 하늘은 비어 있고
우리는 그 빈자리마다
늦은 참회만 덧댄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맑디맑은 청년의 이름 앞에서
고뇌 속 국경 하나가 무너진다.

고결한 조선의 학도는
내 가슴 속에 영원히 살고,
나는 머리 숙여
참회록의 첫 줄을 읽는다.

2026. 7. 18. 05:57.
白山市 Full Man 호텔 2103호실에서
雲静 초고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난다.
연희전문과 일본 릿꾜우(立敎)대학, 도우시샤(同志社) 대학에 다니기 위해 아들이 떠나고 난 뒤로 평생 외로웠던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尹永錫). 그는 윤동주의 외숙부가 되는 김약연의 누이동생인 김용과 결혼하고 명동학교에서 교사로 교편을 잡기도 한 '인텔리겐차'였다.
윤동주뿐만 아니라 북간도의 전체 한인사회에도 크게 훈도와 영향을 미친 윤동주의 외숙부 김약연. 그는 1910년 명동학교를 설립해서 기독교(장로교)를 전파하고 교민들의 교육에도 힘써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눈빛이 범상치가 않다.
고종사촌 형(같은 나이지만 생일이 조금 빨랐음) 송몽규(뒷줄 중간)과 함께한 윤동주(뒷줄 오른쪽). 앞줄은 훗날 목사가 되는 문익환. 같은 나이의 두 형제는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일제 말기인 1945년 2~3월 후꾸오까(福岡) 감옥에서 차례로 옥사한다. 향년 27세. 일제가 세균전을 위해 행한 생체실험용으로 타살됐다는 설이 유력하게 존재한다. 실제로 윤동주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생리식염수 투여 실험 등)를 정기적으로 맞았다고 한다. 당시 유족들이 시신을 거두러 갔을 때 송몽규가 "의문점 모를 주사를 매일 맞고 있다"는 증언을 남겼다. 1943년 7월, 쿄우또(京都)에서 유학 중이던 두 사람은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혐의(소위 '치안유지법' 위반)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뒤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후꾸오까 형무소로 함께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윤동주는 광복을 불과 몇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 송몽규 역시 같은 감옥에서 사경을 헤매다 윤동주가 사망한 지 약 3주 뒤인 동년 3월 7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내용 전달은 문제가 없어도 밀랍 인형이 조악하다. 특히 윤동주의 모습은 실제와 전혀 딴판이다.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윤동주의 생가 입구에서. 입구에서부터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의 저명한 시인'이라고 해놨다.
윤동주의 대표작 서시 시비. 이곳 중국 측에서 한글시를 먼저 소개하지 않고 번역한 중국어 시를 앞에 올려 놓고 보는 이들(특히 중국인 관광객들)로 하여금 마치 중국어작품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 더군다나 한국어 특유의 조사와 미묘한 어감, 여운이 살아있는 운문이 중국어 번역 과정에서 직역 위주의 산문체로 바뀐 데다 단어 선택의 어색함까지 더해져서 서시의 원문이 주는 깊은 울림과 아름다움이 많이 훼손돼 있다. 정말 유감천만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곧 언론매체에 실릴 기사나 별도의 블로그 글을 참조하기 바람)
중국식 기와집이 아니라 맞배지붕의 5칸으로 지어진 한국의 전통적인 기와집이 인상적이다.
한국의 전통 건축술인 결구법이 사용된 걸 보니 당시에 지은 집이 분명해 보인다. 결구법이란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거나 최소화하고, 나무와 나무의 맞물림만으로 부재를 이어붙이고 결합하는 기술이다. 중국에서 들어온 이 건축술은 고려 때부터 내려온 것이다. 나무는 계절과 습도에 따라 미세하게 숨을 쉬듯 늘어나거나 줄어든다. 그래서 못으로 강하게 고정하면 나무가 갈라지지만, 결구 방식은 자연스러운 신축을 흡수해 준다. 또한 지진이나 강풍이 불 때 부재끼리 유연하게 움직이며 진동 에너지를 흡수(유격 효과)하기 때문에 수백 년이 지나도 구조가 유지되는 이점이 있다. 게다가 특정 부재가 썩거나 손상되었을 때 전체를 부수지 않고 해당 부재만 쏙 빼내어 교체할 수 있어 호환성과 편이성도 뛰어나다. 그런데 이 결구법은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주 숙달된 목수, 즉 대목장(大木匠)이 아니면 구사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이 척박한 산골에까지 대목장 정도의 기술자가 동원됐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다.
이 생가의 마당에는 윤동주의 시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한글시도 있고 그걸 중국어로 번역한 중국어시도 적지 않다. 중국이 윤동주를 한국인이라고 하지 않고 중국인이라고 소개했으니까 그에 맞도록 중국어시로 많이 번역해 놓은 것 같다. 그리고 1930년대의 시들은 습작 티가 나는 작품도 보이고, 30년대 후반을 넘어가면서부터 숙성돼 가는 느낌이었다.
폐기된 우물을 복원해 놓았다.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었지만, 내 눈에는 소싯적 동주가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올리는 해맑은 모습이 어른거린다.
같이 간 친구 이명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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