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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상사의 큰 족적 함석헌과 김교신, 절차탁마의 두 지기

雲靜, 仰天 2025. 4. 19. 13:11

어제는 겨우 불혹을 넘기고 일찍 타계한 사상가 김교신이 탄생한 날이다. 일제시대를 살다가 안타깝게도 해방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945년 4월이었다. 살아 생전, 지기인 함석헌과의 관계 그리고 두 선각자의 사상적 교호와 절차탁마적 상호 영향을 짚어본다.ㅡ필자

한국 근대사상사의 큰 족적 함석헌과 김교신, 절차탁마의 두 지기


                                           서상문(역사 비평가)

한 사람의 사상은 혼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독창적인 사상가라고 하더라도 그의 생각 깊숙한 곳에는 젊은 날 만난 스승과 벗,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며 때로는 생각을 부딪쳤던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국 근현대 사상사에서 함석헌(咸錫憲, 1901~1989)과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의 관계가 바로 그러했다.

두 사람을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설명하는 연구자도 있다. 실제로 함석헌이 일본에서 김교신을 만나 우찌무라 칸조우(內村鑑三, 1861~1930)의 성서연구 모임으로 인도된 점을 생각하면 김교신이 함석헌에게 일종의 신앙적 선도자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두 사람은 정식 사제관계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같은 1901년생이었다.

김교신은 1922년 토우꾜우(東京)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고, 함석헌은 1924년 같은 학교 문과 제1부에 입학했다. 김교신이 학교생활과 신앙 면에서는 선배였지만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같은 시대를 살면서 서로 자극을 주고받은 동년배의 선후배이자 평생의 사상적 지기(知己)라고 보는 것이 두 사람의 관계를 더욱 정확하게 설명한다. 함석헌이 1924년 김교신을 통해 우찌무라의 성서연구 모임에 참여하게 된 사실도 확인된다.

일본 유학 시절의 김교신

두 사람을 진정으로 결합시킨 것은 토우꾜우고등사범학교라는 학교보다 성서와 조선이라는 두 가지 문제였다. 김교신은 일본 유학 중 우찌무라 칸조우의 성서연구에 참여하면서 무교회주의 신앙을 받아들였다. 우찌무라는 신앙의 본질을 교회라는 제도나 성직자 조직에 두지 않았다. 신앙인은 교회나 사제를 반드시 매개로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직접 서서 자신의 양심과 성서에 따라 신앙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독일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 사상과 상당 부분 통한다. 실제로 우찌무라는 루터에게 직접적인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그는 루터가 중세 교회가 독점하고 있던 신앙의 권위를 깨뜨리고 개인을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게 만든 점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신 앞에 홀로 선 양심과 ‘만인사제주의’의 정신을 중요하게 받아들였다.

무교회주의의 주창자 우찌무라 칸조우. 그는 평화를 앞세워 당시 절대 군주였던 천황제를 부정했다. 나는 20대 후반 일찍부터 그와 간접적인 인연이 있다.

다만 우찌무라는 루터를 그대로 계승하지는 않았다. 그는 루터가 만인사제주의를 주장하면서도 결국 성직제도와 성례전을 유지했고, 종교개혁 과정에서 세속권력에 의존했다는 점 등을 한계로 보았다. 그래서 성직자도, 교단도, 교회 건물도 신앙의 절대적 조건일 수 없다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 점에서 우찌무라의 무교회주의는 루터 종교개혁 정신의 단순한 모방이라기보다는 루터의 ‘신 앞에 선 개인’을 더욱 철저하게 밀고 나간 비판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다.

김교신은 이 우찌무라의 사상을 그대로 조선에 옮겨 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기독교’와 함께 언제나 ‘조선’이었다. 여기에서 이른바 ‘조선산 기독교’의 문제의식이 나온다. 그 핵심은 간단하다. 서양 선교사가 가져온 교파와 제도와 신학을 조선인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이 성서를 직접 읽고 자신의 역사와 생활, 언어와 정신 속에서 기독교를 주체적으로 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양산 기독교의 조선 지점(支店)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의 정신 속에서 다시 태어난 기독교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교신에게 ‘성서’와 ‘조선’은 서로 대립하는 말이 아니었다. 성서로 조선을 깨우고,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성서조선』 창간정신을 집약한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라는 말이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동인들은 성서가 민족의 정신적 골격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함석헌이 김교신에게서 받은 가장 중요한 자극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신앙이란 한 개인이 죽은 뒤 천국에 갈 것인가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역사 속에서 한 인간과 한 민족이 어떻게 정신적 주체로 설 것인가를 묻는 것이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이 점에서는 독일의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의 사상이 연상된다. 피히테는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821)에게 프로이센이 패하고 베를린이 프랑스군의 점령하에 있던 1807~1808년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을 강연했다. 그는 패배한 독일을 다시 일으킬 힘을 군사력에서만 찾지 않았다. 국민교육을 통해 국민의 정신과 도덕을 새롭게 만들고, 자기 민족이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할 능력을 회복시키는 데서 민족의 재생을 찾았다.

김교신이 피히테에게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 단정할 만한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외세의 지배 아래 놓인 민족에게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정신적 자립이며, 그것을 교육과 내적 각성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문제의식에는 흥미로운 유사성이 있다.피히테에게 국민교육이 독일의 정신적 재생을 위한 도구였다면 김교신에게 성서교육은 식민지 조선인의 정신을 다시 세우는 길이었다.

1925년경 우찌무라의 성서강의를 듣던 조선인 유학생들은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김교신·함석헌·송두용·정상훈·양인성·유석동 여섯 사람은 1927년 7월 『聖書朝鮮』을 창간했다. 유달영(柳達永, 1911~2004)은 이 창간 동인 6인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는 훗날 김교신의 제자가 되어 『성서조선』 운동에 깊이 참여했고, 1942년 『성서조선』 사건 때에는 김교신·함석헌 등과 함께 검거되는 중요한 동지가 되었다.

잡지『聖書朝鮮』창간 동인 6명. 뒷줄 왼쪽부터 양인성·함석헌, 앞줄 왼쪽부터 류석동·정상훈·김교신·송두용. (1927년 2월 촬영)

‘성서와 조선’!, 잡지의 이름 자체가 이들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보편적 진리인 성서를 식민지 조선이라는 구체적인 역사 현실과 만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공간에서 김교신과 함석헌의 사상은 서로 만나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김교신은 생활과 교육으로 나아갔고, 함석헌은 역사로 나아갔다.

김교신이 『성서조선』을 창간하면서 “사랑하는 조선에 가장 귀한 성서를 주고자 한다”는 뜻을 밝혔다면, 함석헌은 그 문제의식을 역사해석의 영역으로 밀고 나갔다. 초기의 그는 단호하게 “성서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고 말했다. 김교신에게 성서가 조선인의 정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생명의 말씀이었다면, 함석헌에게 성서는 조선민족이 겪어온 고난의 의미를 읽어내는 역사해석의 눈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관계를 단순한 영향과 계승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김교신이 ‘성서와 조선’이라는 문제를 던지고 함석헌이 그것을 ‘성서와 조선역사’라는 역사철학으로 확대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김교신에게 신앙은 관념이 아니었다. 학생을 가르치는 것, 산을 오르는 것, 자연을 관찰하는 것, 노동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 거짓말하지 않는 것, 조선사람으로서 자기 정신을 잃지 않는 것 모두가 신앙이었다. 유교적 선비정신과 우찌무라의 무교회주의가 그에게서는 생활윤리로 결합돼 있었다. 김교신의 기독교에는 우찌무라의 무교회주의뿐만 아니라 한국적·유교적 요소가 함께 녹아 있었다는 연구도 이를 지적한다.

함석헌은 여기에서 한 걸음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김교신과 함께 고민했던 ‘성서와 조선’의 문제를 조선 역사 전체의 의미를 묻는 역사철학으로 확대했다. 그 결과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였다. 이 글은 1930년대 『성서조선』에 장기간 연재되었고, 해방 뒤 단행본으로 출판된 후 다시 크게 수정되어 『뜻으로 본 한국역사』가 되었다.

함석헌 역사철학의 핵심은 한마디로 말하면 ‘고난 속에도 뜻이 있다’는 섭리적 역사관이다. 그는 조선의 역사를 단순한 왕조교체와 전쟁, 흥망성쇠의 연속으로 보지 않았다. 왜 우리 민족은 이렇게 오랫동안 침략과 분열과 억압을 겪어야 했는가를 물었다. 그리고 그 고난을 단순한 패배로 보지 않고 민족을 정화하고 새로운 역사의 주체로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해석하려 했다. 즉 역사는 사건들의 집합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인간과 민족이 자기 존재의 ‘뜻’을 발견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도 함석헌의 이 역사관을 한민족의 역사를 ‘고난 받는 민중의 역사’로 파악하면서 그 고난 가운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섭리의 역사로 이해한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여기서 두 사람 사이의 사상적 계승과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김교신은 ‘성서를 조선에’라고 했다. 함석헌은 그 질문을 받아 ‘그렇다면 성서의 눈으로 조선의 역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고 물었다.

김교신에게 조선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야 할 민족이었다. 함석헌에게 조선은 고난을 통해 역사적 의미를 실현해가는 주체였다. 김교신은 조선인이 외래 종교와 외래 문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신적 식민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함석헌은 그것을 역사해석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식민지배와 민족적 고난 속에서도 조선인이 역사의 객체가 아니라 ‘뜻’을 실현하는 주체임을 발견하고자 했다. 따라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김교신 사상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오히려 김교신이 제기한 ‘성서와 조선’이라는 문제를 함석헌이 역사철학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밀고 나간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동시에 김교신에게도 함석헌 같은 동지의 존재가 중요했다. 『성서조선』이라는 공동의 사상공간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성서를 읽고 조선의 현실을 논하면서 김교신 역시 일본 무교회주의를 단순히 수입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더욱 분명히 해나갈 수 있었다.

결국 두 사람에게 우찌무라는 출발점이었지만 종착점은 아니었다. 우찌무라가 일본에서 기독교를 일본인의 정신으로 소화하려 했다면, 김교신과 함석헌은 그것을 다시 조선의 역사와 정신 속에서 소화하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사상적 흐름을 이렇게 정리해볼 수도 있다. 루터의 ‘신 앞에 선 개인’→ 우찌무라의 ‘무교회 신앙’→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 함석헌의 ‘고난의 역사철학’과 훗날의 ‘씨알사상’. 물론 이것을 단선적인 사상 계보라고 볼 수는 없다. 함석헌에게는 유영모를 비롯한 여러 다른 사상가들과 동양철학, 퀘이커(Quaker) 사상 등의 영향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의 중요한 사상적 줄기가 형성되어 있는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두 사람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묶은 사건은 1942년의 『성서조선』 사건이었다. 1942년 3월 『성서조선』 제158호에 김교신이 쓴 「조와(弔蛙)」가 실렸다. 겨울 추위에 죽은 개구리와 살아남은 생명을 이야기한 짧은 글이었다. 일제 경찰은 그 글을 혹독한 식민통치 속에서도 살아남아 다시 소생할 조선민족을 암시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 결과 『성서조선』은 폐간되었고 김교신과 함석헌, 유달영 등을 포함한 관계자들이 검거되어 장기간 구금과 옥고를 치렀다. 여기에서 무교회주의의 또 다른 성격이 드러난다. 김교신과 함석헌은 처음부터 정당을 조직하거나 무장투쟁을 벌인 정치운동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국가가 지배할 수 없으며, 신앙과 정신은 권력에 종속될 수 없다는 원칙을 끝까지 밀고 나가자 그것은 결국 식민권력과 충돌했다.

정신적 자유를 철저하게 추구하면 정치적 자유의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옥고를 함께 겪은 두 사람의 운명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김교신은 출옥 뒤 흥남질소비료공장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복지와 생활을 돌보는 일을 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45년 4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광복을 불과 넉 달도 남기지 않은 때였다. 그의 나이 불과 44세였다.

그 소식을 들은 함석헌은 대단히 애통해했다. 함석헌이 뒤에 김교신을 추모하며 지은 「돌아간 김교신 형 집을 찾고」에는 그 마음이 절절하게 녹아 있다. 동시에 벗을 먼저 떠나보낸 뒤 ‘이제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고 묻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막막함도 읽힌다.

문 앞에 흐르는 물 의구히 흘러 있고
울 뒤에 맑은 송풍 제대로 맑았구나
봄볕은 서창을 비쳐 님의 얼굴 보는 듯
이 시내 마시면서 이 바람 쏘이면서
흐리운 이 세상을 맑히자 애쓰던 맘
그 마음 어디 찾느냐 북악산만 높았네
시냇물 흘러가고 솔바람 불어가고
산사의 저문 종이 울리어 가는 저녁
다녀간 님을 그리며 나는 어딜 가려노

마지막 구의 “나는 어딜 가려노”라는 한 마디가 특히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단순히 죽은 친구를 슬퍼하는 말만은 아니다. 자신과 함께 성서와 조선을 이야기하고, 같은 감옥을 경험하며, 서로의 생각을 비추어주던 벗을 잃은 사람이 앞으로 홀로 걸어가야 할 사상적 길을 묻는 탄식처럼 들린다.

만약 김교신이 해방 이후까지 살았다면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김교신이 조금만 더 살았다면 함석헌의 이후 사상이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전개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함석헌은 해방과 분단, 6·25한국전쟁, 이승만 정부와 군사정권의 시대를 지나면서 점차 초기 무교회주의의 테두리를 넘어갔다. 1960년대에는 퀘이커와 깊은 관계를 맺었고, 비폭력·평화주의를 받아들였다. 나아가 기독교만을 유일한 진리라고 보는 입장에서도 벗어나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폭넓게 받아들였으며, 마침내 ‘씨알’이라는 독특한 민중사상을 발전시켰다. 실제로 그는 훗날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고치면서 성서만이 완전한 진리라는 초기 입장에서 자신이 멀어졌음을 명시했다.

젊은 시절 유일한 사상적 지표로 잡았던 성서를 넘어서 역사로 사상적 지평을 넓혀간 함석헌 선생

그러나 그 사상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젊은 날 김교신과 함께 던졌던 질문들이 형태를 바꾸어 계속 살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제도보다 중요하다. 진리는 권력과 조직이 독점할 수 없다. 신앙과 사상은 생활 속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민족은 다른 민족의 정신을 베끼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 문제의식은 훗날 함석헌이 국가와 권력보다 ‘씨알’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과 자각을 강조하게 되는 중요한 사상적 토양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김교신의 ‘조선산 기독교’와 함석헌의 ‘씨알사상’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다리가 놓여 있다.

따라서 두 사람을 단순히 ‘김교신은 스승, 함석헌은 제자’라는 도식으로만 설명해서는 이 사상적 역동성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복제하지 않았다. 같은 문제를 놓고 각자의 길을 만들어갔다. 독일의 실존철학자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인간 사이의 진정한 정신적 교류를 ‘사랑하는 투쟁(liebender Kampf)’이라는 독특한 말로 표현했다. 진정한 소통은 상대의 말에 무조건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질문하고 도전하면서 상대가 더욱 자기 자신이 되도록 만드는 관계라는 뜻이다. 야스퍼스에게 진정한 소통은 한쪽이 다른 쪽을 굴복시키는 싸움이 아니라 권력과 우월성을 배제한 채 서로의 존재를 일깨우는 과정이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김교신과 함석헌의 관계를 ‘지기(知己)’라고 부르는 이유도 더욱 분명해진다. 진정한 지기란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깨우고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세계를 보게 하며 내가 나 자신의 사상에 도달하도록 자극하는 사람이다. 김교신은 함석헌에게 신앙이 생활과 민족의 현실 속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함석헌은 그 문제를 역사와 민중과 인류의 문제로 밀고 나갔다. 김교신은 44세의 짧은 생을 살았고 함석헌은 그보다 44년을 더 살았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김교신의 사상은 1945년에 멈추고 함석헌의 사상만 계속 발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상은 사람의 육체와 함께 반드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김교신이 함석헌에게 던져놓은 질문은 함석헌의 긴 생애 속에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함석헌이 씨알과 비폭력, 민중과 역사의 ‘뜻’을 이야기할 때 그 먼 배경 어딘가에는 젊은 날 함께 성서를 읽고 조선을 걱정했던 김교신의 모습이 서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이 함께 던졌던 질문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살아 있다. 외래의 사상과 종교를 어떻게 우리 자신의 정신으로 소화할 것인가? 권력과 조직에 예속되지 않는 인간의 정신적 자유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그리고 사상가는 자신의 생각을 말로만 주장하지 않고 어떻게 삶으로 증명할 것인가?

이 질문을 함께 묻고 서로의 생각을 깨웠다는 점에서 김교신과 함석헌은 한국 근현대 사상사에서 보기 드문 진정한 지기였다. 두 사람이 우리에게 선사한 사상적 세례는 20세기를 관통하면서 시대적 길잡이였고, 21세기로 넘어온 지금도 여전히 실천과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비정한 이 시대를 살면서 어떤 사상을 품고, 무엇을 하면서 사는가? 허심탄회하게 서로 생각을 주고받고 논할 수 있는 ‘진정한 지기’는 있는가?

2025. 4. 19. 13:09.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