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시집 출간
생애 첫시집을 발간했다. 시집을 많이 낸 토방 출판사의 38번째 詩選으로 나왔다. 발행일은 2023년 1월 15일로 돼 있지만 실제로 책이 나온 것은 1월 10일이었다. 1989년도부터 시랍시고 조금씩 끌적이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쓴 한글시, 영시, 한시, 일본시 등 총 300여 수 중에 이번 시집엔 한글시만 작시의 연도별로 끊어서 99수만을 실었다. 시집 이름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이다. 시집 이름에 걸맞게 시 속에 흐르는 함의도 대체로 그런 결이다. 시중 서점엔 서울의 교보문고에서만 판매가 되고 있다고 한다.
시인의 말
생애 처음으로 시집을 내게 됐다. 처음 시랍시고 끄적거린 게 유학시절 초기였던 1989년이었으니 33년 전이다. 지금까지 학술 연구서는 적지 않게 냈어도 시집은 내지 않았다. 본업도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쓴 글들이 시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시인으로 데뷰할 생각도 없었다. 당시 한글로, 영어로 또 한문으로 뭔가를 썼지만 시작이라곤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이국생활에서 마주친 갖가지 고충, 고뇌, 색다른 경험에 대한 느낌을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는 "기록"이었을 뿐이다. 귀국 후엔 일본 하이꾸(俳句)에도 손을 대봤다. 작년 초까지 습관대로 계속해서 쓴 네 종류의 글들이 총 280수가 넘었다.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기록행위는 계속됐을 것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겼다. 작년 3월 뜻밖에 생각지도 않게 월간 문예지『순수문학』 신인상을 받고 시인으로 등단한 것이다. 기록들이 시 작품이라는 진중한 옷을 입게 됨과 동시에 비로소 기록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됐다.
이번 시집에 실린 80여 수는 1980년대 말부터 2021년 사이에 쓴 시들이다. 연도별로 배열된 것들 중 초기 작품은 그다지 시 냄새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의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실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야말로 내가 살아온 개인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영시, 한시, 하이꾸 등의 약 80수와 근년에 쓴 약 100여 수의 한글시는 시집분량을 고려해 이번엔 싣지 않았다.
‘초짜’ 시인이 보기에 시는 자신이 타고난 성품과 평소 살아온 習의 반영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사회지도층 인사 중에 허위와 가식에 찬 사람들을 수 없이 목도해왔다. 심지어 거짓이 없어야 하고 글과 삶이 일치해야 할 시인, 수필가, 언론인, 학자들 마저도 글 따로 몸 따로의 작태를 보이는 이도 물리도록 많이 봤다.
시는 정직하지 않으면 시가 되지 않는다. 정직하지 않으면 글에 힘이 없고, 힘이 없으면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며, 감흥을 주지 못하면 시로서는 생명이 없는 것, 즉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남을 속이거나 능갈치지 못하는 성격에다 그런 성향을 강화시키는 역사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역사학은 실증과 진실추구를 본령으로 하기에 나의 시작들에도 정직과 이성이 상상을 넘지 못한 게 온전히 드러난다. “사람으로서 어질지 아니 하면 예가 바른들 뭣하며, 사람으로서 어질지 아니 하면 음악은 해서 무엇 하랴.” 공자가 한 말(『論語』「八佾」)이다. 나는 이렇게 얘기한다. “사람으로서 정직하지 아니 하면 시를 써서 무엇하랴”라고.
지난 나의 졸작들은 거개가 경험적 사실을 말하고 한 게 여실히 드러난다. 정직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나도 모르게 작품에 강점 보다는 단점으로 나타났다. 참 돼야 한다는 생각이 상상을 제한했다. 게다가 物事를 세세하게 규명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역사가의 오랜 습이 작품에 스며드는 것도 피할 수 없었다. 기록의 역사성과 준엄함을 추구하는 직업에 30년 이상 빠져 있다 보니 타고난 호방함과 호연지기는 거의 다 사라지고 없다. 소리 없는 깨달음, 침묵의 죽비라는 시 본연의 여러 기능과 이상태 중 한 가지에만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향후 넘어야 할 벽이다.
시인으로 이끌어주신 박경석 시인, 본 시집을 시집답게 꾸며주고 조언해주신 김영희 시인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박경석 장군은 청렴하고 강직하게 사신 분이다. 뒤늦은 일이지만 사표와 귀감이 되는 분을 만난 건 인생에서 큰 행운이다. 김영희 시인과의 인연은 1980년대 후반 언론사 재직 시 석성우 스님을 통해 만났으니 어느덧 30년이 넘는다. 그는 내가 젊은 시절부터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연스레 지켜본 지기다. 고마울 따름이다. 오늘 이런 인연이 되게 해주신 세 先賢에게 새삼 인연의 오묘함과 불가해성을 느낀다. 또 한 사람의 인연인 아내 박은영에게도 이 자리를 빌어 나지막한 소리로 고마움을 전한다.
어느덧 겨울이 성큼 곁에 와 있다. 머잖아 또 한 해가 시작될 것이다. 세상에 버려진 소외자의 가난한 마음으로 세상 속을 들여다 보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앞서 밝힌 시작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향후의 이정표다. 도덕성과 정의의 구현, 연기론적 세계, 무아, 무상의 자각에서 오는 참자유, 생명과 지구의 생태적 가치 등의 정신이 여전히 졸작들을 관통할 것이다.
2022. 12. 12
고향에서
雲靜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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