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황복에서 시작된 친구들과의 복어 이야기
성호도 육군 제1사단에 근무했었지만 나도 같은 1사단 포병단에 정화와 같은 작전과 벙커에서 근무했었다. 그래서 사단 방어지역 안을 흐르는 임진강에 황복이 잡힌다는 소리를 일찍부터 들었어. 아마도 우리나라에는 딱 두 곳, 임진강 외에 금강 하구에도 나는 모양이야.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니 이 황복의 학명이 후쿠(Fuku)나 타끼후쿠(Takifuku)라는 일본어로 명명돼 있고, 임진강과 금강 외에 한강에도 서식하는 한반도 고유종이더라고. 영어로는 학명은 아니지만 River Puffer라고 하네. 한 가지 더 덧붙이면 일본어로는 ふぐ로 쓰고 발음은 ‘후쿠’와 ‘fugu’가 아니라 ‘후구’(hugu)라고 읽는데, 학명이 잘못 표기된 것이다. 한자로는 河豚이라고 쓰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hétún이라고 읽고, 일본에서는 hugu라고 읽는다.
그런데 참 씁쓸한 기억이 있다. 그쪽 임진강의 제1사단 예하 연대장들은 맡은 본연의 군 생활은 성실히 하지 않고 ‘쫄따구들’ 시켜서 황복을 열심히 잡게 한 일이 잦았다고 하네. 황복을 잡아서 사단장, 군단장들에게 갖다 바쳤다는 거지.
그런데 사단 전체에서 평소 근무를 잘 했을 뿐만 아니라 MOS(Military Occupation Specialty)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낸 얘들 보다 오히려 황복을 잡아 사단장에게 갖다 바친 자들이 장군 진급이 잘됐다는군. 심지어는 휴전선 철책을 넘어 남파된 북한 무장공비들까지 잡아서 무공훈장까지 탔는데도 장군 진급이 잘 안 됐다고 그러네.
이건 실제 그쪽 1사단 예하 한 연대장을 지냈던 이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인데, 그는 군대 생활을 굉장히 성실하게 잘 했던 사람이다. 연대장 시절, 철책에 들어가 있던 그의 예하 중대와 대대 사병들이 넘어오는 간첩을 잡아서 자기도 부하들 덕분에 무공훈장을 받았지만 결국 장군 진급은 못했어. 왜 겠노? 황복을 잡아 윗것들에게 상납하질 않아서겠지.
세월이 지나서 국방부 근무시절 2009년쯤인가 다니던 직장에서 내가 한일 군사학술세미나를 주관하면서 일본 방위청에서 온 학자들을 데리고 판문점과 땅굴을 견학시킨 뒤 훼바로 나와서 임진강 인근 황복요리를 잘 한다는 집을 찾아 가서 이 황복을 같이 먹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혀가 둔해서 그런지 독성 같은 건 잘 못 느끼겠더라. 식당 측에서도 독이 있는 알 같은 걸 서비스로 주지도 않았거니와 독에 대한 설명도 한 마디 없더라. 그래서 지금 남아있는 기억은 황복이 굉장히 육질이 연하고 맛이 담백해서 맛있게 잘 먹었지만 가격이 비쌌다는 것뿐이다.
당시 맛있게 먹은 기억은 지금도 남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무슨 음식이든 맛있게 먹는 나의 식성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중에 기회 되면 나나 성호나 옛날 1사단 근무시절 기억을 떠올리는 건 좋지는 않을 수 있지만 한번 평심한 마음으로 그쪽 지역을 둘러보면서 황복 맛을 다시 재음미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회동 건에 대해선 나중에 얘기하고 오늘은 이참에 황복에 관해 부풀린 얘기나 소개해본다. 먼저, 세종대왕이 황복을 먹고 맛이 있어 눈물을 흘렸다는 말이 있기에 내가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니 한문을 잘못 해석해서 오전된 것임을 발견했다.
원문을 보면 세종이 복어를 먹긴 먹었지만 눈물을 흘린 것은 세종이 아니라 세종의 아들 문종이었다. 당시 세종이 병환이 들어 몸이 좋지 않자 문종이 친히 복어를 베어서 올렸더니 세종이 먹자 이를 본 문종이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돼 있다. 원문은 아래에 옮겨 놨다.
“世宗嘗不豫, 上親割鰒魚以進, 世宗許嘗之, 上喜至垂涕”(『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제13권, 문종 2년 5월 2일)▶“세종께서 일찍이 몸이 편치 못해서 임금(문종-필자)이 친히 복어(鰒魚)를 베어서 올리니 세종이 맛을 보자 임금이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원문 중의 上은 임금을 뜻하고 세종이 아니라 문종을 가리키는 것이다.
아무튼 『조선왕조실록』에 복어로 鰒魚와 鮐(복어 태)가 기록돼 있는 걸 보니 조선시대 때 복어는 한자로 鰒魚와 鮐가 쓰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세종이 먹었다는 그 복어는 황복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입맛은 모두 같지 않다. 기호도, 식성도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나는 복어를 가끔씩 먹어봐도 담백하다는 것 외에는 아주 맛있다는 느낌은 없다. 미식가가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언제부터 복어를 먹기 시작했고, 옛날에도 복어는 값비싼 생선이었을까? 요즘, 황복이 많이 잡히지 않을 때는 1kg에 100만 원대에 홋가한다는 말도 있다.
남해안의 김해 장유면 수가리의 신석기시대 패총에서 졸복 뼈가 출토된 것을 근거로 우리나라도 이미 신석기시대 때부터 복어를 먹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 기록이 없을 뿐이지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에도 복어는 널리 먹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려 말 목은 이색(1328~1396년)도 복어 예찬자였다고 한다.
조선 초기 합포(현 마산)에서 복어 독 중독으로 집단 사망사건이 발생한 걸 보면 옛날에도 복어독이 문제가 된 모양이다. 조선 시대에는 “복어가 각별히 맛있다”는 주장과 기록들이 혼재돼 있지만 먹어선 안 된다는 측보다는 먹어도 된다는 이들이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복어 식용 반대론을 편 자는 청장관 이덕무(1741~1793년) 집안이었다. 강계부사를 지낸 조부 부사공 이필익, 그 아들이자 이덕무의 부친 통덕랑 이성호 부자가 복어 식용을 반대하면서 후손들에게 복어를 먹지 말라는 유훈까지 남겼다.
통덕랑 이성호는 항상 복어를 먹는 사람을 경원시했다. “어찌 구복(口腹)을 채우기 위하여 생명을 망각하랴”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덕무는 윗대로부터 내려온 유훈을 잘 지켜서 자신도 ‘복어 경계’를 글로 남겼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이덕무 집안과 달리 복어 맛을 예찬한 글들도 상당히 많다고 한다. 1740년부터 5년간 양천(현 서울시 양천구 근처) 현령을 지낸 겸재 정선(1676∼1759년)이 남긴 그림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중 지금의 행주대교 일대를 그린 ‘행호관어'(杏湖觀漁)에 겸재의 친구인 사천 이병연(1671∼1751년)의 시가 한 쪽을 차지하고 있는데, “늦봄의 복어국”을 말하면서 복어를 잡기 위해 “그물을 행호 밖으로 던진다”는 싯귀가 적혀 있다. 행호란 오늘날의 행주대교 부근의 한강을 말한다.
우리 선조들도 복어를 고급 요리로 치면서 귀하게 대했을까?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복어가 고급요리이고 맛있는 생선으로 치는 건 일본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싶다. ‘복어 전문 조리사 자격증’도 처음 만든 일본에서 도입해왔으니까!
바쿠후(幕府) 정부는 독성 때문에 복어 식용을 금지한 것에 영향을 받아서 혼슈(本州) 서쪽에서 규슈(九州) 지역에 이르는 지역의 사람들만 복어를 먹었다. 그러다가 복어가 식용으로 일본 전역으로 퍼지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온 뒤부터였다. 즉 번(藩)의 하급무사로서 메이지(明治) 유신을 성공시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등의 정객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자신의 고향(이토의 고향 야마구찌山口현의 히까리시光市는 시모노세끼下關와 같은 현에 있는 곳에 있음)인 ‘복어 명산지’ 시모노세키에서 일본 전역으로 복요리를 전파했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복어 요리를 먹어본 기타오오지 로산진(北大路魯山人, 1883~1959년)이 복어를 두고 프랑스의 푸아그라나 달팽이 요리는 대주지도 않을 만큼 맛있다고 찬미했다. 기타오오지 로산진은 전각을 파고, 그림을 그리고, 붓글씨를 쓰고, 도자기를 굽어내는 등 만능 예술가였지만 요리가, 미식가로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복어야말로 최고의 미식 중 하나라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또 복어 중에도 시모노세키 복어가 가장 맛있다거나, “독이 무서워 복요리를 못 먹게 하는 것은 엉터리”라고도 했다(로산진 저, 김유 역, 『무타협미식가』, 허클베리북스, 2019년).
로산진이 일본이 자랑하는 미식가였다면 중국인이 자랑하는 미식가는 옛날 중국 北宋의 대문장가 蘇東坡(1037~1101, 호 東坡居士, 본명 蘇軾)다. 소동파는 시인으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요리를 만들어 감상하고, 없던 요리까지 새로 개발하기도 한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미식가였다.
중국 요리 중에 이름난 메뉴인 “東坡肉”, “東坡羹”, “東坡豆腐” 등등이 모두 그가 새로 개발한 요리다. 나중에 중국요리에 대해 얘기할 때 좀 더 많은 소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동파가 황복의 맛을 극찬했다는 말들이 떠돌아다니는 것도 典故를 찾아 봤더니 황복이라고 특정하지는 않았고 그냥 일반명사로서 복이라고 했다. 이와 관련해 아래와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소동파는 죽음을 무릅쓰고 복요리를 시식한 일화가 있다. 복은 독이 있어 장만하기가 쉽지 않다. 그가 하루는 임지인 常州에서 일하고 있을 때, 요리를 잘하는 한 친구가 그에게 복어요리를 먹어보라고 권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친구가 복어요리를 맛있게 끓여 줬더니 소동파는 그것을 먹고 반나절이 지나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동파가 젓가락을 놓고선 감탄사를 발하는 게 아닌가? “아름다운 맛이다. 정말 아름다운 맛이다. 한 번 (먹고) 죽어도 괜찮을 만큼!”(美味, 真是美味, 值得一死!) 복어의 독이 잠시 몸속으로 퍼져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이야기는 소동파가 조리된 복어요리를 시식하는 것을 병풍 뒤에 숨어서 본 친구들의 처들이 퍼트려서 알려지게 됐다.
복어 맛을 본 소동파는 ‘惠崇春江晩景’라는 시 한 수를 지어서 “蒌蒿滿地芦芽短 正是河豚欲上時”(물쑥이 땅에 가득 차 있고 갈대 싹이 짤막하니 지금이 바로 복어가 올라오려는 때로다)라고 읊었다(『蘇東坡詩集』, 권 26). 이 글 모두에서 얘기했듯이 河豚은 중국에서 복어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河鲀이라고도 쓴다.
이 해가 가기 전에 코로나 사태가 풀리고 친구들과 같이 우리가 젊은 시절 군대생활을 한 임진강에 가보고 싶다. 벌써 40년 전의 일이니 모든 게 많이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동통하고 귀여운 황복 만큼은 변함 없이 옛날 그대로의 모습일 것이다.
2021. 5. 3. 10:07
고향 浦項에서
雲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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