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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서 동독과 북한이 다른 점

雲靜, 仰天 2021. 1. 24. 05:51

통일문제에서 동독과 북한이 다른 점

 

남북한 통일은 독일의 동서독 통일을 참고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또 참고는 하되, 형식은 독일처럼 남한의 북한 흡수통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 조금 전, 어느 단톡방에 독일 교민인 듯한 이가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일한 것을 두고 독일통일이 한국의 남북통일에 바람직한 교본이 돼선 안 된다는 글을 올렸다. 나는 그에 대해 댓글을 달았다. 아래에 올려놨다.
 
동서독의 통일이 남북한 통일의 교본이 될 수 없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이 글에는 서독이 동독을 흡수해서 통일했기 때문에 남북한은 그렇게 해서 안 된다는 글쓴이의 의지와 바람이 들어가 있다. 이 원칙적 견해는 외국의 선례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각기 역사적 배경, 현실적 환경, 조건 등등이 달라서 맥락을 동일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61년 8월 13일부터 1989년 11월 9일까지 베를린 시내를 가로 질러 약 28년 간 존속했던 베를린 장벽(Berliner Mauer, 영어명 Berlin Wall) 앞의 브란덴부르크 문(좌측이 동독이고, 우측이 서독이다.)

 

그러나 남북통일의 형식 혹은 주체와 관련해선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로 통일을 이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긴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지금까지 세계사에서 대등한 관계의 통일을 이룬 경우가 없었던 역사가 말해주듯이 그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남한의 북한 흡수통일도 무조건적으로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할 수 있으면 남한의 북한 흡수통일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남북통일 과정에서 남북한이 자기 주도형 결정자가 될 경우와 그것이 안 될 경우도 상정해서 대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논란이 많이 될 수도 있는데 독일 이웃나라 오스트리아와 스위스가 이룬 것처럼 영세중립화 통일방안도 포함해서 폭넓은 논의를 거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주제보다도 이 글에선 우선 손쉽게 변별할 수 있는 사안으로서 누구든지 생각할 수 있는 것, 즉 북한과 동독 간에는 근본적으로 각기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몇 가지 제시해본다.
 
첫째, 동독이 북한과 다른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동독이 평화혁명의 노선을 추구한 데 반해 북한은 말로는 평화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는 무력노선을 우선시하거나 병행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독의 평화혁명 의지는 동독이 서독과 협상을 통해 체제전환을 모색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말하자면 동독은 서독과 대화를 함으로써 자신들의 체제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함은 물론, 전환방향의 틀도 그렇게 잡아갔던 것이다.

 

이것은 밑바닥에 독일 관념철학을 최고조로 발달시킨 쇼펜하우어, 헤겔, 칸트로부터 형성된 철학적 사유 능력과 이성력이 큰 힘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성력을 공유한다는 건 어떤 주장에 대해 옳고 그름에 대해선 동서독이 동일하게 분별할 수 있다는 소리다. 한 마디로 정치적 욕망만 제거하면 동서독이 서로 말은 통하였다는 소리다.
 
둘째, 동서독이 공히 통일 후 체제전환의 방향을 “사회적 시장경제”로 확대해서 적용하자는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었던 점이다. 이 부분은 남북한 모두가 필히 참고해야 할 대단히 중요한 포인트다. 사회적 시장경제란 서방 자본주의국가의 시장경제가 아니라 전후 독일 경제를 일으키는데 물꼬를 튼 두 주역인 루트비히 빌헬름 에르하르트(Ludwig Wilhelm Erhard, 1897~1977)와 알프레드 뮐러-아르막(Alfred Müller-Armack, 1901~1978)이 제시한 자본주의경제에 대한 비판적 운용이 가미된 것이었는데, 사회주의적인 것을 강화하거나 최소한 당시의 사회주의적 요소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세력이 동서독 전역에 넓게 분포하고 있었다. 이 점은 남북한과 크게 다른 점이다. 참고로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말은 전후 에르하르트가 경제부 장관으로 있을 때 그 휘하의 관료로 일한 쾰른대학 교수 뮐러 아르막이 자신의 저서에서 최초로 사용한 용어였다.
 
다시 말하면, 남한의 진보와 보수 어떤 정권이든 자신들이 주장하는 미래의 남북통일 의지가 진정성 있는 것이라면 복지사회의 방향이 어떤 내함을 지녀야 되고, 그것들이 북한과 어떤 식으로 수렴 될지를 고려해야 된다는 소리다. 이 점은 동시에 북한 정권에게도 마찬가지다.

셋째, 동독과 북한이 공히 공산주의를 표방하면서 그 과도기적 단계로 사회주의를 실시 운용했거나 해오고 있지만, 동독이 사회주의를 사회적 변화에 대응해 내용을 달리한 비고정적 이념으로 삼은 것에 반해 북한은 그것의 정도(가변적 탄력성)가 많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이 점도 보는 이에 따라서는 견해가 다를 수 있음.)
 
넷째, 동독은 유럽의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 중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1인당 GDP와 PPP 국민소득이 가장 높았으며(1990년 당시 동독 1인당 국민소득(PPP)은 약 $9,700 정도였으며, 명목소득은 $6,800로 2위였음),  같은 시기 1인당 GDP 약 2만 달러의 서독에는 절반에 미치지 못했고, 국가 경제력은 서독에 비해 10분의 1에 불과했지만 전체 공산권 내에선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을 포함해서 가장 잘 사는 국가였다. 전체 세계에선 20~30위 정도의 경제력이었다.

게다가 동독은 정치에 대한 비판도 어느 정도 허용된 상황이었지만 북한은 동아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이고 인민들의 수령을 포함한 정치비판은 아예 생각도 못한다.

물론, 동독주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됐으면 통일에 그다지 응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렇지 못했으며, 통일을 위해 장기간 돈을 준비해온 서독이 통일한 것은 돈으로 동독을 샀다고 봐도 된다는 식의 주장도 없지 않다. 그러나 서독 대비 동독이 가진 경제력과 국민소득에 비해 남한 대비 북한이 가진 그것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다섯째, 동독은 주민들이 스스로 동독공산당의 일당 독재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다당제를 이뤄냈는데 이 점은 북한 주민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차이다. 동독은 통독 얼마 전인 1990년 3월 18일 주민들이 동독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자유 총선거를 실시해서 공산당을 무너뜨리자 서독의 당명을 본딴 정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 중에 동독 기민당은 아예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겠다”는 노선까지 분명히 밝혔다. 과연 북한에도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 통일이 될 수 있는 상황 변화가 있으면 북한에도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지만 현재 시점에 북한의 상황과 주민들의 정치적 각성의 정도로 봤을 때는 기대할 바가 못 된다.

여섯째, 동독 주민들은 종교의 자유를 누렸음은 물론, 서독을 방문할 수도 있었고 절차가 까다로웠지만 해외여행도 가능했음에 반해 북한 주민들은 이 세 가지가 전혀 불가능한 상태에서 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곧 동독 주민들은 거주 이전, 여행, 신앙의 자유 등 기본권이 어느 정도 보장돼 있었으며, 그걸 통해 해외정세를 잘 이해하고 있음에 반해 북한 주민들은 기본권조차 유린된 채 바깥 정보가 차단되어 전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통일 같은 변화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이것도 통일로 가는 데에 상쇄시켜야 할 과제가 되는 만큼 마이너스 요인이다.

일곱째, 같은 공산당 계열의 일당 독재체제였지만 동독은 당수가 세습하지 않았음에 반해 북한은 세계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김일성가가 3대를 세습해온 세습왕조 같은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차이로서 평화적 통일을 가로 막는 최대 장애요인이다. 특히 김정일과 김정원 부자 이래 끊이지 않고 있는 핵무기 개발과 도발은 동독은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던 것으로서 남북한 간의 상호 신뢰를 저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작동되고 있다.
 
남북통일과 관련해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직후 동독 공산당 정권의 마지막 총리를 맡아 서독의 헬무트 콜(Helmut Josef Michael Kohl, 1930~2017) 총리와 통일방안을 논의한 바 있는 한스 모드로우(Hans Modrow, 1928~) 전 총리는 통일의 전제조건으로 상호 ‘신뢰’와 ‘화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한국 측에 이렇게 조언했다. “통일이 되려면 서로 간에 신뢰가 생겨야 하고, 문제가 있는 부분에서는 화해가 있어야 하고, 대립상태가 몇 세대를 거쳐 계속 유지되어선 안 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던 통일의 기반이었습니다.”

 
 

남북한 사이의 휴전선과 동서독 사이의 베를린 장벽의 긴장도도 많이 달랐다.
2010년 11월 23일 북한이 서해의 연평도에 도발한 연평도포격사건. 이 사건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북한의 각종 대남 도발이 수 없이 많았지만 북한이 단 한 번도 진정성 있게 제대로 사과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남북한 간의 상호 신뢰는 여전히 요원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 점은 동서독과 달리 남북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최대의 장애요인이자 난제다.

 

지금까지의 논의들을 종합하면, 동독의 탄력적 대응이 가능하게 된 경제적 배경과 사상사적 배경이 한 몫을 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먼저 서독은 동독에 비해 경제적으로 월등하게 앞섰기 때문에 통일 담론과 협상에서도 서독의 이니셔티브가 확실하게 우위에 있었던 점 그리고 상호 신뢰가 선결조건임을 꼽을 수 있다.

 

게다가 정치 사상사적 배경이 다른 것도 무시할 수 없다. 19세기 칼 마르크스 이래 독일 내에 존재해온 칼 카우츠키(Karl Johann Kautsky, 1854~1938)와 베른슈타인(Bernstein Eduard, 1850~1932) 류의, 레닌(Lenin', Vladimir Il'Ich, 1870~1924)과 달리 의회를 인정하는 등의 다른 노선을 걸었던 사회주의(수정 사회주의 혹은 개량사회주의) 운동의 여력과 그 전통들이 동독지도자들을 통일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習合작용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이에 반해 남북한에는 그러한 세력이 지극히 미미하다.
 
이외에도 다른 부분이 많다. 예컨대 동독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소련의 대동독 영향력과 동기―이점에서 독일통일을 동의하고 동독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준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e, 1931~)는 대단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고,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국의 대북 발언권의 정도도 다르다. 즉 한국전쟁에 개입해서 북한을 지원한 중국은 이 사실을 근거로 대북한 지분을 주장하거나, 평화협정에 대한 입장이나 혹은 남북통일 후 북한이라는 완충지가 사라지는 등 자국의 안전이 위협 받을 것이라고 본다는 측면에서 소련과 많이 다르다.

 
 

높이 3.5m, 폭 1.2m, 두께 0.4m의 거대한 콘크리트 철골구조로 된 베를린 장벽에 그려져 있는 호네커와 고르비가 입을 맞추고 있는 이 벽화는 독일통일 과정에서 동독사람들이 생각하던 인식과 동독공산당과 소련의 관계를 상징한 것이었다.
베를린장벽의 해체가 결정된 것은 1989년 11월 9일이었다. 다음날 10일 아침,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 올라가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환호하고 기뻐한 독일인들. 1989년 11월 9일의 베를린장벽 해체 뒤 1990년 3월 18일 실시된 자유선거에 따라 여당인 독일 통일사회당은 동독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상실하면서 동년 8월 23일 동독 의회가 동독의 행정구역을 제2차 세계대전 전의 5개 주로 복귀하기로 결정하였고, 그로부터 두 달도 채 안 된 1990년 10월 3일 동독은 독일 연방공화국에 합병돼 독일통일이 이뤄졌다.

 

게다가 동독과 북한은 통제와 선전 등을 포함한 국가권력의 작동 방식, 최고 지도자의 대외 인식의 차이, 두 주민의 교육 및 정치적 각성의 정도, 사회경제적 기초의 차이 등등 적지 않다.
 
위와 같은 상이점들을 포함해서 전체적으로 동독과 북한이 어떤 식으로 다른지, 또 그 다름이 남북통일 과정에 어떤 작용과 반작용을 일으킬지, 그리고 통일 후 1세기 이상 각기 이질적으로 제 갈 길을 걸어왔던 남북의 사회적 통합을 어떻게 수렴시켜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해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내용은 통일교육에도 포함시킴과 동시에 지혜를 모아 남북한 간의 신뢰회복과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것이 가장 먼저 이뤄내야 할 과제다.
 
2021. 1. 19. 11:06
북한산 清勝齋에서
雲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