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 공사의 자살 2

영욕의 두 삶, 이범진과 박병두 添言

영욕의 두 삶, 이범진과 박병두 添言 서상문(한국역사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이범진(李範晉, 1852~1911)과 박병두(朴炳斗, 일본명 靑山三藏, 1895~19??), 지난 주 학술교류의 일환으로 논문 발표차 러시아국방부 군사학술연구소를 방문한 우리 일행이 러시아에서 만난 善과 惡, 美와 醜가 교차한 두 한국인 역사인물이다. 이범진은 초대 러시아 주재 대한제국 공사였고, 박병두는 일본군 소장계급으로 관동군 보급부대장을 지낸 군인이다. 두 사람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삶을 살았다. 1911년 1월 26일(제정 러시아 그레고리력 1월 13일) 12시 제정 러시아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내 뻬스쩰가 5번지의 한 저택에서 3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범진이 자신의 거실에서 천장 전등에 밧줄을 매단 채 목을 맨 뒤..

영욕의 두 삶, 이범진과 박병두

영욕의 두 삶, 이범진과 박병두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1911년 1월 26일 정오, 제정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뻬스쩰가 5번지의 한 저택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자결이었든, 아니면 러시아 주재 일본 무관들이 꾸민 자살을 가장한 암살이었든 초대 주 러시아 한국공사 이범진의 삶은 그렇게 마감됐다. 1956년 한국인 친일 전범 박병두(일본명 靑山三藏)는 일본정부의 탄원에 응한 소련정부의 조치로 일본으로 이송되면서 자결하지 않았다. 또 살해되지도 않았다. 2011년 10월 이범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의 '북방묘지'에 안장돼 있었고, 박병두는 모스크바 소재 러시아 군사문서보관소의 전범심문기록으로 남아있었다. 한 사람은 조국을 위해 자신과 가족을 희생한 애국자로서 영생자의 자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