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주요 언론 게재 글 내용

중화민국의 한국임시정부 재정지원과 백범 김구

雲靜, 仰天 2018. 8. 15. 09:55

중화민국의 한국임시정부 재정지원과 백범 김구

서상문(경희대학교 중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중국의 임정 지원 계기

 

나라 찾는 독립운동에 반드시 없어선 안 될 요소가 있다면 뭘 꼽을 수 있을까? 독립투쟁의 주체인 투사로서의 인재, 비전, 전략과 방책, 자금, 민족의 거족적 성원과 국제사회의 지지 확보다. 이 가운데 자금은 또 다른 무기다. 그것도 가장 강력한 무기다. 무기가 없으면 싸울 수가 없다. 자금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으로 약칭함)는 속수무책이었을 수도 있던 중요한 요소였지만, 임정의 독립운동자금에 대해선 광복 후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모가 밝혀진 게 없다.
 
중화민국(이하 ‘중국’으로 칭함) 내 한국독립운동의 구심점인 임정에게 대단히 긴요했던 운영자금의 출처는 크게 국내외 한국동포의 성금과 중국의 지원이었다. 중국국민당이 국민정부 수립 전부터 임정요인들에게 환국시까지 지원한 것은 정신적 지지, 군사인재양성, 외교적 지지, 물질적, 경제적 원조 등 4개 분야로 가닥을 잡을 수 있다.
 
중국 관내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지원은 멀리 1900년대 초기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 시절부터 시작됐는데, 이 시기는 주로 정신적 지지에 머물렀었다. 비정기적인 자금부조가 없지 않았지만 그것은 일부 독지가들의 개인적 지원 형태로 이뤄졌다. 재야의 중국지사들이 한인지사들을 도운 이유는 두 나라가 동문동종의 문화적 친밀감에다 같이 일제의 침략을 당하고 있던 동병상련이 발동됐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중국국민당이 결정적으로 중국내 한국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김구의 가르침을 받은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거행된 일본 천장절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투척한 의거가 계기가 됐다.
 
일제의 외교관과 군부 요인들을 폭살시킨 이 사건은 즉각 중국 언론들이 호외까지 발행하는 등 대서특필 되면서 중국조야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로 중국사회에 임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됨과 동시에 ‘만보산사건’으로 악화된 중국인의 대한국인 인식이 호전되고 중국 내 각계각층의 성원과 지원이 쇄도했다.
 
일제로부터 윤봉길 의사 의거의 배후 주모자로 지명수배 된 김구는 당시 중국정부의 화폐(法幣)로 60만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상해를 벗어나 이리저리 도피하게 됐다. 임정 요원들과 그 권속들도 후퇴하는 국민정부를 따라 여러 곳을 떠도는 유랑의 길에 올랐다.
 
이 시기 1932년 4월 말부터 그 해 10월 9일까지 김구가 해외 한국동포와 함께 국민당 유지들이 주가 된 중국 내 각계각층으로부터 받은 물질적 원조는 상당했는데, 현금 지원액만 해도 총 9건에 미화 2만 9,200달러에 달했다. 이 돈은 당시 중국화폐 가치로 대략 58만 4,000원에 상당했고, 요즘 가치로 백억대가 넘는 거액이었다.
 
김구가 중국 측으로부터 받은 돈을 기록한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실제 지원받은 액수는 이 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이 돈은 재정수입이 급감해 직원의 급여도 지불하지 못하고 1930년부터는 해외에서 답지했던 애국금도 한 푼 없어 운영비가 부족해 고용인을 단 한 명도 둘 수 없었던 임정에게는 숨통을 틀 수 있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이 사건을 전환점으로 중국 조야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에 대해 비공개적으로 적극 경제지원을 개시한 가운데 蔣介石도 중국 내 한국독립운동단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김구와 회견을 하는 등 중국과 임정 간에도 새로운 관계로 들어서게 됐다. 중국 측의 임정 지원은 크게 중국군부와 중국국민당 두 계통에서 취해졌다.
 
전자는 임정 내 김원봉 일파를 지원했으며, 후자는 김구 일파를 지원하게 됐다. 중국군부 계통에서 육성코자 한 김원봉은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 소재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4기 졸업생으로서 이 학교 초대 교장을 지낸 장개석(蔣介石)과는 사제지간이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 후 김원봉은 장개석에게 조선의열단 결성에 대한 승낙 및 지원을 요청해 1년 뒤인 1932년 8월 장개석의 허락을 받았다.
 
이 조직의 활동비용은 조선의열단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蔣介石의 지시로 만들어진 ‘민족운동위원회’에서 제공했으며, 모든 경비는 김원봉이 국민당 군사위원회 상교(上校, 현 한국군의 대위에 해당) 계급의 참모 명의로 직접 장개석에게 신청해 지급 받았다. 그가 요청한 금액은 일정치가 않았지만 대략 매월 약 400원에서 1,000원 전후 쯤 됐으며, 경상비로 지급된 것은 매월 2,000원에서 3,000여 원 등 일정치 않았다.
 
지원금은 증감이 있었는데, 지방출장비로 대략 1,000원에서 수천 원, 혹은 많을 때는 1만원까지 ‘임시특별비’ 명목으로 지급됐다. 이처럼 김원봉은 1932년부터 경비와 군사 활동 면에서 비밀리에 중국 군사정보 계통의 지원과 지휘를 받았다. 그가 1935년에 의열단, 조선혁명당 등 5개 단체를 통합한 뒤 임정 내 좌파연합체인 ‘대일전선통일동맹’을 토대로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지원과 지휘가 동력이 됐다.

 

김구와 장개석의 면담 및 국민당의 지원

 

김구는 김원봉 보다 조금 늦게 국민당의 지원을 받게 됐다. 1932년 말, 蔣介石을 면담한 자리에서 김구가 중국돈 100만원만 지원해주면 대폭동을 일으켜 일본 천황을 없앨 수 있다고 주장하자 장개석은 이 제안에 동의하지 않고 그 대신 중국 중앙군관학교 낙양(洛陽)분교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해 군사인재를 배양할 수 있도록 해줬다.
 
이때 입교한 군관(장교) 양성 1기생 100명의 교육을 위해 필요한 경비로 국민당 중앙당부가 매월 1,500원을 지원했다. 그리고 비록 1개 기수로 끝나긴 했지만 이 학생들에게 피복 및 기타 물품 외에도 매월 12원 씩의 급료까지 지급했다. 이 금액 중 한달치 식대로 6원, 국민당 당비로 급료의 12분의 1을 제하면 학생들이 실제로 수령한 금액은 3원 6각이었다.
 
이 돈의 값어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1920년대 초 모택동(毛澤東)이 북경대학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받은 한 달 급료가 8원이었는데, 이 돈으로 한 달 생활이 가능했던 점, 또 1930년대 초반 상해에 머문 도산 안창호가 1개월 집세와 식사비로 중국돈 25원이면 족했다고 한 점을 생각하면 능히 가늠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한적 학생들은 피교육생으로서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금액을 지원 받았던 셈이다.
 

대략 1934년을 전후해서 임정이 남경(南京)으로 옮겨온 뒤로 중국 측에서 매달 약간의 보조금 지원이 있었다고 백범은 기록한 바 있지만, 구체적인 수치를 밝힌 바 없기 때문에 대략적인 액수도 알 수 없다. 장개석과 국민당 인사들은 임정과 한국독립운동에 대해 줄곧 관심을 가지고 지원도 했지만 그것은 국가차원의 공개적인 것이 되지 못했다. 일본과의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극구 피하고자 한 장개석 및 중국정부가 일본에게 구실을 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조는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이 중국군을 기습 공격한 노구교(盧溝橋)사건에 직면해 국가통수권자로서 장개석이 7월 17일 이른바 ‘여산담화(盧山談話)’ 발표와 함께 정식으로 대일항전을 선포하면서부터 바뀌었다. 이때부터 일본에 대한 장개석의 부저항정책이 폐기되면서 비밀에 부쳐졌던 임정에 대한 중국정부의 지원도 일본에 대해 더 이상 눈치를 보거나 애써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중국 내 임정과 한국독립운동의 역할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 장개석이 한인들을 단결시켜 항일전에 활용하기 위한 의지가 반영됐다.
 
재중국 한인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국민당의 지원이 공개적이 되자 임정에 대한 지원도 국민당의 정책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장개석의 지시에 따라 중국정부는 군사비, 임정 및 각 한인단체에 대한 보조비와 차관 제공뿐만 아니라 한인 교민들의 생활보조비, 각종 구제비, 구호물품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도와주기 시작했다. 사실상 임정은 이 지원금으로 임정 운영, 독립운동활동비, 임정 구성원 및 그 가속들의 생활보조금으로 썼다. 중국 측의 지원은 임정에게 당시 많지 않은 재정 출처들 가운데 절대적 다수를 차지했다.
 
장개석은 심지어 1938년 5월 7일 장사(長沙) 남목청(楠木廳)에서 피격된 김구의 치료비로 3,000원을 지원했다. 남경, 장사, 광주 등지를 거친 임정이 마침내 11월 중순 사천성(四川省)의 중경(重慶) 인근에 도착해 김구가 지원요청 서한을 보내자 국민당은 임정직원들과 그 권속들이 거주할 수 있는 땅과 건물구입 자금 보조비로 2만 2,520원을 지원했다.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중경의 임정청사도 중국측에서 지어줬다.
 
그 이전 임정이 중경으로 이동해 안착하기까지의 과정에서 강소성(江蘇省) 주석(오늘날 성장에 해당) 진과부(陳果夫), 광동성 주석 오철성(吳鐵城) 그리고 공패성(貢沛誠), 주경란(朱慶瀾), 사량쇠(査良釗), 저보성(褚輔成), 은주부(殷鑄夫), 장치중(張治中), 서은증(徐恩曾), 주가화(朱家驊) 등의 국민당 인사들이 피난중의 임정 한인들에게 차량제공과 여비에다 생활비까지 제공했다.

 

이원화 시킨 장개석의 임정 지원

 

중일 전면전이 개시되자 정규군을 양성해 일본과 최후의 일전을 벌일 생각이었던 임정은 군사위위원회를 임정 내 군무부에 설치해 관련 군사계획을 마련했다. 하지만 도피 중에 있던 임정은 재정 부족에다 중국군부의 비동의와 광복군의 창설을 반대한 조선의용대 김원봉의 저지에 부딪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다가 1940년 4월 11일, 蔣介石이 조선의용대 외에 별도의 광복군 창설을 승인함에 따라 9월 17일 중경에서 한국광복군이 정식으로 창립됐다. 장개석이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 등 2개의 한인 군대의 존재를 승인한 까닭은 양 조직을 서로 경쟁시켜 더욱 분발토록 하기 위한 의도였다.
 
광복군 창설 초기 장개석은 국민당 군사위원회에다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할 방안에 대해 초안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이는 현재 입수 가능한 관련 자료들 중에 당시 중국 최고 지도자가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지원방침을 정하라고 한 지시로는 가장 이른 것이다.
 
이 사실은 蔣介石이 아마도 과거 중국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이 일정한 원칙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임기응변식으로 조치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이번 기회에 원칙을 정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개석은 중국이 일본과 전면적 지구전에 돌입한 상황에서 일제가 한국 내에서 전쟁물자와 병력자원을 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임정 소속 한인들을 적극 항일운동에 나서도록 할 생각이었다. 국민당이 임정의 군대인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을 동시에 지원한 배경이었다.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 기념 촬영(중경 가릉빈관, 1940년 9월 17일) 맨 앞줄 가장 가운데 앉아 있는 분이 백범 김구, 그 왼쪽 옆 군복 차림에 안경을 쓰신 분은 지청천, 그 옆이 홍진 선생이고, 김구의 오른쪽 옆은 차리석, 그 다음이 약산 김원봉으로 보이고, 그 옆은 이시영 선생이다.

1938년에서 1941년 사이 조선의용대가 명의상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속해 있던 시절, 이들의 의식주는 중국군과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 나중에 결성된 광복군 역시 중국군사위원회에 소속됐기 때문에 1945년 5월 임정에 속하게 될 때까지 줄곧 중국군사위원회가 제공한 양식과 군사장비 등의 보급품을 받았다.
 
이외에 장개석 부인 송미령(宋美齡) 여사의 ‘부녀위로총회(婦女慰勞總會)’에서도 광복군에게 특별위로금으로 10만 원을 전달했다. 1941년 9월 중순, 김구는 국민당 중앙조직부장 주가화를 통해 광복군의 인원수가 증가했다는 명목으로 蔣介石에게 20만원을 지원해주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10만원만 허락했고, 김구는 두 달 뒤인 11월 중순에 10만원을 수령했다. 임정 내 두 군사조직에 대한 국민당의 지원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전 한인 독립운동 지사들의 권속 120여 명의 생활비를 포함해 임정의 당, 정, 군 관련 모든 경비를 미주 한인교민들이 모금해서 보내준 매월 미화 3,000달러에 의지해온 임정에게는 부담을 크게 덜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대미 개전으로 미국 내 한인동포들의 송금이 끊어지자 김구는 다시 국민당에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12월 9일 김구는 주가화에게 장개석이 임정의 매월 당정비, 임정 요인 권속의 생계비 등으로 몇 만원을 지원해주도록 부탁했다. 김구의 이 요청에 대해 주가화는 자의적으로 지급금액을 6만원으로 결정해 이를 蔣介石에게 보고했다.

 

蔣介石이 12월 17일 주가화에게 국민당 중앙조직부장의 “특별지출비” 명목으로 지급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12월 26일 중국정부는 임정에 6만원을 지급했고, 그 뒤로도 매월 정무비 및 교민생활비를 정기적으로 지급했다. 이른바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 특별지출비’는 장개석의 ‘친필 지시’, 즉 ‘수유(手諭)’에 근거해 중앙은행이 임정에 지출한 대금이지만 중앙조직부장이 쓰는 것으로 처리된 것이다.
 
당시 중국의 임정 경비지원은 크게 임정 및 의정원의 경상비가 포함된 정무비, 임정 내 각 당에 지급된 정당 보조비, 주로 광복군의 무기 장비, 급양비 그리고 병력징모, 선전 및 정치공작 훈련비 등이 주가 된 군사비, 한인 교민들의 생활비 등 4개 부분이었다. 지원금은 국민당이 당 차원의 지원방안에 의거해 김구를 포함한 주요 지원 대상에게 일률적으로 지급했다.
 
이 시기 중국군사위원회의 중간 집행실무자들의 임정 지원에 대한 행보는 통일적이지 않았다. 1942년 5월 15일 장개석은 주가화에게 김구가 조선의용대를 정식으로 접수해 한국광복군에 편입시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주가화는 다시 장개석에게 한국문제 처리의견을 보고하면서 반드시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을 대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동년 10월 9일 장개석은 하나의 당만을 지원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내렸다. 12월, 장개석은 중국군사위원회 참모장 하응흠(何應欽), 중앙조직부장 주가화와 중앙비서처 처장 오철성 등 3인을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 정책을 주관하는 책임자로 지정해 이 일을 전담 처리하게 하면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 관련 행보를 통일시키려고 시도했다.
 
장개석의 지시를 받은 오철성은 자신이 조원으로 있던 중국국민당 내 ‘한국문제전문소조’ 구성원인 대전현(戴傳賢), 하응흠, 왕총혜(王寵惠), 진과부(陳果夫), 주가화, 왕세걸(王世杰) 등과 몇 차례에 걸쳐 논의한 결과 ‘조선복국운동을 지원하는 지도방안’을 만들었다. 이 안은 장개석이 지시해 제정한 다당 동시지원 원칙에 토대를 두고 그 해 1942년 12월 27일 실시하는 것으로 승인이 났다.

 

김구 위주로 지원을 단일화시킨 장개석

 

한편, 김구를 위주로 지원하자는 주가화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당 동시지원 원칙이 지속되자 주가화는 1943년 3월 5일 또 한 번 장개석에게 빈발한 한인 당파문제의 처리와 관련해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은 도와주어선 안 된다고 하면서 김구가 영도하는 한국독립당 위주로 지원해야 한다는 점을 피력했다. 장개석이 주가화의 의견을 받아들여 임정 내 당파들 중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지원하라고 지시하게 된 것은 1943년 8월 3일이었다.
 
蔣介石이 김구를 중심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한 데는 대략 두 가지 사정이 있었다. 첫째,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이래 중국은 만주지역의 안전을 위해 한국독립운동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짐에 따라 임정 내 한인들을 통일 및 단결을 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둘째, 장개석에게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이 혁명역량이 결여된 당으로 인식됐던 것도 한 요인이었다.
 
한편, 이 시기 임정은 재정적으로 대단히 곤궁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미국 한인교민들의 지원금 송금이 재개됐지만 그들이 매월 보내주는 돈은 미화 평균 2,000달러(중국 화폐로 대략 4만원 상당)로 줄어들었고, 이 돈에다 중국정부의 보조비 6만원을 합쳐도 총 사용 가능한 금액이 10만원 정도여서 매월 14만원 이상이 부족했다.
 
이에 해결책을 모색하기로 한 김구는 1943년 4월 주가화에게 지원금을 올려 줄 것을 재차 장개석에게 부탁해주길 요청했다. 이 때 김구가 국민당 측에 제시한 임정운영에 필요한 경비 및 임정 소속 한인 교민들의 전체 생활비 예산은 아래【표 1】과 같았다.

 

【표 1】임시정부 운영경비 예산

1내역금액(法幣)
2임정 직속 건물임대료 8,000
3임정 정무비(업무추진비, 위생, 교육 및 임시비용 포함)5만원
4임정 재외 공작비(선전, 정보수집, 통신 포함)6만원
5임정 직원 생활비(102명 중 겸직자 42명에 대해선 지급하지 않고, 나머지 60명은 기본 생활비에다 한 사람당 250원을 지급함)15,000
6각 단체 보조비(한국독립당 15,000, 조선민족혁명당 32,000, 청년회 1,000, 애국부인회 1,000)32,000
7중경시 일대 전체 한인교포 380명의 생활비(1인당 250)79,500
합계7개 항목 244,500

 

중국의 재정지원금 증가 추이

 

5월 중하순(11일~24일 사이) 상기 김구의 요청을 승인한 장개석은 당시 중국 내 전시 물가상승을 감안해 국민당 중앙당부 비서장과 중앙조직부장에게 6월부터 매월 14만원을 더 지급하라고 지시했고, 실제로 1943년 6월부터 매달 20만원으로 증액돼 지급됐다.
 
전시 물가가 쉼 없이 올라 인플레가 극심해짐에 따라 중국정부의 보조비도 증가된 것이다. 당시 중경의 물가는 중국정부가 최초로 정기적인 지원금을 지급한 1941년 12월을 기준으로 3.5배 이상이 올랐으며, 1943년 4월~5월 한 달 사이에만 약 1배(정확히는 0.8배)가 뛰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1943년 8월 초부터는 장개석의 지시에 따라 임정에 대한 국민당의 지원 방안이 다당 동시지원 정책에서 김구의 한국독립당 위주로 지원하는 일당 중심 지원정책으로 전환하게 됨에 따라 군비 이외 모든 보조금은 김구의 손을 거쳐 임정 내 각 단체 및 한인 교민들에게 분배됐다.

 

장개석의 ‘다당 동시원조 원칙’에서 보면, 조선민족혁명당에 지급된 보조비도 국민당 중앙당부가 직접 이 당에 지급한 게 아니라 김구의 손을 거쳐 지급된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이듬해 1월 10일 이전, 김구는 주가화, 오철성 두 사람을 통해 장개석에게 100만원의 차관을 요청했다. 장개석의 특별 승인 하에 김구는 이 돈을 동년 1월 말 2회로 나눠 수령해갔다.
 
그러나 당시 인플레이션이 지속된 중국사회의 물가상승이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만큼 극심한 상황에서 100만원의 차입금으로 얼마간은 견딜 수 있었지만, 물가폭등으로 임정의 운영은 여전히 힘들었다. 그래서 부득이 또 다시 국민당 중앙당부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김구는 대여 받은 100만원과 향후 특별 승인으로 지급 받게 될 공사(公私)의 각종 원조를 모두 차관으로 생각하고 “복국(復國)”을 이룬 후에 상환하는 조건으로 이번엔 매월 100만원씩을 지급해줄 것을 요청했다.
 
김구의 이 요청에 대해 주가화는 1944년 2월 16일 장개석에게 보고하면서 “매월 100만원은 너무 큰 거금”이라 기존에 매달 지급해온 20만원의 보조금을 동년 1월부터 소급해 30만원을 더 늘려 총 50만원을 지급하는 게 적당할 것이라는 의견을 상신했다.
 
장개석은 2월 16일 즉각 이 문제를 하응흠에게 처리할 것을 지시했지만 하응흠은 즉각 동의하지 않았다. 지원금 지급이 미뤄지던 상황에서 4월 18일 주가화가 다시 장개석에게 지원금 증액을 신속히 비준해줄 것을 상신했다. 이날 장개석이 이를 승인함에 따라 이후부터 매달 50만원으로 증액돼 지급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신임 중앙조직부장 진립부(陳立夫)와 오철성 비서장이 장개석에게 다음달 9월부터 임정 보조금을 매달 100만원으로 늘려 지급해주기를 바란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그리고 바로 장개석의 승낙을 받음으로써 지원금은 100만원으로 늘어났다.

 

이듬해 1945년 2월부터 이 보조금은 다시 300만원으로 증액됐고, 이 금액의 지급은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 지속됐다. 장개석이 지원금을 100만원에서 갑자기 세 배인 300만원으로 대폭 올려준 배경은 중국의 전시 수도이자 임정이 소재해 있던 중경의 물가에 맞춰 지원금을 현실화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 전역의 물가 앙등이 극심했지만, 특히 중경은 더욱 심했다. 전시에 계속 진행돼 오던 통화팽창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1945년 8월 일제 패망시의 도매물가지수가 1937년 상반기에 비해 무려 평균 2,454배나 올랐고, 소매물가지수도 2,865배나 뛰었다. 구매력으로 보면 1937년 두 마리의 물소를 살 수 있던 돈이 1945년 8월 이 시기에는 겨우 계란 두 개 밖에 살 수 없었을 정도로 돈의 가치가 떨어졌다.
 
이외에 김구의 요청으로 임정은 국민당 중앙당부로부터 기밀활동비, 특별보조비, 난민구제비 명목의 자금도 지원 받았다. 이 금액은 일일이 정확하게 산출해낼 수가 없다. 이 가운데 임정의 기밀활동비는 1944년 8월 3일 진과부가 발의한 것인데, 그 후 매월 20만원을 보조 받았다. 중국정부의 임정 보조비 중에는 임정운영에 소요된 경비 이외에도 중경시에 거류하던 약 400명의 한인 남녀 교민들에게 1인당 한 달 생활비 1,200원(1944년 2월 기준)을 지급한 최소 48만원도 있었다.

 

중국정부가 정기적으로 지급한 지원금은 처음 지급시부터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중경의 물가와 비교하면 아래【표 2】와 같았다.【표 2】에서 알 수 있듯이 1941년 12월 정기지급 개시 때부터 항전 말기에 이르기까지 지원금의 증액은 물가 상승과 거의 일치했다.

 

【표 2】중국정부의 시기별 지원금 지급현황             단위 : 법폐(法幣) 원

연월지원금액증가비율도매물가
총지수
증가비율지원금 총액
1941. 126128.4816만원×18개월 =108만원
20만원×10개월 =200만원
50만원×5개월 =250만원
100만원×5개월 =500만원
300만원×7개월 =2100만원
3,158만원
1943. 6203.3104.803.7
1944. 4508.3266.059.3
1944. 910016.6471.8016.6
1945. 230050914.0032
1945. 8300501,795.0063

*정기적으로 지급한 첫 번째 1개월의 지원금을 1로 잡은 수치임 

   

지원금의 요청과 지급은 국민당이 자발적으로 비용을 정해 놓고 지급한 게 아니라 대부분먼저 김구가 청구하면 국민당 담당자가 임기응변적으로 대응해 장개석에게 보고한 뒤 그가 최종 결정해주는 식이었다. 크게 보면, 임정내 당, 정, 군 관련 모든 문제 혹은 의견은 김구가 주가화나 오철성, 때론 진과부를 거쳐 장개석에게 전달됐다. 실무차원에서 김구에게 국민당의 창구역할을 한 것은 서은증과 주가화였다.
 

임정 혹은 한국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안은 장개석이 대체로 군사계통인 중국군사위원회와 당계통인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의 두 라인을 통해 보고를 받거나 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장개석과 이 두 계통의 책임자 혹은 그 이하 중급 정도의 실무자들 사이에 임정 지원의 정책과 시행 면에서 방침 및 집행이 일치하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었다  

 

중국 측 지원금의 총액은 얼마나 될까?

 

그러면 대일 항전 시기 중국정부가 임정에 경제적으로 지원한 총액은 얼마나 됐을까? 태평양전쟁 이전과 이후의 군비 및 기타 구제비, 그리고 김구의 특별기밀비, 기타 원조품과 차관 관련 자료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정확한 금액을 환산해낼 수 없다.
 
광복 직후 김구는 오철성에게 임정 간부들을 중국각지에 보내 일본군 소속 한국청년들을 광복군으로 편성하기 위한 것을 비롯해 임정의 환국 준비, 일본군의 항복접수에 필요한 경비로 5,000만원이라는 거금을 차관형식으로 지원해주도록 장개석에게 요청해줄 것을 요청했다. 1945년 8월 29일, 오철성은 김구의 이 요청을 장개석에게 보고하면서 긴급히 답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한 바 있다.
 
장개석이 과연 이 차관을 제공했는지는 그 여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이 문제는 차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놓는다. 아무튼 사료로 확인되지 않은 부분을 제외하고 근거가 분명한 것으로서 매월 정기적으로 지급된 지원금만 해도 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의 지원금은 중국 화폐로 총 3,158만원이었다.
 
이 금액은 같은 기간 국민정부의 재정지출 가운데 특별지출비 총액 7,496만 5,615원의 약 42%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요컨대 1941년 12월부터 약 4년 간 매월 정기적으로 지급한 지원금만 계산해도 국민정부 특별지출비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여기에다 1944년 8월부터 김구를 지원한 ‘특별보조비’, ‘기밀활동비’, 빈민구제비, 중경시 한인 교민의 생활보조금까지 더한다면 아마도 전체 국민정부의 특별지출비에서 최소한 50% 이상은 됐을 것으로 추산된다. 중국 조야에서 공개, 비공개로 한인들에게 제공해준 경제지원을 금전으로 정확하게 산출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일설에 의하면, 유무형의 지원을 모두 화폐로 환산하면 약 15억 원이 됐을 것이라는 추산이 있다. 이 부분은 과거 한 때 우리가 중국(臺灣)에 빚을 졌다는 채무의식 혹은 은혜의식의 근원이었다.

 

중국이 임정을 지원해준 데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공동의 적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협력을 할 필요가 있었고, 약자를 도와주고자 한 정의의식이 결합된 것이었다. 이는 높이 평가돼야 하고, 우리는 고마움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지속적으로 지급된 거액의 지원금은 임정의 힘을 덜어 많은 권속들에게 신산한 고초가 최소화된 생활이 가능하도록 만든, 임정과 중국을 매개한 우의의 상징이었다. 그 한 가운데 대외 투쟁을 고심했을 뿐만 아니라 임정의 살림살이까지 노심초사한 김구의 보이지 않는 숨은 노력이 있었다. (끝)
 
위 글은 광복절 제73주년을 맞이해 백범 김구기념관의 요청으로 계간지로 발행하는 백범회보 제58호에 기고한 것입니다. 백범회보에 실린 본고는 백범김구기념관 홈페이지의 '백범회보보기'에 들어가서 백범회보 제58호를 클릭하면 볼 수 있습니다. 글은 제19쪽부터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