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들 사이의 ‘아저씨’ 호칭, 왜 문제인가?
서상문(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일선 부대 병사들 사이에 타부대 병사들을 “아저씨”로 호칭하는 문제가 여전한 모양이다. ‘전우님’ 또는 ‘○ 상병님’ 등으로 부르도록 교육해오고 있음에도 시정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나이 많은 하급자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란다. 이 호칭이 왜 문제가 될까?
인간은 시공간적으로 언어의 제약을 받는 존재다. 자리가 넉넉한 영화관, 공중화장실 등의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은 한 두 칸씩 떨어져 앉거나 볼 일을 본다. 자기만의 개인적 공간(personal space)을 가지고 싶은 잠재의식의 발로다. 이처럼 대인관계에서 공간적 거리는 사람들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알게 하는 척도다. 더 직접적인 것은 언어적 거리다. 친한 사이엔 말씨가 격식을 떠나 자유롭다. 친한 친구 사이임에도 ‘○씨’라고 부르면 분명 거리감을 느낀다.
언어현상에 철학적 분석을 가한 언어분석철학자들의 주장처럼 언어는 단순히 소리나 문자로 나타내는 의사표현에 그치지 않고 생각의 표출임과 동시에 행동의 양식이다. 인간의 자기표현의 수단인 언어에는 사람들간의 친소관계를 나타내면서 다양하게 굴절된 화자의 심리가 알게 모르게 반영돼 있다. 언어분석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단어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목적으로 쓰이는지 인지하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병사들간의 ‘아저씨’ 호칭은 상대에 대한 예의나 존중을 나타내고자 하는 심리의 반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호칭은 자신과 같은 세대에게 사용해선 안 될 말이다. ‘아저씨’란 부모와 같은 항렬이거나 부모님 연배의 남성을 부르는 호칭이기 때문이다.
예의와 존중으로 포장된 이면에는 서로가 군인이라는 직업어로 상대를 부르지 않음으로써 군의 세계에 더 이상은 연루되고 싶지 않음과 동시에 고유한 자신의 공간을 침범 당하고 싶지 않으려는 심층의지가 자리하고 있다. 대부분이 독자로 자란 병사들의 개인주의성향과 현대 사회의 익명적 집단심리가 적당히 포개진 결과다.
이 현상이 방치되면 세상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윤리적 높낮이마저 죄다 가지런해진다. 사회질서 또한 쉬이 헝클어진다. 선생님을 ‘선생님’이라고 하지 않는다거나 여군에게 ‘아주머니’라고 부를 경우 발생하게 될 상황을 상상해보라. 병사들 사이에도 군인으로서의 동류의식이 옅어지고, 전우애까지 묽게 만들게 된다.
인간은 생각이 언어를 낳기도 하지만 언어를 통해 사유하고, 대상을 인식한다. 공자가 物과 事의 명칭을 바로 부르라고 가르친 이유다. 正名사상이다. 크라틸루스가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 사물도 안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책은 병사들이 자각하도록 일반인과 변별되는 군인정신과 언어교육을 강화할 일이다. 족보를 통해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깨달으면 생면부지의 같은 성씨를 가진 이를 처음 만나도 동질감, 친밀감을 느끼거나 최소한 타자의식은 줄어들듯 군인의 ‘족보’교육으로 병사들에게 군인으로서의 일체감과 동류의식이 지속되게 해야 한다. 그러면 병사들 사이에 넉수그레한 ‘아저씨’는 사라지고 눈부시게 젊은 전우들만 있게 된다. ‘전우’, 말만 들어도 가슴 뭉클하지 않는가!
위 글은 2011년 10 월 7일자 『국방일보』자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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