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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냉소와 침묵 사이, 무너지는 민주주의

雲靜, 仰天 2026. 5. 22. 00:56

지식인의 냉소와 침묵 사이, 무너지는 민주주의


지식인, 학계, 문화계 엘리트는 정치의 직접 행위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의 “언어와 상상력의 틀”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이념, 정당, 세대, 운동의 진영에 완전히 동화돼 불편한 진실이나 내부 모순을 말하지 않게 되는 순간, 그들은 “정교한 선전가”로 변질되고 만다. 이런 류의 인물은 실명을 밝히지 않아도 이미 우리 사회에 한 둘이 아니라는 점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지지하는 이념, 가치와 인물을 선호하되 그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끝까지 지적하는 태도는 민주주의의 유지와 작동에 커다란 안전장치가 된다.


나는 현금 한국정치는 대체로 “다 썩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수준에까지 와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 사실을 두고 반복적으로 냉소를 보내는 건 아니다. 경계선에 선 상태라고 할까? 그 마지막 선을 한 발짝 넘어 썩은 웃음의 냉소를 일상적으로 생산하게 되면, 결과적으로는 극단주의나 강력한 구원자적 욕망을 정당화하는 효과를 갖게 될 것이란 걸 자각하기 때문이다.

지식인 혹은 언론인이나 문화인이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혐오나 냉소로 환원하는 언어”를 퍼뜨릴 때, 민주적 토론의 가능성은 줄어든다는 걸 나는 적어도 지난 30년 가까이 이 나라에서 실증적으로 빈번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지난 세기 독일과 시대상황과 정치적 맥락이 전혀 달라서 수평적이고 단선적 비교가 위험한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지만 한 가지만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점이 있다. 즉 나치에 적극 협력한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정치는 더럽다, 나는 문화와 정신만 말하겠다”며 거리를 둔 이들이 결과적으로 아무런 제동을 걸지 못한 채 전체주의의 확장을 허용하고 만 측면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경우와 관련해서 오래 전 졸고지만 참고 삼아 곁들인다.)
https://suhbeing.tistory.com/m/819


이 관점에서 보면, 한국에서도 “무관심과 냉소”를 고상하게 포장하는 지적 태도는 일정 부분 되돌릴 수 없는, 그야말로 이재명 같은 패악자의 손에 국가 권력을 쥐여주게 되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궁극적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렇다. 즉 모든 제도와 엘리트나 지식인의 책임을 관통하는 것은 결국 유권자의 선택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명료하게 재인식하고, 현재 자신이 어떤 언행을 하고 있는지 점검하자는 것이다. “우리 편이라도 이 선은 넘지 마라!” 유권자가 실제 투표에서 자기 진영의 인물이더라도 민주주의의 기본 선을 넘는 행위(폭력 선동, 노골적 혐오, 제도 파괴)를 한 정치인을 떨어뜨리는 경험을 축적해야 한다.

그런 것들을 상시적으로 못해왔기 때문에 지금 이재명이 권력을 잡게 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 위험 신호가 반복될 때, 지식인, 언론인들도 장기적 비용을 무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불편한 정보’를 찾아보는 습관이 몸에 배어야 할뿐만 아니라 자기 진영의 인물에게 불리한 정보, 듣기 싫은 비판을 의식적으로 찾아보는 소수의 시민이 늘어날수록, 언론, 정치인 및 정당과 지식인의 행태도 달라질 것이다.

결국 “어떤 정치가 가능한가”는, 시민(현재 한국 사회가 근대 서구적 개념에서의 “시민”과 “시민사회”가 형성되어 있는가는 의문이지만!)이 어느 정도의 복잡성과 불편함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런 틀에서 보면, 지금 한국은 분명히 전례 없이 위험하고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할 국면에 처해 있다. 물론, 선택에 따라 위험수준의 상황이 아직 안심 수준의 사회로 되돌릴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다. 이 부분은 1930년대 지식인들과 문화인들의 엄격하지 못했던 묵인과 지지로 히틀러를 출현시킨 독일의 상황과는 거리가 있지만···.

2026. 5. 22. 00:56.
북한산 淸勝齋에서
雲靜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