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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옥희 화가 서양화 작품 유작전 안내

雲靜, 仰天 2026. 5. 18. 20:09

고 김옥희 화가 서양화 작품 유작전 안내


생전에 인물화를 주로 그렸던 고 김옥희 서양화가의 유작전이 오는 6월 17일 15:00시에 오픈해서 6월 23일까지 1주일 간 열린다. 그가 남기고 간 아름다운 유작들을 접할 수 있는 전시 공간은 유수의 갤러리 라메르 화랑(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5길 26 홍익빌딩)이다.

대단히 안타깝게도 한창 작품이 무르익으려고 할 즈음 화룡점정을 찍지 못하고 작고해서 올해 3주기를 맞는 고인의 유작전은 이번이 두 번째다. 작가가 살다간 삶과 예술의 세계 그리고 고인이 남긴 예술적 성취와 의의에 대해선 필자가 정리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첨부해놓은 리플렛에 담겨 있고, 그 작품 평론 글의 원문도 리플렛 아래에 달아놓았다.

여름의 문턱에서, 고인의 삶과 유작들을 감상하면서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음미하는 아름다운 시간을 가져보시길 권한다.

2026. 5. 18. 21:19.
광주 송정역발 서울 용산역행 KTX열차 안에서
雲靜

고 김옥희 4단 리플렛 펼침면.pdf
2.14MB

고 김옥희 화가 유작전에 부쳐 : 성취, 작품세계, 의미


                            서상문(화가, 시인, 역사학자)

고 김옥희 화가의 두 번째 유고전 개최의 의미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가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태어난 후에 자신의 선택과 행동으로 무엇이 될지 결정하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처음부터 정해진 성격이나 목적을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 고 김옥희 화가는 사르트르의 이 언명에 부합한 삶을 살았다.

고인은 집안의 반대로 가고 싶었던 미술대학에 가지 못하고 영문학을 전공하게 됐지만, 화가의 꿈을 버리지 않고 스스로 화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자신을 규정해나간 삶을 살았다.

고인이 생존했다면 올해로 꼭 70세, 고희의 나이다. 타계한지 3주기를 맞아서 이승의 가족과 친지와 지인들이 마음을 모아 고인을 추모하는 유작전을 열었다. 2024년 유고 1주기 때 연 첫 유고전처럼 이번에도 약 45점 내외의 작품들이 전시된다.

고인이 지금까지 남긴 게 총 100여 점이라고 한다. 추상작품은 한 점도 없고 모두 구상화다. 그 중 뎃생이 15점, 유화가 85점 이상이다. 수채화도 있지만 거의 다 유화로서 인물화 일색이다. 풍경화는 유일하게 해변을 그린 1점이 있으며, 정물화는 서너 점에 불과하다. 고인은 특별히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 이유에 대해선 뒤에 가서 짚어볼 참이다.

고인은 긴 세월 동안 잠자던 재능을 표층으로 끄집어 올리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고인의 그림은 여유로운 취미나 여가가 아니라 작품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으로 읽힌다. 따라서 고인의 삶과 예술행위를 지근에서 지켜본 이들에게 유작들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진지하게 신앙과 사랑, 그리고 자기 원칙을 지키며 살았던 한 사람의 인생이 응축된 고인의 자화상이나 다름없다. 고인은 이미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의 문턱을 넘어섰고, 작품도 테크닉보다 가능성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들이어서 남겨진 이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소중하고 애틋한 작품들이다.

이번 유작전은 단지 “그림을 잘 그렸던 한 화가”를 추념하는 자리가 아니다. 젊은 시절 품은 꿈을 접지 않고 끝까지 성실하게 자신을 연마해 간 한 여성의 생애를 기억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관람객들은 캔버스 속 정물과 인물들을 보며, 그 배후의 시간—성실하게 작업실을 오가며 붓을 들었을 고인의 일상, 교회와 가정, 그리고 조용한 기도—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될 것이다. 고인의 유작을 평할 때도 단순히 작품의 완성도만을 기준으로 삼기보다는, 진지한 배움과 긴 성실함 속에서 신앙인으로, 또 생활인으로 살아가면서 그림을 통해 타자를 바라보고 사랑을 실천하려 한, 한 인간의 궤적을 함께 보는 것이 온당하다.

김옥희는 어떤 작가였는가?

화가 김옥희에게 그림은, 예술은 무엇이었을까? 그것들은 그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닌 것이었을까? 또 작업에 임할 때는 어떤 자세였을까? 작업시 자신의 심리적 상태, 창작동기, 미의 이미지 혹은 배우자, 가족과 지인들 얘기 그리고 더 넓게는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인간 세상의 어떤 현실이 자신의 작품에 반영되었을까? 그가 가고 없는 지금, 이 대답은 얻을 수 없다. 아무도 그를 대신해서 답을 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렇다고 의미가 없는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런 물음을 마주하고 답을 찾아봄으로써 고인의 삶과 작가정신, 예술혼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필요한 자문이기도 하다.

작년 가을, 필자는 같은 화가로서 고인의 유작들을 대했다. 당시 참으로 안타까움과 함께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내가 고인의 유작을 모두 다 보고 느낀 점은 이랬다.

첫째, 신앙적이고 윤리적인 삶과 예술이 함께 응축된 화가였다는 점이다.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실천해 온 사랑과 원칙이, 또한 화중 대상인물 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경건한 태도가 과장되지 않은 구도와 색채로 감정이 절제되면서 작품에 표현됐다.

둘째는 기본과 원칙을 중시한 성실한 ‘사실주의자’였다는 점이다.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열의를 갖고 회화작업의 기초를 닦으려 했고, 눈앞의 대상에 대한 관찰과 존중을 바탕으로 사물과 대상인물의 내면세계까지도 그려내려는 화가였다. 단, 과장하고 변형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중시했다. 고인이 기본에 충실하고자 한 사실주의자였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다. 파격과 모험을 시도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이유다.

셋째, 미완의 가능성을 남긴 화가였다는 점이다. 격조 있는 화가에서 ‘자기 세계를 완전히 구축한 화가’로 도약하기 직전에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했다. 미완성된 작품들에는 아쉬운 여백과 가능성이 동시에 남아 있다.

선천적이든, 아니면 후천적으로 어떤 계기나 끌림에 따른 것이든 고인은 그리는 것에 대한 향수, 즉 회화적 관성(pictorial intertia)을 가지고 산 작가였던 것 같다. 그런데 고인은 왜 많은 회화 장르 중에서 하필 어려운 인물화를 선호했을까? 인물화는 풍경화, 정물화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그리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에 어떤 식이든 끌림 없이 그리는 화가는 없다. 그는 인체의 어떤 점에 끌렸을까? 한 마디로, 인간사랑이 원천이었을 것이다. 윤리나 종교적으로 인간존중의 관념과 세밀한 성품이 결합된 작가였기에 미적으로 살아 있는 존재에게서 느끼는 생명감과 인체의 오묘함에 매력을 느끼고 끌렸을 것이다.

회화는 구상과 추상의 큰 가르마로 갈라지면서 풍경화, 정물화, 인물화, 기록화 등등 다양한 장르가 있다. 인물화는 서양 회화사에서 중요한 축을 이룬다. 전후 현대미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전통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미국만 해도 인물화만 가르치는 대학과 학원도 있고, 인물화가들이 적지 않다. 그만큼 시장이 형성돼 있다는 소리다. 경매에서 상당한 고가로 거래되는 회화 작품들 중에는 인물화가 많다. 회화에서 인체 그리기가 가장 어려운 고난도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풍경화나 정물화는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작가가 임의로 변형도 가능하고 약간의 과장을 해도 부자연스럽지 않게 보일 수 있지만 인물화는 다르다. 정직해야 한다. 과장이나 거짓말을 했을 때는 그림에 바로 드러난다. 인체의 해부학적 지식도 필요하다. 물론, 인물화도 추상계열에 들어가면 뭉크의 ‘절규’나 피카소의 ‘우는 소녀’처럼 데포름이 가능하다. 그것은 탄탄한 구상력과 뎃생력이 바탕이 된 후라야 가능하다. 피카소가 큐비즘으로 넘어가기 훨씬 전 아동기에 벌써 미대생 수준의 사실 묘사력을 갖추고 있었듯이 말이다.

무엇보다 인물화 묘사는 세심한 관찰과 뎃생에서 비롯된다. 색조와 재현은 그 다음이다. 미술은 재현과 표현이 본령이다. 조금 진부한 얘기지만, 예술은 대상을 그대로 복사하는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눈과 주관에 따라 재구성되는 ‘표현’(expression)인 것이다. 즉 작가는 감성과 상상력으로 자연의 모든 형상을 자신의 조형 언어로 재배열하고 데포름하는 창조자다. 고인은 미대는 가지 못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국내외에서 꾸준히 작품 연수 및 교육을 받아왔다. 국내에서는 김호걸, 김진호 작가의 화실 워크숍에 참여했고, 미국 뉴욕에서도 제1세대 한국 현대 구상화가 박고석(1917~2002), 천경자(1924~2015)와 ‘드리핑 기법’ 창시로 20세기 현대 미술의 흐름을 바꾼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이 수학한 ‘Art Student League of New York’, ‘National Academy School of Fine Arts’, ‘Grand Central Academy’에서 몇 년에 걸친 연수경험을 가졌다.

고인의 삶과 작품세계

고인의 작품세계와 화풍의 특성은 무엇일까? 나무판자 위에 도구와 호두, 조리도구들이 나란히 놓인 고인의 초기작품인 정물화 유작을 보면 그의 성격과 회화적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우선, 화면구성이 질서정연하다. 도구들은 서로 겹치지 않을 정도로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돼 있고, 나무판자의 수평선, 바닥의 타일격자가 화면 전체의 안정된 구조를 만든다. 이는 우연한 흩어짐이나 파격적 구도보다는 정돈과 질서를 선호한 작가의 내면이 반영된 것 같다. 또 각 사물들은 재질과 무게를 느낄 수 있을 만큼 꼼꼼히 묘사돼 있다. 금속공구의 차가운 광택, 구리 주전자의 따뜻한 색감, 나무 숟가락과 손잡이의 마모된 표면, 호두껍질의 요철, 판자에 새겨진 깊은 나무결이 성실하게 관찰돼 있다. 신학언어로 말하면, 이는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대하지 않는 태도’이자 생활 속 사소한 사물들에 내재된 존엄을 포착하려는 따스한 시선으로 읽을 수 있다.

다만, 고인의 정물작품은 조형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대신, 상징적·서사적 차원으로의 비약은 제한적이었다. 각 사물이 지닌 개별적인 얘기가 화면 안에서 서로 충돌하거나, 예상치 못한 의미를 묘출하는 지점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 정물 유작들은 고인의 초기 작품으로서 변칙보다는 교본적인 길을 성실히 걷는 유형의 회화이지만, 그의 회화적 태도를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즉 고인의 작품에는 ‘함부로 손대지 않는 경건함’, ‘고결함’이 있다. 평범한 물건들일지라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신성한 예술세계의 일부라는 인식이 엿보인다. 색채가 과장되지 않고 왜곡도 전혀 없으며, 묵묵히 관찰하고 조심스레 붓을 드는 태도가 화면 전체에 배어 있다.

이러한 특징은 고인이 주력한 인물화에도 드러난다. 이는 신앙인으로서의 윤리감각이 회화적 조형언어로 전이된 결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인물화들은 인물들이 조각상처럼 고정되어 운동감이 없어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입체감을 느끼게 하는 묘사가 돋보인다. 그 만큼 해부학적 구조나 덩어리(mass)의 표현이 튼실하다는 얘기다. 균형감각과 비례감각도 상당하다. 화면 전체에 약간 무겁고 투명한 정적이 흐름을 느끼게 하지만 색을 입히는 착색에서도 감각이 있고, 또 그려진 대상이 지니는 이미지와 느낌을 표현하는 인상파적인 재현력도 발달해 있다.

작품에 나온 인물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띈다. 대부분 서양인들이라는 점, 무표정, 침울한 표정이거나 웃음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웃거나 밝은 표정을 하고 있는 이는 거의 없다. 경건함이 배어 있다. 그들은 아마도 고인이 체류한 뉴욕 사람들일 것이다. 이 출발점은 고인의 작품에 특유의 분위기를 생성시켰다. 제도적인 미술교육을 받은 화가가 흔히 거치는, 석고상의 기초 데생, 색채학, 조형론을 장기간 반복하는 과정 대신, 고인은 곧바로 ‘살아 있는 사람들과 사물’을 마주하며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인의 그림은 이론이나 양식의 모범을 좇기보다 눈앞의 대상을 정직하게 마주 보는 데서 시작되는 ‘사실주의’였다.

피부색, 머리카락, 문화가 다른 다양한 인종적, 문화적 배경의 사람들을 향한 호기심과 존중을 보여준다는 점도 간취된다. 서양인, 흑인 모델들을 그리면서 고인은 그들을 장식적인 소재로 소비하기보다 눈앞의 한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서 모두 동일한 이웃으로 바라보려 했던 것처럼 감지된다. 이는 신앙인으로서 이웃과 타자에게 마음을 연 ‘열린 자세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푼 그의 삶과, 타자에 대한 존중이 느껴지는 화면 분위기는 안과 밖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곱슬머리의 ‘아프로 헤어’(Afro-American)를 한 젊은 흑인 여성, 나이든 서양 여성의 상반신 초상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흑인 여성의 인물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풍성한 머리카락의 부피감과 질감이다. 개별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그리기보다는 큰 덩어리로 보면서 작은 붓질을 반복해서 실제 머리의 무게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피부톤과 목걸이, 옷의 끈은 대체로 절제된 색으로 처리하여 머리라는 하나의 특징이 화면을 지배하게 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이는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관람자의 정면에 마주 세워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미술의 정면성 원리가 응용된 것이다. 이것은 초상화의 정통적인 접근방식과 맞닿아 있다. 즉 특징적인 요소 하나를 강조하여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되, 과도한 장식은 피하는 것이다. 색을 과장하지 않고, 제한된 톤 안에서 화면전체를 차분하게 통일시킨 감각을 보면, 회화적 감수성을 짙게 느낄 수 있다. 구도와 색채 두 방면에서도 안정적인 느낌을 주지만, 과감한 변주나 파격이 적다는 점과도 상통한다.

실제로 고인은 ‘회화적 실험’이나 ‘형식의 파괴’와 같은 시도에는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고인이 작품 활동을 더 이어갔다 하더라도 ‘파격적이거나 변칙적인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인물화는 ‘닮음’보다 ‘느낌’을 재현하는 것이 ‘표현’이자 작품으로서의 요체다. 고대 서양 회화이론서를 남긴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가 말한 대로 화가는 인체의 모든 움직임을 알아야 하며,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미세한 마음의 변화를 몸의 움직임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고인도 이 점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이는 특히 미국 연수시 미국 현대미술에서 드문 “전통적 리얼리즘 계열” 작가로 평가 받는 하비 디너스틴(Harvey Dinnerstein, 1928~2022)의 영향을 받으면서 확고해졌다고 한다. 즉 탄탄한 소묘를 기반으로 한 사실적 묘사’를 하면서도 ‘인물의 내면세계를 담아내는 표현’이 중요함을 자주 강조했었다고 한다.

만약 고인에게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구조, 색채, 인물의 내면적 심리를 한층 더 깊이 ‘표현’해내는 단계로 진입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고 김옥희 작가의 작품세계의 다음 과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인은 탄탄한 기초 위에서 신앙, 타자, 노년과 젊음, 일상의 사물들을 서로 엮어 내는 서사적, 표현적 회화로 나아갔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의 작품들을 발판 삼아 더 깊은 인물 묘사로 나아가서 결국은 ‘늦게 피었지만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화가’라는 입지를 구축했을 것이다. 이를 입증하는 예로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고인은 화가로서 성실하고 인간에 대한 긍휼의 자세가 체화된 삶을 산 예술가였다. 화가는 무엇보다 먼저 훌륭한 사람이어야 하고 교양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한 알베르티의 말대로 예술가는 도덕성에 신경을 쓰며, 특히 예의 바르고 상냥한 태도를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운 존재이기도 함과 동시에 책임도 져야 하는 존재인데, 고인은 스스로 선택한 화가의 길에 접어든 이상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득하게 의욕적으로 창작에 임했을 것이다.

둘째, 인물 화가로서 갖춰야 할 인체의 이해력, 즉 뎃생력이 상당한 수준급이다. 인체의 지체를 제대로 잘 표현한다는 것은 탁월한 화가의 징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고인의 유작에서 정물을 구성하는 도구들이나 두 인물의 대비(젊음과 노년, 흑발과 백발)는 이미 어떤 스토리를 암시하지만, 상징과 재현의 조화를 더 밀어붙였다면, 틀림없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표현과 서사가 나왔을 것이다.

셋째, 튼튼한 묘사력이 갖춰져 있다. 인물화 유작들에서 보이는 인체의 가느다란 어깨, 목 주변의 미세한 주름, 손등과 손가락의 관절이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되어, 이 작품들에서도 인체에 대한 관찰력이 드러난다. 특히 손가락을 관자놀이 근처에 올린 자세는, 단순한 포즈가 아니라 사색·기억·침묵 등을 암시하는 몸짓이기도 하다. 또한 약간 비현실적인 빛의 사용, 그리고 차분하고 절제된 색조를 통해 관객에게 묘한 소외감과 명상적인 느낌을 주는 것에서 입증된다.

전체적으로 유작들에는 미국 화단에서 인물·초상화의 소묘력이 매우 뛰어나며 인체 구조와 표정 묘사가 정밀하기로 유명한 하비 디너스틴 교수의 작품 경향과 함께 인체의 표정과 색감에서 오묘한 玄의 세계가 엿보인다. 여기에는 디너스틴의 탄탄한 인체 드로잉과 낮게 깔린 색조가 오버랩 되는 느낌이다. 玄의 세계란 질박하게 말해서 도덕경의 핵심 개념인 道의 심층적 상태인 ‘玄’의 깊고 아득한 그런 분위기를 감지시킬 수 있는 느낌의 회화적 현현이다. 이는 김진호 작가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고인은 화가 수업과정에서 인물화 분야에 일가를 이룬 김진호 작가로부터 ‘玄사상’과 해부학, 색채학 강의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유작들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고인이 화가로서 활동하면서 남긴 작품들은 ‘꿈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지를 보여 주는 귀한 증언이다. 고인의 유고로 작품세계의 가능성이 멈춰 버린 듯하지만, 전부 상실된 게 아니다. 그 가능성은 지금, 유작을 지켜보는 유족들의 마음속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시회를 연다는 것은 한 사람의 미완의 여정을 애정과 존중으로 마주하는 행위다. 캔버스마다 스며있는 고인의 기도 그리고 가족과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세상과 나누려는 의지 자체가 큰 유산으로서 그가 남겨 놓은 ‘사랑의 지속’이다.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 각 분야에서 뭔가를 남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人死遺名 虎死遺皮)”라고 하듯이 인생의 흔적 남기기는 인간의 욕구 중 하나다. 고 김옥희 화가는 작품을 남겼다. 당연한 얘기지만, 예술작품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이 이야기했듯이, 자연적인 산물이 아니고 작가의 창작활동을 통해서 생산된다. 고인은 일상생활상의 ‘레디메이드’를 남긴 게 아니라 예술행위임을 의식하면서 빚어낸 빛나는 작품들을 남기고 갔다. 그의 유작들은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이 대량생산과 상업주의와 몰개성의 현대 자본주의를 비웃듯 실크스크린으로 이미지를 마구 찍어낸 ‘마랄린 먼로’나 ‘코카콜라’가 아니다.

남은 이들에게 고인의 유작들은 한 사람이 일관되게 자신의 재능을 좇아 얼마나 진지하게 몰두했는지 증언하는 삶의 기록이다. ‘제도권의 정규 미술교육을 거치지 않고도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한 화가’, ‘한시도 멈추지 않았던 지난한 성장의 발자취’임을 알면, 하나의 아름다운 인생서사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살아 있었다면, 분명 더 깊이 들어갔을 그 길을, 이제는 유족과 지인들과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이어 가주시리라 믿는다. 이번 전시가 고인의 삶과 신앙 그리고 늦게 피어난 예술혼을 따뜻하게 기리는 자리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유족 분들께는 이 전시가 옛 추억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면서도 동시에 깊은 위로의 시간이 되기를 앙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