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공유/문학 미술 영화 평론

소동파(蘇東坡)와 근대 이전 한국의 지식인

雲靜, 仰天 2026. 4. 5. 14:03

소동파(蘇東坡)와 근대 이전 한국의 지식인


한국은 전근대 시대 한동안 중국의 번속국이었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선진 문물 외에 정치 사상적으로도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려 말 송나라에서 들어온 주자학이 대표적이다. 그런 영향은 사람과 문물을 통해서였다. 물론, 유교와 선불교처럼 영향을 받아서 원사상을 수정하거나 새로이 한국적인 것으로 발전시킨 경우도 없지 않았다.

근대 이전 중국의 지식인 중에 한국 지식계에 사상적, 문화적 영향을 미친 사람은 한 둘이 아니다. 그 가운데 어떻게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있을까? 정확한 평가가 될 순 없지만, 현대 중국사에서 통시적으로 많은 명사들의 평가를 받는 인물을 고르면 그를 표준으로 삼아서 미진하나마 추론해볼 수 있다.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로는 공자, 맹자, 노자와 장자 그리고 주희가 단연 톱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만 평가된 경우인데다 지금까지 이들에 대해선 너무나 많은 평가가 있어 왔다. 그것보다는 사상가 외에 문학가이면서 사상가인 인물들 중에 사람을 고르면 좋을 것 같은데 이들 중엔 어떤 인물이 적당할까?

오늘은 중국의 사상가이자 대문장가였던 蘇東坡(1036~1101)를 표본으로 삼아서 그가 고려와 조선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를 대략적으로 가늠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중국 역사 속에서 소동파가 어떻게 평가되었는지 그의 사상적, 문학적 위치를 개략적으로 알아 보고 이어서 고려, 조선의 문인 지식인들이 그를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였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소동파의 많지 않은 초상화 중의 하나로 보인다.

역대 중국인들의 소동파에 대한 인물평은 어떠했을까? 먼저 소동파와 동시대를 산 왕안석(王安石, 1021~1086)부터 보자. 그는 동파의 정치적 입장과 비판적 태도에 불만을 갖고 있던 입장이었다. 특히 자신의 新法을 반대한 소동파의 논리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한마디로 왕안석은 개혁을 외쳤지만 동파는 그의 개혁 자체를 반대하진 않았지만 그 방법과 수단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한 보수주의자였다. 그렇지만 그는 소동파를 전면 부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문장에 대해선 높이 평가했다. 왕안석은 “소식의 문장은 스스로 한 유파를 이룬다”(“蘇軾文章, 自成一家”)고 말했다. 정치적으로 입장이 다르거나 반대입장에 있으면 학문과 정치적 사안을 분리하지 않고 모조리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심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이나 오늘날의 한국인과는 아주 다른 대인적 풍모였다.

소동파보다 약 1세기 늦게 태어난 주희(朱熹, 1130~1200)는 동파 비판자들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비판적 평가자”였다. 그는 “소식의 학문은 잡되다”(“蘇軾之學雜”)고 하면서도 “그의 글은 높지만 도에는 순수하지 못하다”(“其文雖高, 而於道未純”)라고 했으니 사상은 잡스럽다고 혹평했지만 문장력만큼은 인정한 것이다. 좋게 보면 주희 역시 왕안석처럼 문장과 도학을 분리해서 평가한 셈이다.

주희가 소동파에 대해 사상적으로 비판을 날을 세운 건 그가 유학자이면서도 불교, 도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소동파는 유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에 通儒로 불렸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디에서든 한 사람의 능력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발휘하게 되면 그를 시기하거나 험담하는 이들이 많다. 주희도 유교가 절대적인  지선의 사상이라고 본 자기의 입장에서만 소동파를 본 것 같다. 유교 학자가 불교와 도교를 도교를 알고 건드리면 왜 안 되는가?

주자학의 개창자로서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주희. 조선의 문인 사대부의 유교 사상은 대부분 그의 이론에 기원을 두고 있다.

반면, 명대의 문인이자 사학자였던 왕세정(王世貞, 1526~1590)은 문학자여서 그랬던지 문학을 중심으로 소동파를 평가했는데 그를 극찬했다. “동파는 천고의 대문장가이다”(“東坡, 千古文章大家”)라거나 문장이 “호방함의 극치”(“豪放之極”)라고 평했다. 즉 그는 송대 이후의 문학사 정리 과정에서 소동파를 “문장의 정점”으로 위치시켰던 것이다. 도학적 비판에서 벗어나 문학 중심의 재평가가 이뤄졌다고 한다.

20세기 중화민국 시대에 들어와선 소동파를 평가한 사회적 명사들 중에는 임어당(林語堂, 1895~1976)의 소동파 평가가 대표적이다. 그는 소동파의 삶과 사상을 소개하기 위해『蘇東坡傳』(최초는 그가 미국에 체류하면서 영어로 쓴 저서였음)까지 쓴 소동파 전문가였다. 그는 “소동파는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蘇東坡是中國人最可愛的人之一”)라고 평했다. 이는 임어당이 소동파의 유머, 낙천성, 인간미에 주목하고 강조하면서 그를 정치가, 시인, 철학자라는 학문의 영역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종합적 인물상으로 새로 조명한 평가였다. 즉 소동파가 “완전한 인간형”으로 재해석된 것이다.

현대 중공 지도자 모택동(毛澤東, 1893~1976)도 소동파의 문학 작품을 매우 좋아했다. 특히 소동파의 '念奴嬌·赤壁懷古'를 상찬했고 “소식의 詞는 기세가 호방하다”(“蘇軾詞, 氣勢豪放”)고 평했는데 혁명가인 그가 꼴통 보수주의자로 보일 수 있는 소동파를 이렇게 평가했다니 조금 의아스럽다. 아마도 모택동은 공산혁명의 관점에서 혁명적 기상과 연결하여 그를 호방파(豪放派)의 대표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공산주의자였던 등소평(1904~1997)은 소동파에 대해 직접적으로 내린 평가는 없었다. 그러나 1979년 개혁개방 이후 그는 소동파를 “중화 문화의 대표 인물”로 공식적으로 자리매김했다. 등소평 사거 이후 중공에서는 하드웨어와 함께 소프트웨어도 개발해서 문화적으로 세계를 공략하기 위해서 중국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많이 소환하는 일이 시작됐다. 공자가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 뒤 세계의 도처에 공자 학당이 세워지는 역사적 배경이다.

사상적으로 양명학의 시조이자 심학(心學)의 대성자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을 가장 좋아했던 장개석(蔣介石, 1887~1975)도 소동파에 대해서 직접적이고 체계적으로 논평한 경우는 적었지만 고전 교양 속에서 그를 높이 평가했다. 장개석은 특히 소동파의 인격, 절개, 문장에 대해 모두 긍정적으로 봤다.

이렇듯 소동파는 중국에서 시대마다 “문제적 인물”로 문학의 거장이라는 평가가 주류를 이뤘고 현대에 들어와선 중국을 대표하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재해석된 인물이다.

그러면 이런 소동파에 대해서 고려와 조선의 문인, 지식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며 인식하고, 평가했을까?

東坡는 고의 호이고 성과 본명은 蘇軾이다. 소동파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굳이 다시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필자가 이미 이전에 그에 관해 써놓은 잡글이 몇 편이 있어 필요하면 그걸 보면 된다. 다만, 소동파에 대해서 전혀 모르거나 나의 이전 글들을 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서 한두 마디로 인물소개의 핵심만 다시 언급하겠다.

소동파는 11세기 북송의 문인으로 부친 소순(蘇洵, 1009~1066), 동생 소철(蘇轍, 1039~1112)과 함께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었다. 학문적으로는 동생과 함께 '촉학'(蜀學)이라고 불린 학문을 형성하였으며, 사상적으로 유불도 간의 조화를 추구한 특징이 있다. 촉학이란 소동파가 태어난 사천(四川)지역에서 활동한 학자들의 학문 경향, 즉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개성과 창의성을 중시했는데 소동파 3부자가 이를 주도했다.

정치적으론 소동파는 당시 新法으로 대대적인 국가개혁을 주창한 왕안석과 시시비비가 있었고, 학문적으로는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 형제가 주도한 '낙학파'(洛學派)와 대립했다. 낙학파란 인간 본성이 곧 理라는 理 중심 철학체계인 성즉리(性卽理)의 입장에서 거경궁리(居敬窮理)라는 수양 방법을 추구한 사상적 일파였다. 그들은 “천리(天理)가 만물과 인간의 근본”이라며 우주의 근본 원리인 理가 인간의 본성에도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욕망보다 천리를 우선시한 도덕 중심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경향이라면 자연스레 자유주의적 학문성향의 소동파와 대립될 수밖에 없었다.

소동파는 문인, 시인, 정치인, 행정가로서 당대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인물이었다. 그의 명성이 형성된 데는 그가 기발한 착상을 자주해서 기인 비슷한 행각을 보인 것도 한몫했다. 동파거사가 산 행적을 보면 그는 보통의 범인들을 넘어서는 독특한 면모가 보이기는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정말 상식에 어긋나는 기괴한 기이의 행위였기 때문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생각도 못하는 아이디어와 상식을 뛰어넘는 기지들 때문에 기인이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관한 구체적인 예들은 여기선 생략하고 다른 글에서 자세하게 얘기할 생각이다.

아무튼 소동파는 조선시대 문인, 지식인들에게 공자 다음으로 가장 많이, 가장 폭넓게 영향을 미친 중국인들 중에선 아마도 최고의 인물일 것이다. 한국 역사 인물 중에 어떤 사람들이 소동파를 좋아했을까? 이 문제를 짚어 보는 건 상당히 흥미로운 과제다. 이 문제 하나만 추적해도 박사논문 너댓 편이 나올 것이다. 나는 관련 자료를 모두 다 섭렵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동파가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인, 지식인들에게 미친 그의 영향을 개략적으로 소개해서 전체적으로 감을 잡도록 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먼저, 송나라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고려시대 인물들 중엔 뇌천(雷川) 김부식(金富軾, 1075~1151) 부자를 꼽을 수 있다. 김부식은 고려의 문신이자 역사학자였는데, 그의 정신세계에 소동파의 작품 및 시문학적 영향이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김부식의 여러 시문에서 소동파의 풍월 시풍과 문체를 반영한 흔적이 있다. 그의 부친 김근(金覲, ? ~ ?)도 소동파를 흠모했는데 심지어 그는 소동파 형제의 이름 중 한 자씩을 따서 두 아들의 이름을 김부식(동파의 이름 소식의 軾), 김부철(동파 동생 이름 소철의 轍)이라 이름을 지었을 정도였다.

소동파는 동시대 고려 조정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경전, 역사서, 제도와 과거와 관련된 전적들과 같은 도서를 제공해 주라고 한 것에 대해서 황제에게 반대한 상소를 여러 번 반복해서 올렸는데 김부식 부자는 이 사실을 알았을까? 특히 동파가 고려에 대해 좋지 않은 인식을 가지고 부정적인 입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렇게 이름까지 흉내냈을까? 그들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그랬다면 견문이 좁았던 셈이다. 이 점은 학술이나 정보의 소통이 제한적이었던 12세기 당시 상황에선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반면, 알고도 그랬다면 그것은 정말 대인이나 호인이어서 그랬던지 아니면 민족의식이 없어서 그랬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김부식 같은 역사학자 외에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들이었던 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 1169~1241)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 그리고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8~1367)도 소동파 시문의 향기를 되새기며 문학적 자양분을 받아들인 인물들이었다.

이규보는 소동파 시문에 대한 찬탄과 흠모를 여러 곳에서 드러냈다. 그가 소동파의 서정과 서사적 기법을 모방해서 지은 대표적 글로는「東京雜記」, 「白光面」 등이 있다. 동경잡기는 고려 고종 연간(13세기 초, 대략 1210년대 전후)에 창작된 후 그의 사후 문집 『東國李相國集』 등에 수록되어 현잽가지 전승돼오고 있다. 백광면 역시 고려 고종대 (13세기 전반)『동국이상국집』에 수록돼 전해지고 있다.

이규보는 동경잡기에서 직접 소동파를 찬양하기보다 그의 문체를 모방하는 가운데 평가가 드러나는 유형이지만, 그의 글 속에 “東坡之筆, 縱橫變化, 非常人所及”라는 대목이 나온다. “동파의 붓은 종횡으로 변화하여 보통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또한 이규보 문집 전반에서 반복되는 표현으로는 “蘇子之文, 可以驚世”, 즉 “소자(소동파)의 글은 가히 세상을 놀라게 한다”는 대목도 있다.

이제현과 이색도 이규보와 함께 소동파의 산문과 시문에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문학적 기초로 삼은 인물이다.

소동파가 이제현에게 미친 영향은 크게 문체, 문학관, 현실 인식과 역사 의식 등 세 영역으로 나눠서 고찰해볼 수 있다. 문체의 영향은 서사, 논변, 서정의 결합이다. 이제현의 산문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이야기(서사), 감정(서정), 논리(논변)가 함께 들어가 있다. 이는 전형적인 소동파식 구조다. 특징은 기행문·잡기류에서 감상과 역사 해석을 결합하고, 단순히 사실을 서술하는 수준을 넘어서 “의미를 해석하는 글”이었다. 이는 소동파의 대표적 산문 가사인 詞 赤壁賦 계열의 영향과 유사하다. 적벽부는 소동파가 1082년에 첫 번째 귀양을 갔을 때 쓴 작품인데 음력 7월에 지은 것과 10월에 쓴 두 가지가 전한다. 이 중에 한국 음악에 수용된 적벽부는 7월에 지은 전적벽부라고 한다.

중국 미술계에서 문징명(文徵明) 혹은 명대 오파(吳派) 문인화 계열의 화풍으로 추정되는 적벽도. 확언은 할 수 없지만 이 작품이 문징명의 작품일 것이라고 추정되는 이유는 오파(吳派) 문인화의 전형적 양식에 속하기 때문이다. 소동파의 赤壁賦 장면을 시각화한 작품은 부지기수다. 적벽도는 매우 인기 있는 주제라서 수많은 문인, 묵객들이 소동파의 적벽부를 그렸다. 그래서 같은 이름의 작품이 너무 많고 위작도 많다. 이 그림은 소동파의 赤壁賦 장면을 시각화한 것으로, 작은 배, 강 위의 유람, 광대한 자연을 통해 “인간의 유한함 vs 자연의 무한함”이라는 적벽부의 핵심 사상을 표현한 것이다. 황갈색 바탕 위에 먹으로 그린 이 담채 산수화는 넓은 여백을 안개 낀 듯한 공간으로 처리한 문인화 특유의 서정적·관조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림 하단의 작은 배 위 인물들은 적벽부의 주인공들로서 소동파 일행이다.

둘째, 문학관에서 보면 이제현은 소동파의 정신을 모방하여 “문장은 옛 것을 따르되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야 한다”(自成一家)는 입장을 취했다. 이것은 소동파의 핵심 정신이다. 동파는 당·송 이전 문학 전통을 단순히 모방하지 않고 자신만의 문체(호방·서사·철학 결합)를 확립했다. 즉 그는 “模倣을 넘어서 자기 세계를 구축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제현 역시 소동파를 학습하고 그의 문체를 모방했지만 단순 답습에 머물지 않고 고려의 현실과 역사 인식 속에서 자기 식의 글쓰기를 시도했다.

셋째, 현실 인식과 역사 의식 면에선 이제현은 소동파의 영향을 받아 역사·인물 평가에서 유연하고 입체적 시각을 견지해야 한다고 보고 도덕적 교조주의보다 인간적 이해를 강조했다.

이제현은 소동파를 뛰어난 문장가이자 학자로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문학에 나타나는 유연하고 입체적인 인간·역사 인식을 일정 부분 수용하였다. 그는 소동파를 정치적 부침 속에서도 인간과 역사에 대한 복합적 시선을 유지한 인물로 평가했다.

목은 이색은 이제현보다 더 성리학적 색채가 강했지만, 그럼에도 소동파로부터 받은 영향은 분명했다. 목은 역시 문장관과 표현 방식 양면에서 영향을 받았다. 예컨대 목은은 “文과 道의 긴장”을 중시했는데 그는 기본적으로 道를 중시하면서도 문장 자체의 가치도 인정했다. 이 지점에서 소동파의 영향을 받아서 그의 문장이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이색의 사유를 담는 그릇으로 기능했다.

또한 역사 의식 면에서도 목은은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글에서도 논설 중간에 서정적 감흥을 삽입하고 자연과 인생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눈에 띈다. 이는 소동파의 “철학적 산문” 계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목은은 주자학 수용자이면서도 소동파에 대해선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았다. 즉 그는 소동파적 자유로움과 성리학적 규범이 혼재된 절충적 태도를 보였다.

송나라의 태학에 유학해서 학문을 쌓고, 귀국한 후 국자감(國子監)의 최고 책임자(장관급 교육 책임자)인 국자제주(國子祭酒), 한림학사 등 국학 관련 관직을 맡아 본 권적(權適, 1094~1147)은 소동파의 문장을 “천고의 꽃다운 명망”이라 칭하며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이들 외에 여타 고려 지식인들 중 특히 과거 합격자들이 소동파의 시와 사를 즐겨 읽으며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 문인들이 이러했다면 고려조를 주저 앉히고 들어선 조선시대 문인들은 어떠했을까? 조선시대 문인, 지식인들 중에는 퇴계 이황(1502~1571)과 우암 송시열(1607~1789),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대표적인 소동파에 대한 긍정 평가자들이었다. 추사는 아예 동파거사의 매니아였다.

퇴계는 소동파를 문학적 스승으로 존경했다. 그는 소동파의 시문학을 인정하고 그의 문학성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명문들을 읊었다고 하는데 퇴계의 시문과 사상에 소동파 사상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퇴계는 소동파를 문장가로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성리학적 도학자로는 비판하는 입장이었다. 예컨대 “蘇軾之文, 雄健豪放, 可謂一代之傑”(“소식의 글은 웅건하고 호방하여 한 시대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라든가 “然其學未純於道”(“그러나 그 학문은 도에 순수하지 못하다”)와 같은 언술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러한 평가의 편린들이 『退溪集』에 서간문이나 잡저(논변류)의 형태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아마도 퇴계는 위에서 필자가 얘기한 바 있듯이 “宋明理學”(성리학)의 원조 주희가 소동파에 대해 “그의 글은 높으나 도에는 순수하지 못하다”라거나 “소식의 학문은 잡됨이 많다”라고 한 평가가 그 후 조선의 문인, 지식인들이 대부분 소동파를 “문장은 뛰어나나 도는 부족”하다고 평가한 프레임의 출발점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가 하면 우암 역시 소동파를 사상적으로는 이단이라 비판했지만 문장가로서의 뛰어남은 인정했다. 그는 주자학적 입장에서 소동파를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소동파가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에 대해 문제 삼았다. 예컨대 “蘇軾之文雖工, 而害道甚矣”(“소식의 문장은 비록 뛰어나나 도를 해침이 심하다”)거나 “學者不可不辨蘇氏之失”(“학자는 소씨의 잘못을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경계했다. 이는『尤庵集』의 경학 논변 및 서간에 나와 있다.

예문관검열, 설서(說書), 부교리 등을 역임한 서암(恕菴) 신정하(申靖夏, 1680~1715)는 소동파의 풍류를 본받아 작품을 창작하면서 동파를 사모하며 그의 풍류를 닮으려 했다고 한다. 서암의 여러 시문에서 소동파의 정취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 등 조선 중기의 문인들도 소동파 문학을 신의 경지에 이른 작품으로 극찬했다.

조식, 이황의 제자로서 남인과 북인의 정신적 지주이자 이론적 지주였던 한강은 경학을 비롯하여 산수부터 풍수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서예에도 뛰어난 인물이다. 그는 평생 주자의 가르침 대로 살고자 하여 주변을 주자의 고향과 비슷하게 만들었고, 철저하고 엄격하게 주자가례대로 생활했다고 한다.

한강 정구는 소동파의 산문 적벽부를 높이 평가하며 자신의 여러 시문에서 소동파 문체와 주제를 차용하여 표현했다. 그 역시 문장은 인정하되, 학문과 사상은 잡학이나 잡동사니여서 별 볼일 없다는 식의 부정적 평가를 내렸다. 예를 들면 “蘇子之文, 變化無窮”(“소자의 글은 변화가 무궁하다”), “然其學多雜”(“그러나 그 학문은 잡됨이 많다”)고 했다. 주희와 퇴계의 전철을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상촌 신흠은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의 4대 문장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예조판서와 좌.우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낸 그는 소동파의 문장을 중심으로 긍정 평가한 대표적 인물인데, 조선 한문학에서 소동파 계열의 문체를 계승한 인물로도 평가되고 있다.『象村集』의 문론 및 서문류에서 “東坡文章, 出入變化, 不可測度”(“동파의 문장은 출입과 변화가 헤아릴 수 없다”)거나 “後學莫不宗之”(“후학들이 모두 그를 종(宗)으로 삼는다”)류의 언급이 대표적이다.

추사 김정희 역시 소동파의 재림으로 칭송되며, 서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추사는 특히 소동파의 서화 예술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서예 작품과 시문 모두에서 소동파의 특색과 정신을 구현하려고 했다. 그는 사상적으로 소동파를 문장·서예·예술 전반에서 깊이 존숭하면서 자신을 북송 문인 문화의 계승자로 자임하기까지 했다. 예컨대 “東坡先生, 千古第一流人物”(“동파 선생은 천고의 제일류 인물이다”), “學書當學東坡”(“학문과 글씨는 마땅히 동파를 배워야 한다”)고 했으니 요즘 말로 완전히 동파에게 뻑 간 셈이다. 이러한 언설들은 그의『완당집(阮堂集)』서간문 및 제문, 서화 관련 글에 나온다.

이처럼 고려와 조선의 많은 유학자, 문인들이 소동파의 시와 산문에 크게 배웠고, 사상에도 부정하는 식이었지만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소동파의 문학은 근대 이전 조선의 학문과 예술, 사상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현재 이에 대한 실증적인 예들은 중문학과 한문학 등의 각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소동파는 한국의 역사와 사상사 속에서 문학적 영감과 사상적 자양분으로 널리 수용되었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깊이 들어와 있었다. 문인들이 소동파의 시문학적 기법, 사상, 문장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신들만의 작품 세계에 녹여내며 그 영향력을 후대까지 전승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와 조선 양대의 내로다 하는 문인 지식인들은 사상적으로 소동파의 아류인가? 사상적으로는 결코 아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사상은 조선조에 와서는 부정되거나 사갈시된 것이 주류였다. 다만 그의 문장과 시는 고려와 조선을 통털어 인정 받았다.

고려 후기 지식인들에게 소동파의 의미는 단순히 “중국 문인”이 아니라 “문장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는 방법을 제시한 모델”이자 “개성과 자유를 가진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고려조의 문인, 지식인들에게 소동파의 영향은 단순한 “문장 모방” 수준이 아니라, 문학관, 사유방식, 지식인의 삶의 태도까지 포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특히 이제현, 이색을 중심으로 보면 그 성격이 꽤 뚜렷하게 드러난다. 앞서 보았듯이 이규보 등 고려의 문인들은 거의 전면적으로 그를 찬양했다. 고려의 지식인들은 소동파를 “문장의 종장(宗匠)이자 자유로운 지식인의 전형”으로 받아들였인 것이 전체적인 특징이었다.

조선조의 문인, 지식인의 소동파 인식은 크게 두 갈래였다. 이황, 송시열, 정구 등 성리학 계열의 문인 학자들에겐 소동파를 보는 기준이 “도(道)에 맞는가”였는데 “문장은 뛰어나나 학문은 불순”하다고 평가했다. 반면, 신흠, 김정희 등 문장·예술 계열의 인물들은 소동파의 “표현력과 창조성”에 주목해서 동파를 “천고의 대문장가”로 추종했다.

대체로 조선 초기에서 중기엔 소동파의 문장은 인정하면서도 도학은 비판하였다면, 조선 후기에는 추사가 그랬던 것처럼 다시 소동파의 예술세계에 대해 재평가하는 경향이 주류였다.

지금까지 위에서 내가 길게 논급한 고려후기와 조선의 역사 인물들은 모두 같은 성리학을 받아들인 문인, 학자, 지식인들이었지만 소동파를 보는 입장이 달랐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도 같은 수 없었다. 고려는 송나라를 추숭했지만, 조선은 고려를 부정하고 명을 “上國”으로 받들어 들어선 왕조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역사적으로 명과 대립적인 송을 긍정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그들의 소동파 인식 내지 평가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고려와 조선의 문인, 지식인들은 소동파를 있는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체제 속에서 ‘선택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한편, 여담으로 소동파는 고려 자체를 증오했다기보다는 고려의 정책이 자국 송나라와 맞지 않았기 때문에 가진 불만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신흥국으로 떠오른 요나라와 대치하면서 요나라 위협을 받고 있는 북송의 지식인이었던 소동파의 입장에서는 고려가 뒤에서 요를 압박하는 식으로 협조해주면 좋을 터인데 고려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것이었다.

국제 정세를 읽은 소동파의 고려 인식 내지 고려관이 어떻든간에 소동파는 문장에서부터 詩文과 사상에 이르기까지 고려와 조선 2대에 걸쳐 수많은 문인, 지식인들에게 귀감이 된 인물이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평가는 부정적인 평가보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우세하다.

이러한 영향은 오늘날 21세기의 현대에 와서도 지속되고 있다. 현재도 한국의 많은 중국 文史哲 전공자들이 소동파의 사상, 문장과 시를 연구하고 있으니까! 죽어서 이런 복을 누리는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2026. 4. 5. 14:03.
일산 향동에서
雲靜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