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자작시

어느 경로(敬老) 대상자의 일갈 : 호칭이라는 성벽

雲靜, 仰天 2026. 3. 23. 06:19

어느 경로(敬老) 대상자의 일갈 : 호칭이라는 성벽


“늙은이들이 제정신인가?”
뉴스 화면을 찢고 날아온 이 일갈은 위선의 성벽을 타격하는 공성추다. “그 집안은 아버지 보고도 늙은이라고 그러는가?”라며 해묵은 효(孝)의 방패를 치켜들고 훈수질을 시작할 때, 사과로 고개를 숙인 그를 대신해 나는 입가에 헛미소를 머금고 되물어주고 싶다.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니까!”

사적인 핏줄의 예법을 공적 광장의 방탄복으로 가로채 휘두르는 노회함. 그들에게 '늙음'은 지혜의 훈장이 아니라, 어떤 비판도 통과시키지 않는 무적의 갑옷이 되어버린 성벽이다. 사과 한 마디로 소동은 잦아들지 몰라도, '선생'이라 부를 근거가 거세된 자리에 내가 '당신'이라는 단어를 툭 던져놓는다면 저 늙은 꼰대, 낡은 권위는 역린이라도 찔린 양 다시 발끈할 터다.

“그럼 '너'라고 할까요?, 아니면 'You'나 '니'라고 할까요?” 나의 이 발칙한 반문은 무례가 아니라, 호칭 뒤에 숨은 가부장적 악습의 껍데기를 잔인하게 벗겨내려는 이성의 메스란 걸 알만한 분은 아실 것이다. 사전 속 '젊은이'와 '늙은이'는 평등한 반의어(Antonym)로 나란히 누워 있건만, 현실의 '늙음'은 왜 비판받지 않을 성역의 낙인이 되었는가? 노인의 “젊은이”는 훈계의 깃발이 되고, 청년의 “늙은이”는 혐오의 화살이 되는 이 기울어진 저울.

거친 발언의 예의를 탓하기 전에 그 단어를 기어이 소환시킨 당신들의 무례한 '짓'부터 보라. 몰상식에는 눈감고 단어의 발칙함에만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이성 결핍의 시대. 우리는 지금 '어르신'이라는 가짜 가면 뒤에 숨어 서로의 호칭을 검열하며 신경질적인 줄타기를 한다.

이제는 그 성벽을 허물고 호칭이 곧 계급이 되지 않는 벌거벗은 땅, 나지(裸地)로 나서야 한다. 그곳에서 각자의 '나이'를 떼어내고 오직 '논리'로만 마주 서보자. 나이는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존중받을 언행을 했을 때 제값을 한다. 그때서야 경로와 공대의 예절도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실은 나도 경로 우대받는 늙은이라 남 일 같지 않아 하는 말인데, 늙어서 대접받고 싶으면 거울 보고 웃는 연습부터 하시게. '노땅' 권위 내세우고 성질부린다고 '선생님' 소리 절로 안 나오거든. 공대 예절도 눈이 달려 있어 제정신 박힌 늙은이한테나 찾아가는 법이니까.

2026. 3. 23. 06:19.
일산 향동에서
雲靜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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