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타이완의 운명을 결정 지은 미국 주도의 질서재편과 “타이완 지위 미정론”
근년 들어 포르모사(과거 16세기 타이완 해역을 지나가던 포르투갈인들이 이 섬을 보고 “아름다운 섬”이라고 외친 찬사) 타이완(臺灣)이 국제관계, 특히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 폭풍의 눈이 되고 있다. 타이완과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강대국들이 모두 타이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타이완을 “해방” 내지 통일해야 한다고 소리 높이고 있고, 특히 현 중공 총서기 시진핑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중국 군부에 외부에서 예측한 2027년보다 2년 앞당겨서 2025년에 타이완을 칠 것을 준비하라고 지시했지만 장요우샤가 중심이 된 타이완공격 시기상조론자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타이완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국내에 의견이 갈리고 있다. 즉 타이완 국민의 대략 4분의 1 정도가 중국과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나머지 국민들은 독립하거나 최소한 현상 유지하려고 한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거나 혹은 중국공산당을 붕괴시키겠다는 의지에서 타이완을 중국에게 넘겨줄 순 없다며 타이완 유사시 개입하겠다고 하고 있는가 하면, 일본은 “타이완 유사시”는 일본의 안보와 직결된다면서 직접 개입하겠다고 공식화 해놓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러한 동향은 무엇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타이완이 어떤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럴까? 타이완은 국제법적으로 독립국가가 아닌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그런가? 이 질문들의 핵심에 타이완은 불가분의 중국 영토라는 “하나의 중국론”(One China Policy)과 이른바 “타이완 지위 미정론”(Theory of the Undetermined Status of Taiwan)이라는 두 주장과 힘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국제정치의 현실이기도 하지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즉 역사문제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과거로 돌아가서 전후 사정을 고찰해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여기에는 타이완의 지정학적 가치가 내재돼 있지만 이 글에서는 이 문제는 논외로 하고 아래 지도로 대신하겠다.

1945년 8월, 일제는 패망하면서 자기들이 50년 간 식민 통치한 타이완을 중국에도, 여타 나라에도 돌려주지 않고 단지 “일본은 타이완과 펑후(澎湖) 제도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그리고 청구권을 포기한다”(Japan renounces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Formosa and the Pescadores)라고 한 바 있다.
일본의 이 입장은 그 이전 일제 항복 전의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 1943. 2)과 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 1945. 7)에서 연합국 수뇌(미 대통령 트루먼,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와 중화민국 총통 장졔스 蔣介石)가 합의한 타이완의 국제법적 지위와 다른 것이다. 당시 연합국 정상들은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빼앗은 만쪼우(滿洲), 타이완, 펑후 제도를 중화민국에 반환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이 아닌, 연합국들 간의 정치적 합의이자 의지 표명이었지만, 이때 그들이 말한 China는 “중화민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장졔스가 이끄는 중국국민당 정권을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제가 카이로 선언의 내용을 몰라서 그랬는가? 일제가 스스로 그렇게 결정했는가? 아니면 연합국의 수장 미국이 그렇게 만들었는가? 답은 간단하다. 미국이 타이완의 운명을 결정한 핵심 설계자였다. 일본은 단지 항복 직후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을 보내 서울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이 작성한 위 조약 문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천황”이 인정했을 뿐이다.
요컨대 대일 전쟁 중 연합국 수뇌들이 모여 결의한 정치적 합의로는 분명히 타이완을 중화민국에 돌려줄 계획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필히 유의해야 할 게 있다. 카이로 선언은 국제법적 “조약”이 아니라 “정치적 선언”이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영토 이전을 확정하는 문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까지는 타이완의 주권은 일제에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한 직후부터는 실제 일본과 타이완의 국제법적 상황이 급격히 달라졌다. 우선, 연합국 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내린 일반명령 1호(General Order No.1)에 따라 타이완 주둔 일본군이 중화민국의 국민당군에 항복했고, 중화민국이 연합국을 대신해 타이완을 군사적으로 점령했다.
같은 해 10월 25일, 타이뻬이(臺北) 공회당(현재의 타이페이 시 陽明山 소재 中山堂)에서 열린 국민당군의 타이완 인수식에서 당시 타이완 총독 겸 제10방면군 사령관 안도우 리끼찌(安藤利吉)는 일본 측 대표의 자격으로 중국 측 대표로 참여한 중화민국 정부의 타이완 행정장관 천이(陳儀)에 대해 타이완 접수를 인정했다. 당시 천이는 국민당 내에서 장졔스에서의 오른 팔이었다. 이 인수식에서 일본군은 항복 문서를 낭독했고 천이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오늘부터 타이완과 펑후열도는 중국의 영토로 복귀한다.”
타이완인들은 오늘날 이 행사를 두고 타이완이 일제로부터 주권을 찾아왔다는 뜻으로 “臺灣光復節”이라고 부르지만 이것은 피상적 이해와 광복의 환희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명확히 할 게 있다. 상기 천이와 안도우 리끼찌 사이에 있었던 타이완의 인수인계는 타이완에 대한 “접수”였을 뿐 국제법적인 “영토 반환 조약”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 국제법적 상태가 타이완에 대한 주권을 장졔스의 중화민국에 넘겨 준 게 아니라 단지 장졔스가 연합국을 대신해 “군사 점령”을 했을 뿐이다.
일제 패전 직후 워싱턴의 내부에서는 한 동안 타이완을 중국에 넘겨주지 말자는 논의가 있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조지 마셜, 더글러스 맥아더가 이 구상을 검토했었다. 이유와 동기는 세 가지였다.
첫째, 중국 내전 문제와 관련된 문제였다. 즉 미국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장졔스와 마오쩌둥을 화해시키려고 회담을 주선하는 등 중재도 하고 했지만 국공 회담이 끝나자마자 벌써 장과 마오 사이의 군사적 재충돌이 재개되고 있었다. 미국은 내전에 휘말릴 것을 우려하면서 소위 “중국문제”에서 발을 빼려고 했고 이때 아직 국제법적으로 귀속이 완전히 결정되지 않은 타이완을 내전에 휘말리지 않도록 했다.
둘째, 타이완이 지닌 전략적 가치 때문이었다. 사실상 타이완은 지금이나 그때나 필리핀, 일본, 중국 사이에 위치한 전략 요충지다. 그래서 미국은 타이완을 국제관리 지역으로 두는 방안을 논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구상은 장졔스가 강력히 반대한데다 전후 질서 혼란 때문에 실행되지는 않았다.
셋째, 타이완인의 민족적 문제였다. 미국의 정보기관 보고서는 타이완인은 중국인과 동일한 정체성을 반드시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일본 통치 50년 영향) 그래서 일정 기간 자치를 거쳐 독립시킬 방안도 검토됐다.
그런데 타이완이 공산 중국에 넘어가선 안 된다는 워싱턴의 이 구상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두 가지 변수가 생겼다.
첫째는 1946년 6월부터 본격화 된 국공 내전 끝에 국민당군이 중공군에게 패해 1949년 10월 중국 전역이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본토)과 중화민국(타이완)으로 완전히 분열된 것이다.
둘째는 그 이듬해 1950년 10월 마오쩌둥(毛澤東)이 한국전쟁에 중공군을 파병해서 미국과 전쟁을 치르는 적대국이 되자 미국이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Treaty of San Francisco, Treaty of Peace with Japan, San Francisco Peace Treaty)의 체결과 그 이듬해 4월 비준으로 타이완을 국제법적으로 어디에도 귀속되지 않는 국제법적 지위 미확정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일본이 주권을 '포기'한다고만 했을 뿐, 그 주권을 '누구에게 이양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타이완이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미국의 전략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다.
https://suhbeing.tistory.com/m/222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엔 소련도 보이콧했을 뿐만 아니라 중화민국(타이완)과 중공도 모두 조약의 서명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전전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서 언급한 것과 동일하게 규정했다. 즉 제2차 세계대전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킨 이 조약 제2조 b항은 “일본은 타이완과 펑후 제도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그리고 청구권을 포기한다(Japan renounces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Formosa and the Pescadores)”고 명시한 것이다.
타이완의 최종 귀속은 국제법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남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타이완 지위 미정론'의 핵심 논거다.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된 그해 1952년 미국의 영향하에 있던 일본이 따로 중국대륙의 새주인이 된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대륙을 내주고 타이완으로 물러난 장졔스의 중화민국 정부와 중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이 조약에서도 역시 타이완을 “China”에 반환한다는 표현은 없었다. 이때의 “중국”은 타이완의 중화민국과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 모두에 해당된다. 그 대신 일본은 이미 타이완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음을 인정한다라고만 명기했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면서 타이완을 중국에도, 여타 나라에도 돌려주지 않고 단지 전전의 “일본은 타이완과 펑후(澎湖) 제도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그리고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항복시의 선언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재판이었다.
이렇게 된 데도 그 이면에 당시 국제 상황을 명분으로 삼은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첫째가 누가 유일 합법 정부로 중국을 대표하는가 하는 대표권 문제였다. 당시 중국 본토와 타이완의 두 개의 중국이 존재한 것을 두고 일본이 타이완을 중국에 넘긴다라고 쓰면 어느 중국인지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미국의 대중국 전략의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은 마오쩌둥의 중공에 대한 인식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완전히 중국을 적대국으로 봤고, 마오쩌둥이 타이완 통일을 위해 그 전해 1949년 10월 진먼(金門)도를 군사적으로 공격해서 실패한 이래 계속 타이완 해방을 준비 및 시도해오던 상황에서 타이완을 아시아의 반공 방어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미국은 타이완의 법적 지위를 일부러 확정하지 않는 정책을 택했던 것이다.
https://suhbeing.tistory.com/m/221
지금까지의 소개는 전후 타이완이 귀속이 되지 않고 국제법적으로 지위가 미정된 역사적 연원을 살펴본 것이다. 오늘날 타이완의 행방을 두고 중국, 타이완, 미국이 벌이는 각축전은 이 역사문제의 바탕 위에 그 뒤 중국이 내건 “하나의 중국 원칙” 그리고 1979년 미중수교의 일환으로 제정된 미국 행정부의 “타이완 관계법”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세력들 사이의 핵심 쟁점에 대해선 별도로 논의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아서 이에 대해선 다음 기회로 넘긴다.
2026. 2. 22. 07:12.
일산 향동에서
雲靜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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